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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앞집 사는 남자 (5/72)

5. 앞집 사는 남자

간단한 정리 작업은 내친김에 보고서 작성으로까지 이어졌다.

러시아어로 되어 있는 조약문을 전부 번역하고, 보고할 내용들을 추리는 일은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리는 작업이었다.

“팀장님, 마지막입니다.”

“고마워요.”

마지막 번역본을 넘기고 이나는 시간을 확인했다. 어느덧 자정이 넘어 있었다.

집으로 향하는 막차는 12시 15분. 지금 빨리 가면 지하철을 탈 수 있다는 생각에 이나가 재혁에게 말했다.

“팀장님, 죄송하지만 퇴근해도 괜찮을까요? 막차 시간이 얼마 안 남아서요.”

이나의 말에 재혁은 벽에 걸린 시계를 확인했다. 그의 예상보다 시간이 많이 흘러 있었다.

“늦었군요. 택시비 지원해 줄 테니 택시 타고 가요.”

“아니요. 지금 가면 막차 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나가 단호하게 대답하자 재혁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래요. 오늘 수고했습니다. 들어가 봐요.”

재혁의 허락이 떨어지자 이나는 서둘러 사무실을 나왔다.

절전 시간이 지나 엘리베이터 불이 꺼져 있었다.

이나는 서둘러 계단으로 내려갔다.

구두를 신고 14층을 뛰어 내려가니 관절이 끊어질 듯 아팠다. 하지만 막차 시간까지 6분 남짓 남아있어서 그녀는 숨 돌릴 틈도 없이 역을 향해 달렸다.

허겁지겁 역에 도착해 개찰구를 지나는데, 지하철이 들어오고 있었다.

이나는 급한 마음에 서둘러 내려가다가 발을 접질려 버렸다.

“아야!”

그녀가 처량하게 넘어져 있는 사이, 막차는 야속하게도 역을 떠났다.

위이잉-

막차를 놓쳤다는 허탈함과 접질린 발목의 통증 때문에 이나는 한동안 일어나지 못했다.

차가 떠나고 한참 시간이 지나 조심스레 발을 디뎌 보았다.

“아….”

발을 디딜 때마다 시큰한 통증이 몰려왔다.

에스컬레이터 운행도 멈춰서, 그녀는 절뚝거리며 계단을 올랐다.

역을 나온 이나는 앞에 보이는 버스정류장 밴치에 앉았다.

아무도 없는 텅 빈 버스정류장에 앉아 구두를 벗어보았다.

그녀의 발목은 눈에 띄게 부어 있었다.

“후-”

어쩐지 서러운 마음에 한숨을 쉬며 발목을 문지르는데 문득 맞은편 빌딩의 광고판이 눈에 들어왔다.

빌딩의 전면을 덮은 광고판에서는 재혁이 찍은 회사 CF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나는 아픔도 잊고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싱가포르 야경을 발아래에 둔 호텔 객실. 그곳에서 슈트를 입고 앉아 있는 재혁은 상상 속에서만 존재할 것 같은 완벽한 남자의 모습이었다.

그때, 갑자기 그녀의 앞에 차 한 대가 멈춰 섰다.

끼익-

천천히 내려가는 차창 넌머로 보인 것은 재혁이었다.

“여기서 뭐 합니까?”

“네?”

이나는 무엇을 훔쳐보기라도 한 듯 놀라며 대답했다.

그녀의 모습을 관찰하던 재혁은 차에서 내려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가 차에서 내리는 모습은 마치 광고판의 재혁이 실제로 튀어나온 듯한 기분을 들게 했다.

“막차 놓쳤습니까?”

“네.”

재혁의 시선이 발목에 닿자 이나는 민망함에 주무르던 다리를 아래로 내렸다.

“다쳤습니까?”

“아니요.”

“….”

“조금요.”

“타요. 데려다줄 테니까.”

“괜찮아요. 택시 타고 가면 돼요.”

“사적인 감정 아니니까 타요. 안 타면 날 좋아하는 걸로 알겠습니다.”

“….”

그는 이나의 대답을 듣지 않고 운전석으로 들어갔다.

그는 운전대를 잡고 이나가 타지 않으면 출발하지 않겠다는 듯 앉아 있었다.

이나는 할 수 없이 그의 차에 올라탔다.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집 어느 쪽입니까?”

