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7화. 퇴장과 등장
갑작스러운 부유감에 아찔해졌다.
아랫배가 조여 오는 느낌과 함께 불안감이 몸을 감쌌다.
-사야!
욜리가 유리로 순식간에 화하며, 엄청난 속도로 사이나를 안아서 피했다.
그렇게 그녀가 피한 자리로 마찰음이 공기를 찢으며 지나갔다. 그녀가 있던 자리에 뭔가 기다란 것이 치고 지나가며 낸 소리였다.
조금만 늦었다면…….
아득한 가정에 사이나는 소름이 돋았다.
‘…촉수?!’
아니, 독어라며?! 물고기에 왜 저런 게 달렸어?!
독어라고 해서 당연히 물고기 과를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얼핏 드러난 형태가 해파리에 더 가까운 듯 보였다.
반면 루퍼트는 이런 긴박한 와중에도 유리를 보고 깜짝 놀라서 멍해졌다.
“…사, 사람으로? 이 무슨…….”
“-경!”
하지만 그는 지금 그런 궁금증에 정신을 팔 때가 아니었다.
독어가 그의 몸을 물 쪽으로 질질 끌고 들어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읏!”
루퍼트는 다급하게 자신의 검을 꺼냈고, 그것으로 촉수를 끊어내려 했다. 그런데 대체 표피가 어찌 구성된 것인지 날이 전혀 박히질 않았다.
“제에길!”
결국 그는 제 검을 바닥에 꽂아 넣고 그것을 붙들었다. 당장 끌려가는 힘을 끊어내고 다른 방도를 찾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얼핏 가느다란 독어의 다리는 생각 이상으로 질기고 단단해서 쉽게 끊어낼 수가 없었다. 손으로는 물론 발로 차도 끄떡없었고, 단검으로도 겨우 흠집이나 내는 정도였다.
도리어 지속적으로 당겨지는 힘에 다리가 뽑힐 것처럼 고통스러워지기 시작한 쪽은 루퍼트였다.
크르륵….
그것도 모자라 다른 마수까지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전황이 매우 좋지 않았다.
‘마수에 대해 공부 좀 해둘 것을…….’
후회가 막심했다.
“유리? 방법이 없을까?!”
사이나는 유리에게 안겨 검은 마수를 피해 이리저리 도망 다니는 와중에도 점차 물가로 끌려가는 루퍼트의 모습에 다급함을 느꼈다.
-하아,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뭐라도 시도해 보자! 제발!”
유리는 마수를 물가에서 먼 쪽으로 유인했다가 갑자기 속도를 높여서 루퍼트 근처로 다가갔다.
바로 욜리로 변한 뒤, 날카로운 손톱을 세워 촉수를 후려치자 독어가 움찔했다. 하지만 루퍼트의 다리를 놓아주지는 않았다.
반면, 급작스러운 방향과 속도 전환으로 사이나는 속이 뒤집히는 기분이 들었다. 입을 틀어막으며 겨우 외쳤다.
“정화…. 정화의 힘으로 후려쳐봐.”
욜리는 앞발에 정화의 힘을 덧씌워 독어의 다리를 다시 후려쳤다.
이번엔 확실히 효과가 있었다. 아무래도 독이 있는 마수인지라 상극으로 반응하지 않을까 싶었는데 정말 그런 듯했다.
욜리는 조금 전의 경험을 살려 이번엔 손톱에 정화의 힘을 모아 집중한 다음 다시 촉수에 박아 넣었다.
독어에게 공격이 통했는지 강철 같던 표피의 색이 변하는 것이 보였다. 이윽고 촉수가 부르르 떨리더니 조이는 힘이 약해졌다.
“가, 감사합니다, 아가씨!”
그 틈을 타고 루퍼트가 얼른 발을 빼고는 검 역시 뽑아냈다. 그리고 몸을 일으켜 멀찍이 도망쳤다.
-카앙!
그사이 검은 마수가 가까워져 있어서 막아내느라 아주 멀리는 갈 수 없었지만 말이다.
검은 마수가 휘두르는 팔을 막은 루퍼트의 검에서 마찬가지로 금속끼리 부딪칠 때 날 법한 소리가 났다.
“…죄다 피부가 왜 이딴……. 으으윽!”
