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화. 한밤의 침입자
크림성 안쪽이라니.
무얼 노리고 온 것인지 뻔해서 불쾌감이 치솟았으나, 콘스탄틴은 이를 악물었다.
여기까지 와서 조급함으로 일을 망칠 수는 없었다.
그는 최대한 침착하려 노력하며 기감을 더 날카롭게 세웠다.
서서히 성내로 어둠을 따라 그림자가 퍼져나갔다.
저도 모르게 그림자를 밟은 자들이 잠시 몸을 흠칫하며 주변을 둘러보았으나, 이내 고개를 갸웃하고는 가던 길을 재촉했다.
그사이 그림자는 더 깊고, 복잡한 뒷길까지 퍼져나갔다.
뒷길이라고 해도 중앙령 외곽에 비하면 인구가 많은 탓에 검수해야 할 사람들이 많았다.
힘이 빠른 속도로 소진되는 것이 느껴졌으나, 그는 탐색을 계속했다. 잠깐 무리하는 것이 수색이 길어지는 것보다 훨씬 나았다.
그리고…….
한 건물의 지붕 위에서 눈을 감고 기감을 읽던 콘스탄틴의 눈이 번쩍 뜨였다.
‘…찾았다.’
콘스탄틴의 청안에 파르란 살기가 스쳤다가 사라졌다.
* * *
“답답해.”
사이나는 반강제로 방에 갇힌 상태였다.
크레이머 공작부인이 죽었더라는 헛소문을 잠재우지 않고 그대로 이용하기로 하면서, 방 밖으로 나갈 수 없는 처지가 되고 만 것이다.
방 안에서 할 수 있는 것이야 뻔하다 보니, 책이나 읽고 또는 아를어 논문 완성에 시간을 투자했다.
그마저도 길게는 못 했다.
팔찌가 깨져나갈 정도로 타격이 컸던 탓일까.
특별히 크게 아픈 곳은 없었으나, 온몸이 욱신거리고 묘하게 체력이 깎여 있었다.
약해진 체력에 집중력도 낮아지다 보니 방구석이 지겨워지기 시작했다. 그다지 사교적인 성향은 아니라 잠깐 못 나간다고 해도 괜찮을 줄 알았는데, 그렇지도 않았다. 후원이라도 거닐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바깥에서 누군가 공작부인의 방의 인기척을 알아보기라도 할까 봐 창문도 못 열고, 가뜩이나 낮부터 밤까지 암막 커튼으로 다 가려둔 상태라 더 답답했다.
“정말 너무 답답해.”
-참아. 잠시만.
“바깥 공기가 마시고 싶어.”
-금방 잡힐 거야.
“콘스탄틴도 보고 싶어.”
-별…….
대답하기도 싫다는 듯, 유리가 툴툴거렸다.
“금방이 언제야. 벌써 며칠째냐고.”
대체 왜 저렇게 잘 도망 다니는 것일까.
왜, 대체 왜, 그 황자는 특출난 재능을 이제야 발견해서, 하필 자신들을 상대로 써먹고 있는 것일까.
사이나는 불만이 속출했다.
“하아…. 안 되겠어. 잠깐만 바람이라도 좀 쐬자.”
숨이 막히는 것 같은 답답함이 점점 더 심해졌다. 십여 분이라도 후원을 거닐지 않으면 죽을 것처럼 갑갑했다.
이러다 괴성을 지르거나, 콘스탄틴의 이름을 부르며 엉엉 울게 될지도 몰랐다.
-아휴. 그래. 차라리 밤이 낫지.
이미 어둠의 장막이 드리운 시간. 본래도 내성 후원은 아무나 접근하기 힘든 곳이다. 그런 데다 소문 때문에 성내 사용인 수를 최소한도로 줄여버린 상태라 정말 인적이 드물었다.
잠깐 나가서 거니는 정도로 큰일이 나지는 않을 것 같았다.
-뭐, 사람이 접근하면 내가 알 수 있으니까.
욜리의 존재도 모자라, 후드까지 둘러썼으니 만반의 준비를 다 갖추었다.
-저쪽으로 내려가.
욜리는 인기척이 없는 쪽으로 잘도 길을 안내했다.
