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6화. 살려고 발버둥 쳐 보거라
“황녀 전하께서 계승하실 수 있는 방법을 알아낸 게 바로 마님이시라고.”
“음, 그게….”
“유일한 계승자 후보라는 이유로 황자가 아무리 죄를 지어도 매번 유야무야 넘어가지 않았습니까.”
그렇긴 했지.
“그러니 이번 사태의 가장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하신 게 바로 우리 마님이라고 봐도 되는 거 아니겠습니까?”
루퍼트 경은 뭔가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마치 아빠가 딸의 재롱을 보며 흐뭇해 보이는 것 같은 표정이라 뭔가 이상하기는 했지만.
“아니에요. 최초 의문을 가지신 분은 황녀 전하신걸. 나야, 그 의문을 따라가다 보니 그걸 알게 된 거고.”
“결국 그 말이 그 말이죠!”
아무리 아니라고 해도 믿지 않을 기세라 사이나는 그냥 입을 다물었다.
뭐,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니까.
“그나저나…… 이 계곡인가 본데….”
대화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상류에 도착했다. 폭포 소리가 수면을 치는 소리가 아주 명료하게 들려오는 걸 보니, 귀가 시원해지는 기분이었다.
“이거… 괜찮은 걸까요? 색이 심각한데요.”
근데 이 무슨 일인가.
폭포 아래 꽤 깊어 보이는 계곡물이 고인 곳이 있었는데 색이… 정말 심각했다.
이미 썩어버린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검었다. 당연히 수심은 예측할 수도 없었다.
“이게 대체…….”
뭘 탔기에 이 계곡이 이런 색이 되었단 말인가.
-이게 문제의 원인인 건 확실하구만.
들여다보기만 해도 인상이 찌푸려지는 그런 색이었다.
-자연적인 건 절대 아니야. 인위적인 거야. 아래 샘은 그나마 많이 희석이 된 거였네. 와, 엄청 독하다, 독기가.
그때, 루퍼트가 물가에서 냄새를 맡으려고 하는 것을 보고 사이나가 외쳤다.
“경, 거기서 떨어져요. 엄청 독하다니까.”
그녀의 경고에 루퍼트 경이 흠칫, 하고는 기슭에서 몸을 일으켰다.
-이런 빌어먹을! 물에 뭔가 있어!
그때 뭔가 느껴졌는지 유리가 다급하게 외쳤다.
“뭐?! 조심해요! 경!”
말하기가 무섭게 뭔가가 튀어 올랐다.
촤아악-! 수면을 뚫고 튀어나온 무언가가 루퍼트를 덮쳤다.
“루퍼트 경!”
카앙!
반사적으로 뽑힌 검날에서 금속성이 울렸다. 튀어 올랐던 무언가가 다시 물속으로 처박혔다.
“뭐, 뭐야?”
루퍼트는 화들짝 놀라 물에서 더 멀리 떨어졌다.
제가 후려치고도 놀란 표정이었다.
-독마수다.
“독마수……?”
-독어라고 물속에 사는 종류의 마수. 물 근처에만 안 가면 괜찮아.
“물 근처에만 안 가면 괜찮나 봐요, 경. 이쪽으로 와요.”
“우와, 소름이…….”
식은땀 나는 표정을 하고서는 루퍼트가 사이나 가까이 다가왔다.
“쇳덩어리를 치는 것 같은 촉감이던데요. 절대 죽지는 않았을 겁니다.”
몸체가 금속처럼 단단한 마수가 있다더니 저게 그런 류인가 보다.
“…아래로 내려가서 알려야 할 것 같네요.”
결국 둘이서 해결 못 할 문제였구나. 일이 공교롭게 되었다.
“예. 당장 내려가시죠. 지금 정화가 문제가 아닙니다. 위험합니다. 저 혼자선 해결할 수 없어요.”
다행히 물 밖으로 나오지는 못하는 종류의 마수인 듯 도망치는 데에는 무리가 없을 것 같으니, 그나마 다행인 걸까.
“얼른-”
부스럭.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앞쪽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누구냐!”
루퍼트가 찰나에 검을 세우며 방어에 돌입했다.
수풀 사이에서 누군가가 나왔다.
“뭐야, 일반인? 수상하군. 당장 신원을 밝히지 않으면 공격하겠다.”
깊게 눌러쓴 후드 때문에 누구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키나 굴곡으로 보았을 때 남성은 확실했다.
