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3화. 에필로그
사이나와 콘스탄틴은 일상으로 돌아왔다.
일상. 이 얼마나 좋은 단어인가.
날이 밝아 침실에 들이닥친 불친절한 햇살에 눈살을 찌푸리며 사이나가 파르르 눈꺼풀을 들어 올릴 때면, 항상 와 닿곤 하는 입술의 감촉.
등 뒤를 휘감은 단단한 팔.
맞닿은 너른 가슴은 그녀의 것과 맞붙어 있고, 두 쌍의 다리는 언제나처럼 가볍게 얽혀 있었다.
“…간지러워요.”
사이나는 가볍게 웃으며 응수했다.
입술은 눈꺼풀을 핥듯이 내려와 눈썹 뼈를 머금고 볼 언저리, 콧잔등, 귓불 등. 얼굴 곳곳을 빠짐없이 찾아들어 낙인을 찍었다.
그녀가 사랑스러워 죽겠다는 듯 베이비키스를 남기다가 결국엔 짙어지는 분위기.
“음….”
언제나와 같은 안온한 아침의 침대 위 풍경이었다.
얼굴을 지나 목덜미를 파고드는 입술을 느끼며 그녀는 자연스럽게 그의 목에 팔을 감았다.
그리고 뭔가 위화감을 느꼈다. 언제나와 같지 않은, 전과 달라진 것이 있었다.
“…머리카락.”
그의 목에 팔을 감다 보면 길게 휘감기듯 떨어져 그녀의 몸을 간지럽히던 백색의 긴 머리카락이 사라진 것이다.
목 위로 휑하게 잘린 머리카락.
길던 콘스탄틴의 머리카락은 지금 상당히 짧게 정리된 상태였다.
사이나는 그게 어색하여 그의 뒤통수를 손가락으로 훑었다.
“긴 머리가 좋습니까?”
그가 고개를 들고 그녀의 이마를 쓸어 올리며 물었다.
황자가 마지막으로 깨뜨렸던 봉인구에서 나타난 마수는 사마귀처럼 팔에 낫을 가진 형태였는데, 콘스탄틴이 한 번도 접해보지도, 약점도 모르는 것이라 잡는데 꽤 오랜 시간이 소요되었다.
그 와중에 사이나가 현장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콘스탄틴이 심적으로 동요해서 한눈을 팔았고, 그때 치명적일 수 있었던 공격이 있었다.
가까스로 피하긴 했으나 한쪽 귀가 크게 베이고 머리카락도 한 움큼 베이고 만 것이다.
녹색 포션으로 상처는 치유했으나, 잘린 머리카락까지는 돌이킬 수 없었다.
덕분에 사이나는 지난 시간과 현재를 통틀어 짧은 머리의 콘스탄틴을 처음으로 목도하고 있었다.
“약간, 어색하긴 하네요.”
“…많이 이상합니까?”
“아니에요. 짧은 머리도 잘 어울리세요.”
긴 머리를 길게 묶고 다니던 콘스탄틴이 금욕적이면서도 단호한 이미지를 풍겼다면, 짧은 머리카락의 그는 묘하게 전보다 야성적인 느낌을 풍겼다.
그녀는 큰 상처를 입었던 그의 왼쪽 귀를 손가락으로 쓸어보며 새삼 잘 아문 것을 다시 확인했다.
예민한 느낌에 그의 호흡이 약간 흐트러졌다.
“이만하길 다행이에요.”
“다시…….”
그가 제 귓바퀴를 문지르던 하얀 손을 붙잡으며 조용히 덧붙였다.
“기르겠습니다.”
붙잡은 손의 손가락 위로 입술을 찍으며 사이나에게 시선을 맞대어왔다.
“이번엔, 그대를 위해서.”
등에 새겨진 문양을 내보이기 싫어 꼼꼼하게 옷깃을 여미고 다니던 세월이 길었다.
씻는 동안 잠시 거울에 비치는 제 등도 들여다보기 싫어 기르기 시작한 머리카락이었다.
그러나 사이나를 만나 의미가 없어졌다.
그러니…….
“읏…….”
짙게 가라앉은 파란 눈동자가 그녀를 녹여 먹기라도 할 듯 집요하게 바라보았다.
그사이 그의 손은 천천히 부드러운 몸을 타고 내려가기 시작했다.