그는 달려드는 쇠공과 싸우는 기분으로 마수의 공격을 이리저리 막아보려 애썼으나 겨우겨우 피하는 것에나 성공했을 뿐이다.
그리고 그것만으로도 검에 미세하게 금이 가기 시작하는 것이 보였다.
“제길! 도망치십시오!”
결국 루퍼트는 선택을 해야 했다.
그의 역할은 사이나를 지키는 것.
그러나 지금은 그가 그녀의 짐이 되고 있지 않은가.
루퍼트가 없다면 오히려 사이나는 충분히 도망쳐 목숨을 부지할 수 있을 것으로 보였다.
그녀에게는 수호령이 있으니 말이다.
“내가 도망치면 루퍼트 경은요?”
“아가씨가 계시면 제가 더 집중을 못 해요.”
자신이 이것을 상대하는 동안 제발 안전한 곳으로 피해 있으라며 루퍼트가 사이나를 설득했다.
“아, 또 아가씨라 불러버렸네.”
이 와중에도 낙천적인 성향의 그가 농담을 건넸다.
정말 전투에 집중하기 위해 그녀를 보내는 것이라는 듯, 가벼운 투였다.
하지만 사이나는 속지 않았다. 그의 눈빛이 이미 죽음을 예감한 것 같은 체념을 띤 것이 보였기 때문이다.
“제발요, 아가씨. 제가 명예로운 기사로 남을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사이나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캐롯 경의 말대로 해! 둘 다 살 방도는 없어!
유리 역시 동조했다.
‘하지만…….’
유리가 말한 ‘캐롯 경’이라는 호칭이 오히려 사이나의 마음을 더 흔들었다.
유리가 친히 루퍼트에게 붙여 주었던 별명이다.
급박한 상황에서 예기치 못하게 튀어나온 옛 별명.
그게 오히려 유리가 숨긴 채 드러내지 않았던(또한 여전히 가지고 있던) 루퍼트를 향한 신뢰감을 드러내는 꼴이 아닌가.
이런 상황에서 울면 안 되는데.
사이나는 참지 못하고 눈가에 눈물을 비추고 말았다.
“제가 조금 더 일찍 훈련을 시작했더라면 좋았을 텐데, 죄송합니다.”
이 와중에도 루퍼트가 저의 탓을 하며 엷게 웃었다.
“얼른, 가십시오.”
제발, 이라는 단어를 그가 삼키는 것이 보였다.
욜리가 유리로 변하더니 그녀를 다시 안아 들었다. 강제로라도 그녀를 데려가겠다는 듯이.
“하지만, 유리…!”
솔직히 사이나도 무서웠다. 얼른 이곳을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난 네가 또 이리 일찍 죽는 꼴을 볼 생각은 없어!
그러나 그렇다고 루퍼트를 놓고 갈 수는 없었다.
이미 유리의 목숨값으로 이어진 삶.
거기에 또 다른 목숨값을 얹고 싶지는 않았다.
‘내가 뭐라고….’
그러나 문제는 그녀가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거였다.
이 상황을 막아낼 방법도, 없어지게 할 방법도 없었다.
제발, 제발… 누구라도 나타나 주었으면…….
힘이 없으니 누군가의 구원을 바라는 것이 최선일 뿐이었다.
그러나 그런 가능성도 없다는 것을 안다. 절대 따라오지 말라며 신신당부한 뒤 산을 오른 것이 바로 그녀 자신 아니었던가.
‘제발! 누구라도!’
사이나가 유리에게 안겨 바동거리며 저항하는 사이, 물가에서 뻗어 나온 기다란 촉수가 스르륵 루퍼트를 향해 뻗어가는 것이 보였다.
검은 마수를 상대하기도 바쁜데 저것에게까지 붙들린다면…….
“…안 돼!”
사이나의 입에서 처절한 외침이 터졌다.
유리에게 들려 강제로 물가에서 멀어지면서 사이나는 내질렀다. 비명처럼 힘을 쏟아냈다.
전투형의 힘이 아닌 것을 알면서도 그리했다. 절박함에 저도 모르게 터져 나온 힘이었다.
어쩌면 아직 컨트롤에 미숙했기에 터져 나온 힘이기도 했다.
-사이……!
“아가……!”
파앗!
상황에 맞지 않게 터져 나온 힘은 빛살이 되어 사방을 메꾸었다.
