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2화. 회복
“4대 공작가의 마차가 다 있구만!”
“올해는 수호령을 또 볼 수 있겠어!”
“그러게! 퍼레이드 말고도 또 볼 수 있다니!”
각 가문의 인장이 커다랗게 그려진 마차들이 차례로 섰다.
그리고 동시에 마차 문이 열렸다. 각 마차에서 네 명의 공작들이 일시에 내렸다.
“맹약자다!”
“공작님!”
손대면 베일 것처럼 각이 제대로 잡힌 정복들을 입고서, 절도 있는 자세로 걸어 단상 위로 올라간 네 명의 공작들은 각각 정해진 위치에 섰다.
각 영지의 방위와 일치하는 위치였다.
그리고 기사단의 호위와 함께 마차가 하나 더 들어왔다.
“황실 근위대다!”
“황제 폐하시구나!”
“황제 폐하! 만세!”
군기가 확실한 근위대의 사열에 맞춰 마차가 멈추고, 중간에 넓게 뚫린 통로에 딱 맞춘 위치에서 마차의 문이 열렸다.
마차 문 앞에 간이 계단이 놓이고 근위대장으로 보이는 자가 매우 공손한 자세로 에스코트를 위해 섰다.
절도 있게 내밀어진 팔을 잡고 한 사람이 마차에서 내렸다.
황실의 상징이나 다름없는 하늘빛 머리카락이 정갈하게 틀어 올려진 머리 위에는 황제의 관이 자리 잡고 있었다.
어깨에 걸친 커다란 망토를 바른 모양으로 펼치기 위해 시종들이 뒤를 따랐다.
황제는 근엄한 얼굴로 천천히 걸어 단상 위로 올랐다.
이에 황제가 내렸던 마차가 나가고 또 다른 마차가 들어왔다.
“맹약자인가?”
“맹약자가 타고 있겠지?”
마지막 마차임을 예감한 사람들의 기대에 찬 추측들이 여기저기서 쏟아졌다.
그러나 마차가 멈추자 말소리가 오히려 작아졌다. 집중하느라 다들 입을 다문 까닭이다.
마찬가지로 마차 문 앞에 간이 계단이 놓였다.
스르륵.
소리 없이 문이 열리고 누군가의 손이 나오자 사람들은 숨을 삼켰다.
‘드디어…!’
몇 달간 얼마나 궁금해했던가.
새 맹약자의 정체가 드디어 드러나는 순간이다. 사람들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마차 밖으로 나온 전신이 이윽고 해 아래 모두 드러났다.
“……?”
“…왜 다 가린 거지?”
그러나 맹약자는 전신을 후드가 달린 로브로 가리고 있었다.
계단을 밟고 내려오는 전체적인 형태를 보며 사람들은 이내 뭔가를 눈치챘다.
“…맹약자가 어째… 키가 작네?”
“그러게 말이여. 덩치도 왜소해 보이는데?”
다른 공작가의 맹약자들과 체격이 매우 다르다는 것을 말이다.
“…혹시 미성년인가?”
“오? 그럴 수도 있겠구만.”
“아하, 그래서 밖으로 노출을 안 시키고 보호했던 건가?”
사람들은 웅성거렸다. 그리고 그 추측은 거의 기정사실이 되어 더 그럴듯한 정보들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아직 어린데 계약을 맺었으니 재능이 엄청날 것이라는 둥, 아니 실은 맹약자 중 가장 능력이 떨어져서 여태 숨겨둔 건지도 모른다는 둥.
그것도 모자라 크레이머 공작이 그간 어딘가에 숨겨뒀던 사생아일지도 모른다는 말까지 나왔다.
그러나 어찌 되었든 맹약자라는 사실은 변치 않았다.
“증명식을 시작한다-!”
군악단의 북소리와 나팔 소리가 울려 퍼지고 증명식이 시작되었다.
“맹약자는 짐 앞에 와 서시오.”
맹약자가 조용히 황제의 앞에 와 섰다.
두 인형이 가까이 서자 체격이 더 확실하게 보였다. 새 맹약자는 여황인 매디얼보다도 왜소했다.
그 대조를 보자 사람들은 더 확신했다. 분명 소년일 것이라고.
