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공과 사는 확실히 합시다.
재혁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기획서를 넘겨 보았다.
러시아어로 되어있는 보고서에는 여기저기 한글로 표기해 놓은 발음들이 보였다.
“장지영 대리. 러시아어 바로 번역 안 됩니까?”
“그… 그게 시간이 촉박해서….”
“내가 알고 싶은 건 장지영 씨 시간이 얼마나 있는지가 아니라 러시아어 번역이 되는지 여부일 텐데요?”
“할 수 있습니다! 조금이지만….”
자신 없는 지영의 말에 재혁의 냉정한 말이 돌아왔다.
“‘조금이’라는 말은 못 한다는 말이군요?”
“아니요. 할 줄은 아는데 시간이….”
“오후 미팅, 어떻게 할 생각이었습니까?”
“그게….”
차갑게 지영을 노려보던 재혁의 입에서 러시아어가 튀어나왔다.
“Кто это сделал?”(이거 누가 했습니까?)
“?!”
갑작스러운 러시아어에 지영은 아무 말도 못한 채 눈만 굴리고 있었다.
블라디보스톡 호텔 건설사업 이후, 재혁은 기회 1팀에 러시아어 공부를 필수적으로 요구했다.
지시가 내려온 지 벌써 6개월이 다 되어 가는 마당에, 지금까지 이런 간단한 회화도 불가능하다는 것은 변명의 여지가 없는 상황이었다.
지영인 대답하지 못하자 재혁의 눈길이 이나에게 향했다.
이나는 작게 한숨을 쉬고는 대답했다.
“Она это сделала.”(그녀가 했습니다.)
“Ты лжишь.” (거짓말.)”
“….”
상황이 악화되자, 보다 못한 박 과장이 다가와 재혁에게 말했다.
“하하, 팀장님. 지시가 떨어진 지 얼마 안 돼서 말입니다.”
“6개월이 넘었는데 이런 사업 계획서 하나 번역 못 한다구요?”
재혁의 번뜩이는 시선에 박 과장은 아차 싶어 바로 꼬리를 내렸다.
“시… 시정하겠습니다.”
“안 되겠네요. 이번 주에 기획 1팀 전원 러시아어 테스트 시행합니다.”
“헉!”
재혁의 말에 팀원들의 낯빛이 급속도로 어두워졌다.
재혁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그리고 오늘 미팅은 박지영 대리 대신해 정이나 사원이 갑니다.”
“네? 아무리 그래도 중요한 자리인데, 정직원이 가야 하지 않을까요?”
“말 한 마디 못 해도 정직원이면 된다는 말처럼 들리는군요?”
“헙. 그런 말뜻이 아니오라.”
“정이나 사원, 미팅 관련 자료 보내 줄 테니까 오후까지 정리하세요.”
“네.”
재혁은 더 이상의 이견은 받지 않겠다는 듯 몸을 돌려 방으로 돌아갔다.
남은 사람들은 갑작스러운 사태에 어안이 벙벙해 서로를 쳐다보았다.
“아씨!”
지영의 짜증과 팀원들의 눈초리가 한 번에 이나에게 쏟아졌다.
이나는 뭔가 잘못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재혁의 비호가 나쁜 소문을 만들어 낼 것만 같았다.
그녀는 자리에 앉아 재혁을 찾아갈 때를 노렸다.
“자자, 식사하러 갑시다.”
점심시간. 모두 점심을 먹으러 간 사이, 이나는 재혁의 방으로 찾아갔다.
“들어와요.”
문이 열리고 이나가 들어오자 재혁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시선을 돌리며 물었다.
“정이나 씨, 뭐 할 말 있습니까.”
“팀장님, 아까 하신 말씀 철회해 주십시오.”
“아까 하신 말씀?”
“네, 제가 미팅에 참석하는 거 말입니다.”
“왜요? 자신 없습니까?”
“아니요. 이러시는 거 불편합니다.”
이나의 말에 재혁의 한쪽 눈썹이 반달처럼 휘어졌다.
그는 하던 일을 멈추고 이나를 바라보았다.
“지금, 불편하다고 했나?”
따가운 재혁의 눈빛을 받으며 이나가 담담하게 말했다.
“예.”
“뭐가 불편하지?”
“사적인 감정으로 이러시는 것 같아 불편합니다.”
“사적인 감정이라.”
이나의 말을 곱씹던 재혁은 어이없다는 듯 웃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이나의 앞으로 다가갔다.