머리카락 한 올 걸쳐지지 않은 넓은 등판이 여체 위로 드리워지며 온통 그림자를 잠식했다.
짧아진 머리카락 때문인지 전보다 날것의 느낌을 풍기는 콘스탄틴의 집요함에 바르작거리며 사이나는 호흡을 할딱였다.
아니다. 평소 같은 아침 풍경이 맞았다.
안온하다가 격해지는 것이, 전과 똑 닮은 그런 아침이었다.
* * *
“셀틱 후작님.”
“…음?”
“나가실 시간입니다.”
사이나 셀틱 크레이머.
크레이머 공작부인이라는 호칭에도 아직 완전히 익숙해지지 못했는데, 셀틱 후작이라는 새 작위명까지 더해졌다.
거기에다 맹약자의 탄생을 축하하는 명목으로 내려진 엄청난 황실 하사품과 셀틱 영지까지 합하면, 크레이머 공작부인으로서 부릴 수 있는 부유함과 별개로 사이나는 상당한 개인 자산을 가진 사람이 되었다.
셀틱 영지는 추운편인 크레이머령과 달리 남쪽에 있는 영지라 상당히 기후가 좋다고 들었다.
이번 겨울에 답사도 하고 영주로서의 직무도 확인할 겸 내려가 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사실 이 작위는 단승직에 가까웠다.
사이나에게라기보다는 수호령 율리스의 주인에게 부여되는 작위와 권리이기 때문이다.
만약 후대에 욜리의 계승자가 나타난다면 작위와 권리 역시 승계될 것이고, 계승에 성공하지 못한다면 이 모든 권리는 사이나 당대에서 끝이 나고 황실로 다시 회수될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사실 아쉽지는 않았다. 계승의 조건이 명확하게 명문화되어 내려오는 다른 가문들과 달리, 사이나와 욜리의 관계는 특발성이자 특이점에 가까웠으니.
이후 계승에 성공하지 못한다고 해도 별수 없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손님들께서 이미 다 모여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오늘은 크레이머 타운하우스에서 작은 연회가 열리는 날이었다.
황실에서 엄청난 환영식과 연회를 열어준 것과 별개로 사이나는 가족과 지인들만 초대해 따로 시간을 갖고 싶었다.
그간 상황에 밀려 조심을 해야 했던 터라 보고 싶은 사람들이 아주 많았다.
아빠와 세이지. 친우들. 매디얼 황제와 헤비아탄 경.
거기에 각각 파트너로 데려온 사람들까지 더해지니 상당한 수가 되었다.
가족 연회 같은 느낌으로 열었으나, 막상 까 보니 꽤 규모가 컸다. 분위기만은 매우 친밀한 느낌이라 그럼에도 전혀 딱딱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예쁘군요.”
“예뻐요?”
“예. 매우.”
사이나를 에스코트하기 위해 대기 중이던 콘스탄틴이 간만에 한껏 꾸민 그녀를 보자마자 눈가를 휘어 웃으며 달달한 말을 흘렸다.
“당신도 너무 멋지고 예뻐요.”
“내가 예쁩니까?”
“네.”
그와 예쁘다는 표현은 그다지 어울리지 않을지 모르겠지만, 지금 심정은 그랬다.
“그럼 이따 예뻐해 주십시오.”
“이따요?”
“그래요. 이따. 둘만 있을 때.”
부부 사이의 시간을 암시하는 말에 사이나의 볼 언저리가 슬쩍 붉어졌다.
콘스탄틴은 그것도 예쁘다는 듯 짧게 볼에 입술을 찍고는 그녀를 연회장으로 이끌었다.
“와아!”
“축하드립니다!”
“맹약의 주인! 셀틱 후작님!”
그녀가 연회장으로 들어서자마자 사방에서 환호성이 쏟아졌다.
과한 환대와 호칭에 살짝 민망해졌으나 내색하지 않으려 애쓰며 웃음 지었다.
지인들만 모인 자리다 보니 입바른 소리나 예법에 따른 듣기 좋은 말이 아니라, 진심 어린 축하들이 쏟아졌다.
“엄청난 부자시라죠, 후작?”
“앞으로는 우리 얻어먹자!”
약간의 장난기도 섞여 있기는 했지만 말이다.
“나 율리스 보여줘!”
“나도!”
