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9화. 공작부인의 죽음
스그-악!
다시금 그어진 검날에 결국 검은 마수의 다리가 힘을 잃었다.
쿵! 소리와 함께 거대한 몸체가 바닥으로 무너졌다.
크르르륵! 마수는 바닥에 누운 상태에서도 팔로 상체를 일으키며 어떻게든 인간을 공격하려고 발악했으나, 말 그대로 발악이었다.
기동력을 잃은 마수는 그저 칼리고의 밥이 될 뿐이다.
콘스탄틴은 무감하다 못해 냉랭하기까지 한 시선으로 마수를 내려다보며 그림자를 흘려보냈다.
어느새 마수가 검은 어둠에 휩싸였고, 소름 끼치는 소리와 함께 먹혀가기 시작했다.
-오, 요즘 도통 맛보기 힘들었던 맛이네. 이런 애들은 전전주인 때 옆 동네랑 협력을 많이 하던 시절에…….
이내 쏟아지기 시작한 칼리고의 비평은 이런 상황에 진력이 난 그로서도 별로 듣고 싶지 않은 종류의 것이다.
안간힘을 써서 칼리고의 목소리를 최대한 차단하며, 그는 묵검에 맺힌 마수의 피와 체액을 털어냈다.
‘다음은…….’
그는 차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산등성이를 올려다보았다.
* * *
-야. 일어나. 괜찮냐, 응?
사이나는 자꾸 저를 깨우는 목소리에 미간을 찌푸리며 깜빡 눈을 떴다.
뻑뻑한 안구가 시야를 부옇게 비춰냈다. 몇 번 더 눈을 깜빡이며 사이나는 천천히 초점을 맞춰갔다.
“……유리?”
“사야?!”
그리고 잠깐의 틈새를 뚫고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음…….”
“정신이 듭니까? 사야!”
“…콘… 스탄틴?”
사이나보다 더 하얀 것 같은 창백한 안색으로 콘스탄틴이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
여긴 어디지. 아, 크림성의 침실이었다.
“…마수는요? 독어는…….”
마지막 기억을 떠올리며 사이나가 물었다.
“다 잡았습니다. 걱정 마십시오.”
“독은요…?”
독어는 잡았다손 치더라도 독은 어쨌을까? 상류 수원에 풀어진 독성은 그대로 남았을 텐데.
“우선 마을 사람들을 피신시키고 수원을 폐쇄해 둔 상탭니다.”
“아, 그럼 제가 정화할 수 있을 거예요.”
사이나가 몸을 일으키며 대답하자, 콘스탄틴이 저지했다.
“아니요. 좀 더 쉬어야 합니다. 안정이 우선입니다.”
“…? 하지만 전 괜찮은데요.”
“후…. 그대가 며칠 만에 깨어난 건지 알기나 합니까?”
그러고 보니 콘스탄틴의 눈 밑이 거멓게 죽은 것이, 어째 수상했다.
“…며칠인데요?”
“사흘.”
“…네에?”
“사흘이나 깨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동안 내 심정이 어쨌는지나 압니까?
사이나의 목과 어깨 사이. 우묵한 곳에 그가 이마를 묻으며 중얼거렸다.
사흘이라니…. 대체 왜 그리 오래 잠에 들었던 걸까?
물론 생명의 위협을 당해 몸이 많이 긴장을 했었고, 검은 마수의 일격에 큰 충격을 당해서(팔찌가 막아주기는 했지만) 온몸이 삐거덕거리는 느낌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사흘이나 자다니.
“-가씨!”
그런데 그때. 바깥에서 큰 소란스러움이 들려왔다.
“비켜! 내 눈으로 직접 봐야겠다!”
사이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문 쪽을 응시했다.
“…무슨 일이죠, 이게?”
익숙한 목소리인데?
“내가 나가 보겠습니다.”
콘스탄틴이 몸을 일으켰다.
“우리 아가씨가 돌아가셨을 리가 없어!”
아가씨-! 으헝헝!
습관처럼 튀어나온 ‘아가씨’라는 호칭과 이내 이어지는 처절한 울음소리까지.
‘…루퍼트 경?’
분명 그의 목소리였다.
근데 루퍼트 경이 대체 왜 내가 죽었다며 저리 서럽게 우는 것이지?