수호령이라는 것은 이다지도 유용했다.
다른 맹약자들이 들으면 그 유용성에 대해 웃을지도 모르겠으나, 당장 사이나의 감상은 그랬다.
‘콘스탄틴은 칼리고를 되게 싫어하는 것 같던데.’
사실 아직까지도 사이나는 정확하게 왜 그런지 이유를 몰랐다. 말이 더럽게 많다, 라는 평을 들은 적은 있으나 이게 핵심 이유라고는 생각 못 했다.
좀 수다스럽단 이유로 콘스탄틴의 그 진절머리 난다는 표정이 다 설명될 것 같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콘스탄틴은 수다스러운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구나.’ 정도의 인식은 갖게 되었지만 말이다.
덕분에 한때, 사이나가 말수를 줄이는 바람에 그녀가 화가 난 줄 알고 콘스탄틴이 안절부절못하던 적도 있었다. 그때 얻은 결론은 그냥 그가 칼리고를 싫어한다는 것이다.
주인과 수호령 사이라고 해서 다 좋기만 한 것은 아닌 것 같아서 새삼 남다른 기분이 들었다.
-때마침 아무도 없는 것 같네.
“오, 좋아.”
사이나는 신나서 걸음을 옮겼다.
서늘하게 내려앉은 공기와 풀내음이 섞인 싱그러운 밤의 향기. 바깥의 냄새였다.
내내 앉아 있거나 누워 있느라 굳은 것 같던 몸을 열심히 움직이며 사이나는 발바닥 아래로 느껴지는 땅의 느낌을 음미했다.
솔직히 날씨나 경치는 델본 쪽이 훨씬 좋은데도, 사이나는 이제 이곳이 제집 같았다.
언제 이리 익숙해졌을까.
빛도 없는 수풀 사이를 걷는 것이 으스스할 만도 한데, 전혀 그런 느낌이 들지 않는 것이다.
아무리 깜깜해도 그 뒤에 그녀를 해칠 만한 것이 있을 리 없다는 신뢰감 혹은 제집이기에 느끼는 안정감이 그 기반이었다.
-잠깐.
“음?”
-저쪽에 누군가가 있다.
“…이 시간에? 순찰 기사인가?”
-그런 것 같지는 않은데. 움직이질 않고 있어. 마치, 숨어 있는 것처럼.
…너무 섣불리 표한 신뢰감이었나.
사이나는 약간 싸한 기분을 느꼈다.
-게다가 한둘이 아닌데? 움직이지 않는 자가.
아니,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람? 수상한 자가 그리 여럿이라고?
“당장 들어가서 알리자.”
욜리의 말대로라면 비상 사태나 다름없었다.
-한 명은 가깝고, 나머지는 다 외곽에 있는데……. 이건 뭔 배치지?
그의 목소리는 약간 갸우뚱한 그런 느낌이었다.
-잠깐, 누군가 빠른 속도로 다가오고 있……. 음, 네 남편?
“뭐?”
황자를 추적하러 나갔던 그가 이곳으로 오고 있다는 건……. 그 수상한 자가 황자라는 뜻 아니야?! 그럼 그 움직이지 않는 여럿들이 혹시 황자의 수족인가?
엄청난 추적망을 뚫고 북동령에 황자가 나타난 것도 이해가 안 가는 판에 수족까지 그리 여럿을 부릴 수 있다는 게 좀 이상하긴 했지만 당장 그걸 분석할 시간은 없었다.
“어느 방향이야?!”
사이나는 마음이 급해졌다.
-위험하잖아. 네가 가서 뭐 하게?
“경고라도 해야지!”
기사단에 알리러 간 사이에 황자와 수족들이 일시에 콘스탄틴에게 덤비기라도 하면 어쩌냔 말이다.
상대편 인원이 많아도 도망치는 것만이라면 충분히 가능할 테니 얼른 가서 경고를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휴. 저쪽.
욜리는 못 말리겠다는 듯이 콘스탄틴이 오고 있는 방향을 알려주었다.
사이나는 후다닥 뛰어 욜리가 알려준 방향으로 갔다. 얼마나 갔을까. 수풀 저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함정이었나! 빌어먹을!”