그보다는 보고 싶었던 사람들과의 포옹과 소소한 수다가 너무 즐거웠다.
그리고 손님 중엔 카이언도 있었다.
“축하드립니다, 셀틱 후작님.”
“아, 감사해요.”
애크로이드 저택에서의 마지막 만남 때문인가. 아직까지도 꽤 어색했다.
“나와 함께 왔어.”
플로리아가 나타나 카이언의 팔짱을 꼈다.
“둘이? 같이 왔어?”
“응.”
카이언의 귓가가 붉어진 것이 보였다.
생각도 못 한 조합이지만 이리 보니 둘이 꽤 잘 어울리지 않은가?
전에 황실 가면무도회에서 그가 플로리아를 데려다준 것이 뭔가 계기가 된 모양이다.
“제게 춤 신청하려고요?”
“…예?”
“알았어요. 이리 와요.”
“아, 아니…!”
한쪽에선 세이지가 키얼스틴에게 잡혀 플로어로 끌려 나가고 있었다.
둘 사이도 어쩐지 묘한 기류를 풍긴다. 세이지가 끌려 다니는 형국이기는 했으나, 어쩐지 싫어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사이나는 배시시 웃었다.
“고생했다. 내 딸아.”
뒤늦게 황자와 얽힌 사연을 알게 된 드보프 백작은 처음에 왜 제게는 알리지 않았느냐며, 화를 냈다.
그러나 결국 잘 해결이 되었고, 다친 곳도 없으니 잘 넘어갈 수 있었다.
가족들의 애정을 되찾은 것은 그 무엇보다도 행복한 일이었다.
한껏 웃고, 대화하고, 춤을 춘 사이나는 잠시 쉬기 위해 외곽으로 물러났다.
그곳에서 그녀는 물끄러미 연회장 안의 풍경을 눈에 담았다.
밝은 조명 아래 곳곳에 웃음소리가 깔리고, 따뜻한 분위기가 가득했다.
‘다들 행복해 보여.’
자연스럽게 사이나의 입가에도 미소가 그려졌다.
사이나는 샴페인으로 목을 축이며 이 따뜻해 보이는 광경을 열심히 눈에 새겼다.
‘유리야. 보여?’
-응?
‘네 덕분이야.’
-아니…….
유리는 한숨처럼 느릿하게 대답했다.
-사실 그건, 내 욕심이었어.
유리가 사이나의 시간을 되돌린 것은 정말 솔직히 말하면 제 욕심 때문이었다.
그녀가 죽기 전 상황을 미처 알아채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 놓쳐버린 시간들에 대한 자책.
제가 죽고 싶어져서 사이나에게 매달렸다.
-그러니 지금의 광경은, 네 스스로 만든 거야.
톡톡. 보이진 않지만 유리가 그녀의 코를 몇 번 치고 사라지는 것이 느껴졌다.
너무 좋아도 눈물이 나는 걸까.
사이나는 눈앞이 살짝 뿌예지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슬쩍 숙였다.
“사야?”
어느새 콘스탄틴이 근처로 왔는지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힘듭니까? 잠시 쉬겠습니까?”
고개를 숙인 모습에 그가 이상함을 느꼈는지 다급하면서도 상냥하게 물어왔다.
이 남자를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이런 사이가 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는데…….
사이나는 눈을 깜박여 눈물을 도로 삼키고는 고개를 들었다. 조심스럽게 올려다보는 그녀와 시선을 맞대 오며 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울었습니까?”
이 결혼이 없었다면 어땠을까.
시간을 돌아와 그녀가 가장 잘한 선택을 꼽으라면 그와 결혼한 것이 아닐까.
사이나는 그의 허리에 손을 감으며 너른 품에 안겼다.
“당신을 만나, 다행이에요.”
“…나도 그렇습니다.”
“사랑해요.”
콘스탄틴은 저도 그렇다는 듯, 세게 그녀를 마주 안아왔다.
정수리에 깊게 눌리는 그의 입술이 차마 말할 수 없을 만큼 그녀를 아낀다는 듯한 그의 마음을 표현해 주었다.
서로를 만나 더 완전해진 삶.
사랑하는 이와 함께할 수 있는 일상.
그것의 다른 이름은 아마도 ‘행복’이 아닐까.
<『그 결혼, 이번 생엔 제가 할게요』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