콘스탄틴이 다가가 문을 열기가 무섭게 우당탕탕 커다란 인형이 안으로 들이닥쳤다.
기사 몇이 그를 막으려다가 함께 안으로 밀려 나동그라지는 모습에, 콘스탄틴의 안색이 싸늘하게 변했다.
“여기가 공작부인의 침실이라는 자각이 과연 있는 겐가?”
“죄, 죄송합니다. 각하!”
기사들이 몸을 벌떡 일으키며 사과했다. 사이나에게도 사과를 했으나 시선은 반대로 돌린 채 목청을 높였다.
루퍼트를 막느라 사고격으로 들이닥치기는 했으나 절대로 보지는 않겠다는 듯 말이다.
“아가- 아가씨! 사, 살아 계셨어엉! 흐어어엉!”
그러나 루퍼트의 관심사는 완전히 달랐다.
그는 다른 기사들과 달리 눈물을 줄줄 흘리며 침대 발치로 기어 왔다.
“겨, 경? 대, 대체 왜 그래요?”
“살아 계셨을 줄 알았습니다! 저는 절대 믿지 않았어요! 아가씨께서 돌아가셨다니! 이 썩을 것들이 말도 안 되는 소문을!”
덩치는 산만 해서는 루퍼트가 침대 아래에서 그녀를 올려다보며 줄줄 울었다.
“제가… 죽었다는 소문이 퍼졌어요?”
대체 왜 그랬을까? 정신을 잃은 채 산을 내려와서인가?
“예에…. 전 당연히 헛소문이라고 여겼지만, 며칠째 아가씨께서 안 보이시니까 다들 진짜라면서……. 흐으엉!”
어찌나 충격을 받았는지 그간의 일들을 웅얼웅얼 줄줄이 늘어놓으면서도 울음은 멈추지 않았다.
평소 짓궂고 장난기 많던 루퍼트 경의 지나치게 새로운 모습에 사이나는 황당하기도 하고, 감격스럽기도 했다.
세이지가 붙여준 호위기사가 이렇게 정이 들 줄이야.
“확인 끝났으면 이제 돌아가 봐.”
그러나 특히 인내심이 짧은 자가 있었으니, 바로 콘스탄틴이었다.
얇은 침의 차림인 사이나의 어깨 위로 커다란 숄을 둘러주며 콘스탄틴은 가차 없이 명령했다. 그것도 모자라 짜증이 잔뜩 배인 투였다.
“그러고 보니….”
그녀에게 숄을 둘러주느라 가깝게 서 있던 콘스탄틴을 사이나가 더 가깝게 잡아당기며 귓가에 속삭였다.
“황자는요? 잡았어요?”
콘스탄틴이 짧게 고개를 저었다.
유능하기도 해라. 날이 갈수록 황자의 도망 능력에 감탄하게 되지 않는가.
“소문이 그렇게 났으면 그자도 내가 죽은 것으로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한창 기뻐하고 있을 모습이 그려져서 어쩐지 기분이 나빠졌다.
“흠…?”
그런데 그녀의 말에 콘스탄틴이 눈썹을 움칫하더니,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했다.
“어쩌면…….”
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근처 어딘가에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보통 그런 성향의 인간들은, 제가 한 짓으로 불행해하는 피해자의 슬픔을 직접 보고 싶어 하기 마련이니….
“잠깐, 자네.”
콘스탄틴은 눈물을 닦고는 다시 멀쩡한 얼굴이 되어 나가려던 루퍼트 경을 멈춰 세웠다.
“예?”
“조금 더 질질 짜 줘야겠어.”
“…예?”
“소문에 해명하지 말고, 계속 침울한 척하란 말이야.”
이게 대체 무슨 소리인가 싶어 어리둥절한 얼굴. 루퍼트는 조금만 더 자세하게 설명을 해주길 바랐다.
“못 하겠거든 잠시 방에서 나오지 말게.”
“…….”
가차 없이 까였지만 말이다.
루퍼트는 마지막 희망처럼 흘깃 사이나를 보았다. 그런 그를 보며 그녀가 웃었다.
‘시키는 대로 해요.’
입 모양으로 그리 이르자, 뭔지는 몰라도 알겠다는 얼굴로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웨슬리 경을 불러와.”
“예!”
이 명령은 쉽지. 루퍼트는 침울한 얼굴로 표정을 변화시키며 방을 나섰다.