“인천이에요.”

이나의 대답이 떨어짐과 동시에 재혁은 거침없이 차를 몰았다.

고속도로를 달리는 어색한 시간.

재혁이 대뜸 물었다.

“모든 호의에 언제나 그렇게 공격적입니까?”

“그건 아니지만, 불필요하게 도움을 받는 걸 좋아하지 않아요.”

“왭니까?”

“갚아야 할 것 같아서요.”

“그렇군요.”

이후 이나의 동네에 도착할 때까지 두 사람 사이에는 별다른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재혁의 차가 동네 어귀에 도착하자 이나가 재혁에게 말했다.

“여기까지만 데려다주세요.”

재혁은 무심하게 핸들을 꺾으며 대답했다.

“이번만 집 앞까지 갑시다. 다리를 다쳤으니까.”

재혁의 차가 비좁은 빌라 골목에 멈춰 섰다.

이나는 차에서 내리며 재혁에게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오늘 고생했습니다.”

차 문을 닫자 재혁은 미련 없이 차를 몰고 사라졌다.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쌩하니 떠나 버리자 이나는 왠지 모를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문을 닫자마자 출발하네….”

차라도 한잔 달라고 하면 거절하려고 했던 자신이 한심하다고 생각하며 그녀는 집으로 들어갔다.

***

다음 날, 이나의 가족은 아침부터 이사 준비로 분주했다.

“에에! 총각! 그거 조심해! 가구 상하겠어!”

한참 이사 준비로 정신이 없을 때, 김 선생님이 집에 찾아왔다.

“손 좀 거들어 드리려고 왔습니다.”

엄마는 기다렸다는 듯 김 선생님을 안으로 들였다.

“잘 왔어요. 안 그래도 손이 좀 모자랐는데. 들어와요, 들어와.”

아침부터 찾아온 사람을 내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모든 준비를 마치고, 새로 이사할 아파트로 향하는 길.

이나는 새로운 출발선에 선 스무 살처럼 새로운 희망에 부풀어 있었다.

아파트에 도착하니, 입구에 이삿짐센터의 트럭이 한 대 더 들어와 있었다.

“앞집도 새로 왔나 보다.”

“응, 그러네.”

이나는 별달리 신경 쓰지 않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곧이어 본격적인 이사 전쟁이 시작되었다.

가구며, 옷이며, 쌓인 책들과 찬의 장난감까지. 정리할 물건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정신없이 정리하다 보니 어느덧 점심시간이 훌쩍 지나있었다.

“이나야, 찬이 데리고 가서 마실 것 좀 사 와라.”

“가시죠.”

이나는 함께 가는 것이 불편했지만, 기왕 나간 김에 김 선생님에게 이제 집에 돌아가셔도 괜찮다고 말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으로 그와 함께 나갔다.

밖으로 나간다니 신이난 찬이를 두고 문을 여는데, 앞집 문이 열리며 한 남자가 나왔다.

“헉!”

남자를 본 이나는 너무 놀라 하마터면 까무러칠 뻔했다.

“정이나 씨… 여기서 뭐 합니까?”

건너편 집에서 나온 사람은 재혁이었다.

보아하니, 그도 이 상황이 상당히 당황스러운 표정이었다.

“팀장님, 여기서 뭐 하세요…?!”

“이사 중입니다.”

“저도 이사 중인데… 설마?”

두 사람의 눈이 동시에 커졌다.

“앞집에?” “앞집에?”

놀란 표정을 하고 있던 재혁이 이나를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설마.”

눈초리를 알아챈 이나가 재혁을 향해 소리쳤다.

“아니거든요?! 팀장님이야 말로 저 따라오신건가요?”

“내가 먼저 계약했습니다.”

“언제 하셨는데요?”

“난 저번 주 금요일에 했습니다.”

“저는 목요일에 했어요! 제가 먼저 했잖아요!”

“내가 그걸 어떻게 믿습니까?”

두 사람이 티격태격하는 사이 문 뒤로 찬과 김 선생이 나왔다.

두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찬에게로 향했다.

찬이가 재혁을 보며 물었다.

“엄마. 누구야?”

엄마라는 말에 재혁의 마음이 다시 한번 요동쳤다.

엄마 손을 잡은 아이와 듬직한 남편, 그리고 사랑스러운 아내.

누가 봐도 단란한 한 가족의 모습이었다.