“그러니까. 정이나 씨 말은 내가 사적인 감정으로 그렇게 결정했다고 생각하는 거군?”
“네.”
재혁이 이나의 눈앞에 멈춰 섰다.
“혹시 그날 일 때문에 그런가?”
“이전처럼 대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전까지 저랑 대화 한 번 한 적 없으시잖아요. 공과 사는 구분해 주세요.”
두 사람 사이에 팽팽한 긴장감이 맴돌았다.
그 긴장감은 재혁의 웃음 소리와 함께 줄이 끊어지 듯 사라져버렸다.
“그렇게 합시다.”
“감사합니다.”
이나가 인사하고 뒤돌아서자, 그가 말했다.
“아니. 내가 공과 사 구분 못 하는 사람으로 하자는 말입니다.”
“네?”
“정이나 씨가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난 정이나 씨의 상관이고, 내가 판단하는 대로 업무를 처리합니다. 더 불만 있습니까?”
“하지만.”
“불만이 있으면 참아요. 그게 조직이니까.”
“….”
“나가 봐요. 오후까지 계약 내용 숙지하려면 시간 없을 거 같은데.”
그는 더 이야기하기 싫다는 듯 몸을 돌렸다.
“정말 이렇게 나오실 거예요?”
“아직 거기 있었습니까? 바쁠 텐데.”
욱하는 마음에 한바탕 쏟아부으려던 이나는 이빨을 질끈 깨물었다.
‘억울하면 성공해라’는 말을 떠올리며 그녀는 고개를 숙였다.
“점심 맛있게 드세요.”
탁-
그녀가 나가자, 재혁은 아까와 다른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그녀를 생각하니 괜히 웃음이 났다.
회장의 손자인 자신의 말이라면 웬만한 과장들은 물론이고 다른 팀의 팀장들도 한 수 접어주었다.
그런데 계약직 직원이 겁도 없이 자신의 말에 반기를 든 것이다.
보기에는 한없이 연약해 보이는데, 성격은 이렇게 불같다니.
‘하나도 안 변했네.’
이나에 대해 생각하며 그는 다시 서류로 시선을 돌렸다.
***
미팅 장소로 향하는 차 안, 이나는 회사를 떠나기 전 박 과장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어차피 보조니까 눈치만 잘 보고 와. 괜히 사고 치지 말고.’
이나의 무릎 위에는 선물로 준비한 고급 보드카가 올려져 있었다.
이번 미팅은 블라디보스토크의 고위 공무원과의 미팅이었다.
약속장소는 본사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호텔이었다.
두 사람은 출발한 지 5분도 되지 않아 미팅 장소에 도착했다.
공무원이 머무는 객실 문 앞에 도착할 때까지 재혁은 말은커녕 이나에게 눈길조차 돌리지 않았다.
객실에 도착해 초인종을 누르니 안에서 키가 큰 백인 남자가 나왔다. 오늘 미팅 상대인 블라디보스토크의 공무원이었다.
“Eoseo wayo.”(어서 와요.)
“Bangabseubnida.”(반갑습니다.)
재혁과 악수를 한 공무원은 이나에게 가벼운 볼 인사를 했다.
그 뒤로 6살쯤 보이는 여자아이가 수줍은 표정을 하고 서 있었다.
“<우리 딸, 애니카입니다.>”
러시아어로 말을 건넨 그는 애니카를 향해 수화를 했다.
아빠의 수화를 본 애니카는 두 사람을 향해 배꼽 인사를 했다.
그 모습을 본 재혁은 조금 당황했다. 말을 걸며 인사해야 할지, 수화를 해야 할지 쉽사리 판단이 어려웠다. 섣부른 행동에 그녀가 상처라도 받으면 계약이 난항을 겪을 것은 불 보듯 뻔했다.
그때, 이나가 애니카와 눈높이를 맞춰 허리를 숙였다.
“<안녕. 난 이나야. 정이나.>”
이나는 손짓과 입 모양을 함께 하며 애니카에게 인사했다.
이나의 인사에, 애니카는 부끄러운지 아빠의 다리 뒤로 숨었다.
공무원은 이나의 행동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어서 들어오시죠.>”
“<감사합니다.>”
네 사람은 객실 내 마련된 소파에 마주 앉았다.
자리에 앉자마자 재혁이 공무원에게 물었다.