반면, 콘스탄틴은 진지한 얼굴로 생각에 잠겼다.
여태 잘도 도망 다녔겠다?
콘스탄틴의 입가에 삐뚜름한 미소가 그려졌다.
‘그러나 이제는…….’
사냥을 해 볼까?
발밑 아래로 숨어든 쥐새끼를 잡을 시간이 드디어 도래했다.
사냥꾼으로서의 본능이 스멀스멀 끓어오르는 것을 느끼며, 그는 하나하나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 * *
공작부인의 생사를 직접 확인하겠다며 본성으로 밀고 들어갔던 직속 호위기사가 엉엉 울며 밖으로 나온 것이 여럿에게 목격되었다.
그에 따라 소문은 더 무성하게 살이 붙었다.
“이미 돌아가신 지 사흘이 넘었었대!”
“본성 근처에 가면 썩은 내가 난다던데?”
“영주님께서 부인을 너무 사랑하셔서 장례식도 안 하시고 시체를 끌어안고 계시다잖아!”
“아이고. 드디어 결혼하셨나 했더니…. 그럼 후계자는 또 어떻게 되는 거래?”
“부인께서 실은 후계자를 잉태 중에 그런 변을 당하셨다는구먼? 그래서 영주님께서 더 실의에 빠지신 거래!”
초반에 시체처럼 안긴 채 축 처진 모습과 루퍼트 경의 창백한 안색을 목격한 마을 사람이 ‘혹시 돌아가신 거 아녀?’ 하고 잠시 소곤거렸던 한마디 말이 와전되고 확대되더니 결국 이렇게까지 변형되고 만 것이다.
게다가 아무런 반응도 없는 크림성의 대처 때문에 사람들은 더더욱 소문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죽은 게 아니라면 영주든 영주 부인이든 누구 하나는 바깥에 모습을 비춰야 정상이라고 생각했으니까.
그게 아니더라도 크림성 주변을 휩싸고 있는 전체적인 분위기라든가, 순찰을 도는 와중에도 암울해 보이는 기사들의 얼굴을 보면 그쪽으로 의견이 아니 기울어질 수가 없었다.
“영주님이 미쳐버렸대, 글쎄.”
“밤마다 후원을 헤매신다는 소리도 있던데?”
“어이구. 안타깝기도 해라.”
“대체 이 영지가 어찌 될는지…….”
“맹약자가 한 명 더 나왔다고 길조라며 기뻐하던 게 엊그제 같은데 어휴…….”
영지민들은 덩달아 슬퍼하며 영주와 영지의 미래를 위해 걱정했다.
이러한 가라앉은 분위기는 점차 퍼져나가서 중앙령 변두리에 위치한 매우 허름한 주점에게까지 닿았다.
그리고 웅성웅성 사람들이 나누는 목소리에 한구석에 앉아 있던 남자의 어깨가 잠시 들썩였다.
키킥, 하는 소리도 얕게 새어 나오는 것 같았으나, 워낙 소음이 짙어 아무도 신경 쓰는 사람이 없었다.
후드의 남자는 테이블 위의 싸구려 술을 들어 한 번에 들이켜더니, 동전 몇 개를 남기고는 사라졌다.
* * *
황자는 멀지 않은 곳에 있을 것이다.
분명 콘스탄틴이 절망의 바다에 빠져 허우적대는 모습을 직접 확인하고 싶을 테니.
이것은 추측이 아니라 확신에 가까웠다.
그리고 이 확신에 기반을 두어 그는 약간 무리한 방식의 추적법을 펼쳐보기로 했다.
바로 그림자를 거미줄처럼 퍼트려 걸려드는 모든 존재들을 검수하는 방식이었다.
대신 낮에는 쓸 수 없어 전염병 마을에서부터 난 흔적을 사냥꾼의 방식으로 쫓았고, 해가 진 이후부터 그림자 그물 방식을 사용했다.
범위가 넓다 보니 콘스탄틴으로서도 쉽지 않았고, 또한 쉽게 지치는 방식이었으나, 놓치기 전에 꼭 잡고야 말겠다는 의지가 단호하게 섞이다 보니 감당할 만했다.
게다가 전과 달리 성과가 있었다.
‘중앙령 안쪽으로 들어온 모양이군.’
독어가 있던 산에서 찾은 흔적이 크림성 쪽으로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