재혁은 구겨지는 표정을 가까스로 부여잡으며 태연한 척했다.

이나 역시 당황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당황한 기색을 최대한 숨기며 찬이에게 대답했다.

“엄마 회사 동료 아저씨야.”

“안녕하세요. 동료 아저씨.”

“그래.”

때마침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딱히 상투적인 인사말은 하고 싶지 않아, 재혁이 먼저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그때, 찬이 쪼르르 그의 뒤를 따라가 엘리베이터 문 옆에 찰싹 달라붙었다.

“엄마! 빨리 와.”

지갑을 놓고 왔다며 집에 다시 들어가려던 이나는 찬의 행동에 타이밍을 놓쳐 버렸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우물쭈물하는데, 눈치 없는 김 선생이 엘리베이터에 따라 올랐다.

재혁 역시 열림 버튼을 누르고 서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의미를 알 수 없는 눈빛이어서 이나는 마음이 심란했다.

“이나씨 안타세요?”

김선생님의 말에 이나는 하는 수 없이 찬이 옆에 섰다.

문이 닫히고, 1층으로 향하는 그 짧은 시간이 이나에게는 너무나 길게 느껴졌다.

찬이 재혁을 향해 초롱초롱한 눈빛을 보내며 물었다.

“아저씨. 우리 엄마랑 친해요?”

“찬아!”

놀란 이나가 나무라듯 찬의 이름을 불렀다.

재혁은 물끄러미 찬을 내려다보더니 대답했다.

“아니, 안 친해.”

재혁의 말에 이나의 표정이 굳어졌다.

찬은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재혁에게 말했다.

“왜요? 우리 엄마 이쁘고 착해요.”

재혁이 뭔가 대답하려는데 문이 열렸다.

재혁은 입가에 맴도는 말을 그냥 삼켜 버리고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또 뵙겠습니다. 동료 아저씨.”

찬의 엉뚱한 인사에 재혁은 걸음을 멈추고 잠시 찬을 내려다보았다.

“그래, 또 보자.”

예상과 다르게 재혁은 부드럽고 상냥한 표정으로 찬에게 인사했다.

“….”

***

이사는 해 질 녘이 되어서야 마무리되었다.

거실에 앉아 남은 짐들을 정리하던 이나의 머릿속에 낮에 있었던 일들이 떠올랐다.

그가 처음 사무실에 부임했을 때도 이렇게 놀라지는 않았다. 하필 맞은편 집이라니. 우연도 이런 우연이….

출퇴근 시간이나 휴일에 수시로 마주칠 생각을 하니 벌써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평소에 편한 차림으로 동네 슈퍼를 가려고 해도 그를 마주칠까 신경 쓰일 것이다.

‘왜 하필… 이 아파트야. 돈도 많으면서.’

문득 아까의 상황이 다시 떠오르며 그가 오해하지 않았을까? 하는 걱정이 고개를 내밀었다.

‘변명이라도 할 걸 그랬나?’ 생각하던 이나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아무 사이도 아닌데 뭐.”

“뭐가?”

이나의 혼잣말에 엄마가 물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싱겁긴.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고 내일하자 삭신이 쑤신다. 싹신이.”

“으응.”

그렇게 정신없는 하루가 지나갔다.

***

다음 날 아침, 이나는 재혁과 마주치는 것이 불편해 평소보다도 30분이나 일찍 나왔다.

문을 열고 나오는데 앞집 문이 동시에 열렸다.

“헉.”

또 마주치고야 말았다.

이나가 다시 들어가려는데 재혁의 목소리가 들렸다.

“출근합니까.”

“아니요. 잠깐 나와봤어요.”

재혁이 이나의 복장을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말했다.

“같이 가자고 안 할테니 그냥 나와요.”

“….”

쭈뼛거리던 이나는 하는 수 없이 그의 옆에 마주 섰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잠깐이 억겁의 시간처럼 느껴졌다.

엘리베이터를 타고도 어색함은 계속 되었다.

그 긴 어색함 속에 1층 문이 열라지마자 이나가 급하게 내리려 했다.

그때, 재혁이 그녀의 앞을 막았다.

“뭐 하세요?”

“뭐 하나만 물어봅시다.”

문이 닫히며 엘리베이터가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말씀하세요.”

천천히 고개를 돌린 재혁이 이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아들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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