무기는 보이지 않았으나 누가 봐도 수상한 자였다.
“이렇게 모습을 드러낼 생각은 없었는데…… 얌전히 독어에 당해 죽기나 할 것이지…….”
방금의 발언으로 더더욱 수상해졌다.
사이나와 루퍼트는 짧게 눈길을 주고받았다.
남자를 잡아야 한다. 이 사태와 분명 연관이 있는 자였다.
루퍼트가 천천히 검을 들어 공격 태세를 갖추기 시작했고, 사이나 역시 손에 낀 반지를 천천히 남자 쪽으로 겨냥했다.
“아니지……. 다 네년 때문이라는 걸 방금 알게 되었으니, 곱게 죽여선 안 될 것 같기도 하네.”
음산하게 중얼거리고 나서 킬킬 웃는데, 어쩐지 목소리가 익숙했다.
“네년 하나 때문에…… 일이 다 어그러질 줄이야……. 찢어 죽일 년…….”
어디서 들어본 목소리인데, 누구지?
“너만, 너만 아니었어도……! 감히 계집에게 계승법을 가르쳐?!”
…설마, 황자?
그녀의 의심을 증명이라도 하듯, 남자의 후드가 슬쩍 젖혀지며 얼굴이 보였다.
‘대체 여기 어떻게 저자가?’
황자가 맞았다.
그간 고생을 좀 했는지 안색이 아주 안 좋았고, 온몸에서 풍기는 초췌함도 상당했다.
반지를 겨누던 중이었다는 것도 잊었다. 너무나 의외의 상황이 닥치자 머리도 멈춰버린 듯했다.
“다 죽여줄 테다! 네년도! 가증스러운 크레이머 그 새끼도!”
황자는 광기로 번들거리는 눈알을 하고 사이나를 씹어 먹을 듯 노려보았다. 거뭇한 눈 밑에서 불온한 기색이 마구 풍겼다.
그 표정에 조금 소름 돋기는 했으나, 눈앞에 나타났을 때 얼른 잡아야 한다는 생각을 겨우 떠올릴 수 있었다.
‘생포해야 해…….’
하필 착용하고 온 반지가 기절이나 전뢰 반지가 아니라 빛화살 반지였다.
사이나의 실력으로는 다리나 팔 부위만 쏴서 경상을 입힐 자신이 없었다. 그러니 잘못 공격했다가는 그냥 죽여 버리게 될지도 몰랐다.
놓치는 것보다는 그게 낫지 않을까 싶기도 했으나, 문득 황자에게 이제 디오스가 없다는 게 생각났다.
디오스가 없으면 루퍼트의 실력으로도 충분히 제압이 가능할 것이다.
사이나는 계산을 마치고 루퍼트에게 명령했다.
“루퍼트 경, 제압해요!”
“예!”
그때 황자가 품 안에 손을 넣는 것을 보고 루퍼트가 더 안력을 돋으며 검을 휘둘렀다.
파삭!
황자가 품에서 꺼내어 던진 무언가가 루퍼트의 검에 부딪히며 깨져나갔다.
‘……깨졌다고?’
끽해야 단검이나 단창을 던질 줄 알고 받아친 건데 그게 아니었다.
크르르, 이상한 짐승의 울음 같은 소리와 함께 갑자기 뭉글뭉글 주변에 검은 안개 같은 것이 내려앉았다.
“시체도 제대로 안 남은 네년의 잔해를 보며 울부짖을 공작의 표정이 궁금하구나…….”
어느새 눈앞이 부옇게 가려져 황자가 보이지 않았다.
루퍼트가 킬킬거리는 소리의 방향을 따라 몸을 날리며 다시 검을 휘둘렀다.
“살려고 발버둥 쳐 보거라!”
그러나 아무것도 검에 걸리지 않았다.
“힘들겠지만! 하하하!”
어느새 웃음소리가 멀어졌다.
“아가씨!”
“-경?”
눈앞을 가리는 안개 같은 것을 치우려 사이나가 허공을 팔로 휘휘 저었다.
대체 뭔 수를 쓰고 간 거야?
생각해보니 굳이 생포할 필요가 있었나? 수상한 자라 공격했다고 했으면 되지 않았을까?
황자가 크레이머령에 있다는 건, 어차피 아무도 모르는 사실 같은데 그냥 빛화살을 쏴버렸어야 했는지도 모르겠다며 사이나는 후회했다.