“증명 절차를 시행하겠다.”
황제가 단상 중앙으로 이동했다.
“이것은 황가에 대대로 내려오는 증명석으로, 이 위에 손바닥을 대고 수호령의 힘을 불어넣으면 날개의 형태가 떠오를 것이오.”
단상 중앙에는 허리까지 오는 높이의 받침대가 있고 그 위에 투박한 형태의 원반 같은 것이 놓여 있었다.
어쩌다 원반이 되었거나 아니면 정말 최소한으로 다듬기만 한 것 같은 거친 형태의 석조품이었다.
그 쓰임새에 대해 듣지 못했다면 그냥 돌덩이라고 생각했을 정도로 별 특징 없어 보이는 물건이었다.
그러나 로즈데일 공작이 다가가 손을 올리고 힘을 주입하자 허공에 촤르륵 날개의 형상이 떴다.
그리고 로즈데일 공작의 수호령인 카니스가 날개를 펼치며 나타나 주인의 뒤에 섰다.
와아아아-!
신비롭고 장엄한 모습에 사람들이 함성을 질렀다.
로즈데일 공작에 이어 프랜시스 공작, 애버딘 공작, 그리고 크레이머 공작인 콘스탄틴까지 마찬가지 방법으로 증명석에 힘을 불어넣었고, 매 때마다 각 가문의 수호령인 할콘과 에렌혼, 모레프가 나타나 제 주인의 뒤에 섰다.
수호령 넷이 사람 키의 두 배 정도 되는 크기로 네 방위에 자리 잡자 처음엔 꽤 커 보였던 단상이 어째 좁아 보였다.
콘스탄틴에 이어 황제 역시 증명석에 힘을 불어넣었다. 날개와 함께 아켈리온까지 등장했다.
대관식에서 계승을 이미 증명하였으나, 제국민 앞에서 보이는 것은 처음이다.
와아아아-!
매디얼 역시 흠 없는 자격을 가진 황제임을 증명하며, 그 사실을 만천하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
그리고 마지막으로 새 맹약자의 차례. 사이나의 차례였다.
그녀는 천천히 증명석 근처로 다가가 그 위로 손을 올렸다.
긴장감과 함께 욜리의 힘이 주입되기 시작했다.
증명석이 엄청나게 힘을 빨아들이는 것을 느끼며 사이나는 약간 아찔함을 느꼈으나, 손을 뗄 수는 없었다.
파앗-!
마침내 허공에 또다시 날개가 떴다.
‘욜리!’
그리고 커다란 날개를 펄럭이며 새 맹약자의 뒤에서 형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선명해진 형상이 날개를 크게 펼치자 아래쪽으로 커다란 풍압이 생기며 단상 위 사람들의 옷자락이 흩날렸다.
사이나도 예외는 아니어서 바람결에 로브가 크게 부풀었다가 내려앉으며 후드가 뒤로 벗겨지고 말았다.
“……!”
“어?”
사람들이 눈을 비비며 새 맹약자에게 집중했다.
그사이 크레이머 공작이 중앙으로 다가오더니 새 맹약자의 곁에 섰다.
작게 무언가를 속삭이는 듯하더니, 새 맹약자가 로브를 벗었다. 크레이머 공작은 벗은 로브를 받아 한쪽에 서 있던 시종에게 넘겨주고는 다시 제 방위로 돌아갔다.
“…여자?”
“소년이 아니라 여자잖아!?”
“여성 맹약자라고?”
로브를 벗자 그 안에서 나온 사람은 소년이 아니라 한 여성이었다. 작은 체격은 소년이어서가 아니라 여성이어서라는 것이 밝혀진 셈이다.
사람들은 경악했다. 그간 여성 맹약자가 없어 당연히 소년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여황이 등극하기는 했으나, 이는 예외적인 경우라고 생각했는데 또 다른 예외가 등장한 것.
그리고 일반 백성들이 아닌 귀족 관람석 쪽에서 그녀를 알아보는 사람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어디서 본 얼굴인데요? 누구, 아시는 분?”
“…혹시 공작부인 아닌가요?”
크레이머 공작이 잠시 다가와 함께 섰던 모습이 어째 본 듯했다.
“아! 크레이머 공작부인!”