“<객실은 어떻습니까?>”
“<훌륭합니다. 강의 배려로 이렇게 좋은 숙소에 묵게 되는군요.>”
“<편안하시다니 다행이군요. 블라디보스토크에도 이런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게 되면 좋겠군요.>”
“<양측이 만족할 만한 만남이 되었으면 좋겠군요.>”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재혁이 준비해온 선물을 건넸다.
“<좋은 술이 있어서 가져와 봤습니다.>”
“<아… 그렇습니까?>”
선물을 받은 공무원은 난처한 기색을 보이며 말했다.
“<곤란하군요. 딸아이와 술을 끊는다고 약속을 했거든요.>”
“<아… 그러시군요.>”
“<잘 갖고 있다가 손님을 접대할 때 써야겠습니다.>”
첫 단추부터 삐걱거리는 느낌에 재혁은 마음을 다잡으며 대화를 이어나갔다.
두 사람의 대화가 조금씩 깊어져 갈 때, 옆에 있던 애니카가 공무원의 바지를 잡아 당겼다.
서로 주고받는 수화가, 놀아 달라는 말 같아 보였다.
공무원이 당황하는 모습을 본 이나가 애니카에게 손을 내밀었다.
“<나랑 놀래?>”
애니카는 경계하듯 망설이더니, 이나의 미소에 손을 내밀었다.
이나는 그녀와 함께 객실 구석에 있는 램프 조명 앞으로 다가갔다.
“조명 놀이를 할거야.”
아들 찬과 놀아 주며 쌓아 둔 현란한 손놀림이 그림자가 되어 객실 커튼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림자의 모양이 변할 때마다 애니카는 신이 나서 이나의 손 모양을 따라 했다.
공무원은 다소 감격한 눈빛으로 그 모습을 보며 말했다.
“<애니카가 최고의 선물을 받았군요.>”
재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이나를 바라보았다.
오늘 극과 극인 이나의 모습을 보고 있었다.
그는 모르고 있었다. 이나를 보는 자신의 눈빛이 조금 바뀌었다는 사실을.
***
“<그럼, 좋은 결과 있길 기대하겠습니다.>”
“<물론이죠. 미스, 우리 딸과 좋은 시간 보내 줘서 고맙습니다.>”
“<별말씀을요. 저도 즐거웠어요.>”
공무원과 인사를 나눈 이나는 그의 다리에 붙어 있는 애니카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아까 그림자놀이를 할 때 만들었던 나비 모양의 손짓을 하자, 애니카가 손 모양을 따라 했다.
“<다음에 또 만나서 재미있게 놀자.>”
이나의 손길에 애니카는 말을 알아들은 듯 수줍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쉬운 작별 인사를 나눈 후, 두 사람은 주차장으로 향했다.
지하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 안은 여전히 어색하고 적막했다.
하지만 이나의 마음 안에는 아까 같은 불안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상태였다.
대신 그 빈자리에 자그마한 성취감이 푸근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조용한 가운데 재혁이 입을 열었다.
“오늘, 잘했습니다.”
그는 칭찬이 무안한지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뚝뚝한 그에게서 발견한 따뜻한 면모에 이나는 작게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감사합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재혁의 차에 올라타자 그가 이나에게 말했다.
“회사에 복귀해서 업무 정리 좀 하고 갑시다.”
“네.”
회사에 도착해 사무실로 들어서는데, 마침 사무실을 나오던 박 과장, 장지영과 마주쳤다.
“어? 팀장님, 지금 오십니까.”
“네, 퇴근하시는군요.”
“네네,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요. 일은 어떻게.”
“잘 마치고 왔습니다.”
“다행이네요. 하하.”
“저는 정리 좀 하고 가겠습니다. 먼저 퇴근하시죠.”
“네! 그럼 가 보겠습니다.”
박 과장은 재혁의 마음이 바뀔까 봐 서둘러 사무실을 빠져 나갔다.
그의 뒤를 따라가던 지영은, 질투 가득한 눈빛으로 이나를 흘기며 지나갔다.
방금 퇴근한 두 사람이 마지막이었는지, 사무실은 텅 비어있었다.
재혁은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며 이나에게 말했다.
“노트북 가지고 내 방으로 와요. 동선 최소화합시다.”
“네. 알겠습니다.”
그런데 막상 대답을 하고 나니, 아무도 없는 사무실에 단둘이 있게 되는 것이 꺼림칙하게 느껴졌다.
방 안으로 들어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이나는 생각했다.
‘일이잖아 이니야. 너무 예민하게 굴지 말자.’
이나는 결심을 하고 그의 방에 들어갔다.
문이 닫히며 달칵- 소리가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