“어떻게 됐어요? 놓쳤나요?”
안개가 조금씩 옅어지는 것을 보며 사이나가 루퍼트 경을 찾아 외쳤다.
-사야! 왼팔을 들어!
그때, 매우 다급한 유리의 목소리가 들렸다.
사이나는 반사적으로 왼팔을 들었다.
“-아악!”
순간 엄청난 타격감이 느껴지더니 온몸이 부웅 떴다. 그리고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엄청난 둔통이 전신을 휩쓸고 지나갔다.
“으윽…….”
왼팔에 채워져 있던 팔찌의 줄 하나가 끊어지며 쳐지는 것이 보였다.
‘팔찌이기도 하지만, 보호구이기도 합니다. 혹시라도 그대에게 무슨 일이 생기거나 할 경우, 이 팔찌가 한 번은 지켜줄 겁니다.’
그는 자신에게 이런 일이 생길 것이라고 예상이라도 했을까.
그저 항상 차고 있었던 팔찌라 사실 존재조차 잊고 있었는데, 이게 그녀를 살렸다.
“아가씨!”
루퍼트의 외침과 함께 차캉-! 하는 소리가 들렸다.
검이 무언가를 막아내는 소리였다.
“피하십시오! 마수입니다!”
사이나는 몸에 힘을 주며 일어났다.
어느새 안개는 다 흩어져 사라졌다. 그리고 다시 맑아진 시야 안으로 루퍼트가 거대한 검은 마수와 싸우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 마수는 크르르 소리를 내며 루퍼트를 위협하고 있었다.
곰과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빽빽한 송곳니가 잔뜩 박힌 아가리부터, 마찬가지로 송곳처럼 뾰족한 손톱을 잔뜩 세운 발까지.
온몸이 흉기처럼 보이는 마수였다.
-얼른! 나를 소환해!
아. 너무 놀라 욜리를 소환할 생각도 못 했다.
사이나가 욜리를 소환했다.
“하지만 너 전투형도 아니라며…….”
그녀가 할 줄 아는 것은 정화뿐이다. 대체 욜리가 무얼 할 수 있을까.
‘아, 도망!’
욜리에 올라타면 저 마수를 피해 달아나는 것은 충분히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루퍼트 경과 같이 가야 해….’
“너, 두 명은 태울 수 있지?”
-응. 루퍼트가 감당 못 해. 얼른 도망쳐.
사이나는 먼저 욜리 위에 올라탄 채 타이밍을 계산했다.
루퍼트는 현재 마수와 지나치게 맞붙어 있어서 빠져나올 수가 없어 보였다. 등을 돌리는 순간, 바로 찢겨 죽게 될 것 같았으니까.
사이나는 긴장감으로 떨리는 손을 최대한 안정시키며 반지의 방향을 맞췄다.
카앙!
루퍼트의 검이 마수의 발톱과 부딪히며 반탄력에 뒤로 밀리는 것이 보였다.
그러나 마수는 밀리는 대신 팔을 더 크게 휘둘러 루퍼트를 죽이려고 했다.
‘…제발!’
그때 사이나가 빛화살을 마수에게 쏘았다.
빛살로 날아간 화살이 마수의 등짝에 박혔다.
크륵!
정통으로 박힌 화살에 화난 단발음을 내뱉은 마수가 공격 대상을 바꿨다.
“아가씨!”
루퍼트가 순간 욕설을 내뱉었다.
“이리 와요! 얼른- 헉!”
어느새 발치까지 달려온 마수를 피해 욜리가 몸을 날렸다.
-옆으로 지나갈 테니 맞춰 타라고 해!
“지금! 올라타세요!
마수가 크르륵거리며 뒤를 쫓고, 욜리가 그것을 피해 지그재그로 피하며 루퍼트 곁으로 다가섰다.
타이밍 맞춰 루퍼트와 사이나가 손을 잡았다.
그런데 그가 올라타기 직전, 물에서 뭔가가 길게 뻗어 나와 그의 발목을 낚아챘다.
마수와 공방을 벌이다 보니 어느새 몸이 계곡에 가까워진 상태였는데 미처 자각을 못 한 것이다.
“으헉!”
루퍼트가 사정없이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사이나도 그와 손을 잡고 있었던 탓에 욜리의 등에서 떨어지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