“얌전히 잡혀 주시죠.”
“내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목소리를 들으니 정말 황자였다.
사이나는 눈을 부릅뜨며 어둠이 내려앉은 사위를 뚫고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애썼다.
달빛밖에 없어 자세히는 보이지 않았지만 수풀 저 너머에 작은 공터가 있는 듯했다. 거기서 황자와 콘스탄틴이 어느새 만나 대치를 이루고 있었다.
그리고 어두워서 그런지 숨어 있는 것인지, 사이나의 눈엔 황자 한 명밖엔 보이지 않았다.
‘그럼 수족들은? 숨어 있나? 그러다 갑자기 우르르 나오는 거 아니야?’
갑자기 어둑어둑한 사이로 흔들리는 나뭇잎들이 죄다 적군으로 보였다.
사이나는 침을 꼴깍 삼켰다.
‘그래도… 알려야 해.’
그녀는 콘스탄틴에게 경고를 해야 했다. 그런데 적들이 주변 어딘가에 숨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니 마구잡이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천천히 움직였다. 수풀 너머 공터로 최대한 가까이 가서 외칠 예정이었다.
-잠깐, 이 앞에 사람이 있어.
‘…뭐?!’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누군가 그녀의 앞으로 튀어나왔다.
순간 사이나는 정말 버럭 소리를 지를 뻔했다.
“마님.”
숨죽인 목소리로 상대방이 그녀를 마님이라고 불렀기에 가까스로 비명을 삼킬 수 있었다.
“…단장님?”
갑작스럽게 나타난 자는 바로 웨슬리 단장이었다.
“휴우, 마님께서 어찌 이곳에…….”
사이나만 놀란 것이 아니라 갑작스러운 난입에 그는 더욱 놀랐다.
단장은 사이나를 커다란 나무 뒤로 밀어 숨기며 공터 쪽을 살폈다.
“단장님께선 어찌 여기 계세요?”
“성내에 침입자가 있어 감시 중이었습니다.”
-아하. 그 여럿이 황자의 수족이 아니라 이쪽 기사단이었나 본데?
욜리는 이제야 대충 상황이 파악된다는 듯 중얼거렸다.
크레이머 기사단은 황자가 근처에 있는 것 같으니 비상 체제에 돌입하라는 공작의 지시에 바짝 긴장을 한 채 잠복근무를 서던 중이었다.
그런데 정말로 누군가 성내에 침입해 들어오는 것을 알아챘다.
웨슬리 단장은 그 침입자를 바로 잡지 않고 우선 지켜보라고 기사단에게 명했다. 혹시 감시 대상이 해를 끼칠 행동을 하거나 도망을 치려고 하지 않는 이상은 은신을 풀지 않고 감시만 할 예정이었다.
황자가 무슨 이상한 물품을 더 가지고 있는지도 모르는 데다, 그를 직접 굴리고(?) 처리하고 싶었던 공작이 일찍이 그리 지시해 둔 것이다.
그러던 중 때마침 크레이머 공작이 추적의 흔적을 따라 돌아왔고, 기사단은 제 주인을 돕기 위해 본격적인 그물망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공작부인이 나타났다. 이에 놀란 웨슬리 단장이 화들짝 놀라 몸을 드러낸 것이다.
어찌나 놀랐던지 상당한 담력의 소유자임에도 그는 심장이 덜컥거리는 것 같았다. 공작부인의 안위에 관해 제 주인이 얼마나 지대한 신경을 쓰고 있는지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었다.
“이 안쪽은 위험합니다. 제가 밖으로 안내하겠습니다.”
“어- 어! 안 돼!”
그러나 갑자기 소리를 지르기 시작한 공작부인의 태도에 웨슬리 단장은 덩달아 놀라서 그녀의 시선이 향하는 방향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사이나가 공터 쪽 상황을 살피려고 빼꼼히 나무 바깥으로 고개를 뺐다가 황자가 품에서 구슬을 꺼내는 것을 보고 만 것이다.
설마 구슬이 또 있었을 줄이야! 대체 몇 개를 챙겨 온 거람!
“마수가 나온단 말이에요!”
파삭-!
그러나 막지 못했다. 불길한 소리가 바닥을 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