그것은 정화의 기운 같으면서도 좀 달랐다.
강렬한 빛. 찰나였으나 잠시 시간과 공간을 잊게 하는 기이한 느낌이 사방에 내려앉았다.
정신을 차려보니 다들 움직임이 멈춘 상태였다.
“…….”
-…….
마수 역시 포함이었다. 조금 전의 빛이 무슨 역할을 한 것인지는 모르나 누군가 마수들을 강제로 정지시켜둔 것처럼, 굳어있었다.
어쨌든 이것은 기회였다.
“유리! 지금이야! 루퍼트를 데리고 도망치자!”
-하, 대체 뭔 짓을 한 거야, 사야.
유리도 무슨 영문인지 모르는 듯했으나, 이게 마지막 기회라는 것에는 동의했다.
그는 얼른 욜리로 변해서는 다시 루퍼트 쪽으로 달렸고, 죽음을 예감했다가 갑작스럽게 살게 된 루퍼트도 어리둥절하기는 했지만 순발력은 남아 있어서 얼른 욜리에게 올라타는 것에 성공했다.
아직까지도 굳어 있는 마수들을 뒤로하고 셋은 후다닥 뛰어 산 아래로 도망쳤다.
* * *
“안절부절못하는 게 아주 눈에 보이는군. 이만 들어가 보시오, 공작.”
매디얼이 비싯 웃으며 콘스탄틴에게 말했다.
“아닙니다.”
“어차피 몇 시간 안 남지 않았소. 게다가 지금은 낮이 아니오? 조금 일찍 들어가 본다고 무슨 일이 있으려고?”
계속되는 권유에 콘스탄틴은 잠깐 흔들렸다. 그러나 이내 고개를 저었다.
한번 일찍 떠나면 매번 그러고 싶을 것이다. 이런 식으로 일찍 간다고 사이나가 좋아할 것 같지도 않고……. 황녀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사이나를 볼 낯도 없을 것이다.
“고집하고는.”
말은 그리하지만 든든해 보이는 표정이었다.
“그렇다면 다른 쪽으로나마 내가 편의를 좀 봐줄 만한 것이 없겠소?”
다른 쪽의 편의라.
황녀가 이리 질문하자, 콘스탄틴은 이 상황이 뭔가를 묻기에 딱 좋은 상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 전 주웠던 유리 조각에 대해 혹시 아는 것이 있는지 한번 물어보아야겠다는 생각에 그는 품에서 주머니를 하나 꺼내 들었다.
주머니 안의 내용물을 손바닥 위로 쏟아내던 찰나.
-흐아아아아!
칼리고의 목소리가 갑작스럽게 터져 나와 머릿속을 울렸다.
콘스탄틴이 순간 움찔하며 미간을 찌푸렸다.
“…공작? 무슨 일이오?”
-주인아아아아아! 정말 너무한 것 아니냐아!
그간 사이나와 매우 친밀한 사이가 계속 유지되다 보니 칼리고가 튀어나올 새가 없었다.
접촉의 강도가 높을수록 칼리고가 깊이 숨어드는데 근래 따로 잔 적이 없다 보니, 사이나와 떨어진 뒤 하루 정도는 지나야 녀석이 다시 출몰하고는 했던 것이다.
그래서인가.
사이나가 없던 시절엔 칼리고가 머릿속에서 뭔 짓을 하든 표정으로 드러내지 않을 수 있었는데, 평화로운 나날이 지속되다 보니 어째 면역력이 낮아진 듯했다.
-이렇게 나를 방치하다니이! 수배애액 년의 세월이 넘게, 그 어떤 주인도 나를 이렇게 대한 자는 없었다아아아!
환장하게도 전보다 훨씬 더 시끄럽고 성가시게 느껴졌다.
하, 대체 전에는 밤이고 낮이고 이 소리를 들으며 어찌 살 수가 있었을까.
콘스탄틴은 슬그머니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마음을 가라앉히려 애썼다. 당장에라도 이 새끼의 입을 다물게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공작?”
“…아닙니다. 잠시… 머리가 아파서.”
“역시나 일찍 퇴근하는 것이 어떠하오?”
“괜찮습니다. 그보다는…….”
콘스탄틴은 손바닥을 펼쳐 보이며 황태자를 향해 내밀었다.
“보여드릴 것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