“어머! 맞네! 맞네요!”
긴 검은 머리카락을 하나로 땋아 등 뒤로 넘기고 제복 느낌이 나는 심플한 은회색 드레스를 입은 한 여성.
웃음기를 완전히 지운 사이나의 얼굴은 냉엄하면서도 견고해보여서(실은 긴장해서였지만) 사람들의 감탄을 샀다.
그사이, 길게 뻗었던 수호령의 날개가 서서히 접히고 은회색 터럭을 휘날리며 거대한 늑대가 바닥으로 내려섰다.
안광이 형형한 눈빛이 느릿하게 움직여 사방으로 닿을 때마다 그 시선과 마주친 사람들은 괜히 몸을 움츠리며 긴장했다.
영롱한 보랏빛 불꽃 같은 것이 눈동자 안에서 일렁이는 것이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시선이 제 주인에게 닿아 멈추자, 그 보랏빛은 서서히 스미듯 사라졌다.
사이나가 저와 시선을 맞춰온 거대한 늑대의 콧잔등에 손을 올려 천천히 쓸어 올렸다. 거기서 느껴지는 수호령과의 친밀함이 누가 봐도 그녀의 수호령이 맞다라는 것을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맹약자는 약속하는 자. 수호하는 자. 깨뜨리지 않는 자이다.”
황제가 입을 열었다.
“제국의 여섯 번째 맹약자로서 그대는 그 힘을 수호하는 데에 힘써야 하고 깨뜨리지 않는 의무를 위해 애써야 한다. 그 약속에 따라 제국을 위하여, 제국민을 위하여, 약한 자를 위해 그 힘을 사용하여야 한다.”
수호령의 힘을 가진 자는 권리만큼이나 의무가 확실했다.
황제는 그것을 다시 한번 명기하고 있었다.
“정결의 주인이자 회복의 주인이여. 그대는 맹약자로서의 의무를 항시 새기며 애쓸 것을 맹세하는가?”
“네. 맹세합니다.”
“증명 절차를 통과하였다! 사이나 크레이머. 회복의 늑대, 수호령 ‘율리스’의 주인을 제국에 공포하노라!”
율리스는 욜리라는 이름이 수호령의 위엄을(위엄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깎는다 하여 새로 지은 공식 명칭이었다.
막상 욜리는 제 이름에 별다른 불만이 없었으나, 사이나는 그의 사회적 체면(?)을 생각하여 율리스라고 새로 짓기로 서로 합의를 했다. 평소에 부를 땐 여전히 욜리라고 부를 테지만, 대외적인 이름은 율리스가 될 것이다.
‘회복의 늑대’는 약간 뭉뚱그린 속성이었다.
정화의 늑대라고 하기에는 너무 대놓고 능력을 알리는 것 같아 별로 좋지 않다는 콘스탄틴의 충고가 있었기 때문이다.
정화도 일종의 회복인 데다, 욜리의 존재가 많은 것들을 회복시키고 수복시켰으니 틀린 것도 아니라 그렇게 정해졌다.
“또한 새 맹약자에게 셀틱 후작위를 내린다! 이는 맹약을 따라 함께 계승되는 권리가 될 것이다.”
황제의 선포가 끝나자 공작가의 네 수호령이 땅을 박차고 허공으로 떴다.
그리고 욜리도 떴다.
단상 위로 거대한 수호령 다섯이 높이 뜬 모습은 장엄하면서도 위압적이었다.
우와아아-!
어마어마한 함성이 울려 퍼졌다.
사이나 셀틱 크레이머.
드보프 백작가의 딸.
모레프의 주인이었던 크레이머 공작이 생애를 걸쳐 애지중지했던 그의 부인.
셀틱 후작으로서 제국에 여성의 작위 계승권을 다시 부활시킨 시발점.
회복의 늑대, 수호령 율리스의 주인.
아를어의 번역사를 새로 쓴 대학사.
훗날 여러 명칭으로 불리게 될 그녀의 이름이 전역에 알려진 그 날은, 날이 아주 좋았다.
-사야.
‘응.’
-건강하게, 행복하게, 오래오래 잘 사는 거야. 알았지?
‘응.’
하늘은 높고, 바람은 선선했으며, 햇살은 상냥한 그런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