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5화. 진원지를 향해
병이 아니라 독이었다니.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머리가 멍해졌다.
아니, 그나마 전염의 걱정은 덜었으니 다행이라고 해야 하는 건가.
‘하지만 이런 상황은 대처해 본 적이 없는데…….’
역시 콘스탄틴을 급히 호출했어야 했던 걸까?
갑자기 자신감이 급격히 떨어지는 것 같았다.
“하아…….”
-왜 그래? 독이면 더 다행이지.
“응?”
-내가 있잖아?
“…….”
아, 그렇구나!
병은 못 고치지만, 독은 고칠 수 있는 유리가 있지!
맹약자가 된 지 오래된 것이 아니다 보니, 유리의 능력 역시 자신에게 속한 것이라는 사실을 자꾸 잊게 된다.
사이나는 반색하며 약간 외진 곳으로 향했다. 유리와 대화하기 위해서다.
루퍼트 경이 뒤를 따르며 거리를 지켜줌과 동시에 다른 자들의 접근을 차단했다.
“그렇다 해도 정화의 방법이 문제야.”
-그건 그래.
이러고 있는 동안에도 마을 사람들은 끊임없이 악화되고 있을 것이다.
사이나는 무거운 마음이 들었다.
능력이 있어도 쓸 수가 없으니…….
그렇다고 정체를 숨기자고 저 사람들을 다 죽게 내버려 둘 수도 없고…….
“…약에다 정화의 기운을 심어서 마시게 하면? 안 하는 것보다는 효과가 있지 않을까?”
-흠. 해 본 적은 없지만…….
유리가 잠시 생각을 하는 것 같더니 덧붙였다.
-한번 시험 삼아 해볼래?
“어떻게?”
-작은 물 컵에 정화의 기운을 심어서 한 명에게 먹여보자.
“아, 좋은 생각이네.”
-참고로 이미 장기까지 손상된 사람은 못 고쳐. 해독을 하더라도 손상된 장기는 안 돌아오거든.
“그건…… 다른 방법을 써야지. 중앙령 의원들이 오면, 그런 쪽으로 좀 보게 해야겠네.”
완전 낫게는 못 하더라도 좀 나아지게는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장기를 보하는 약도 좀 지어주게 하고…….
사이나는 머릿속에 해야 할 일을 추가해놓고는 제 수통에 있던 물에다 정화를 중첩해서 잔뜩 걸었다.
그리고 환자 한 명에게 마시도록 해보았다.
“……효과가 있어.”
-오, 그러네. 다행이다.
직접 정화를 걸 때만큼은 아니어도 분명 효과가 있었다.
사이나는 시범이 끝나기 무섭게 다시 촌장을 찾았다.
“촌장! 본성에서 약재를 좀 챙겨온 것이 있는데 그걸 달여서 환자들에게 먹여야겠다. 깨끗한 물을 좀 가져다주겠는가?”
“예? 옙!”
얼마 지나지 않아 마을 청년 둘이서 커다란 물동이를 여러 개 들고 왔다.
그것을 들어 약을 달이기 위한 큰솥에 부으려던 차.
-물에 독이 들었어.
사이나는 깜짝 놀랄 소리를 들었다.
“잠깐!”
청년들이 물을 붓다가 말고 사이나의 말에 멈칫하는 바람에 물이 일부 바닥으로 쏟아졌다.
“독이라고?”
사이나는 쏟아진 물이 발 근처에 튀기는 것을 다급하게 피하며 되물었다.
-응.
“이 양동이 전체에?”
-응.
“무, 무슨 소리십니까?”
사이나의 말을 들은 청년들이 당황하여 물동이를 아예 놓치고 말았다.
사이나는 물을 피해 몸을 물리며 외쳤다.
“물에 닿지 않게 조심해! 그리고 저자들을 잡아 와!”
“예!”
기사들이 당장 청년 둘을 붙잡아 사이나 앞에 무릎 꿇렸다.
“촌장도 데려와.”
기사들이 즉시 촌장을 데려와 마찬가지로 무릎 꿇렸다.
“약을 만든다고 물을 좀 가져오라고 했더니… 거기에 독을 타 와?”
“…예!? 도, 독이요?”
그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마을 사람들을 죄다 죽일 속셈이었어?”
대체 무슨 목적으로 이런 짓을 한 것인지 전혀 감이 오질 않았다.
“예에에?! 아닙니다! 제가 대체 왜요!”
촌장은 사색이 되어 울부짖었다.
왜냐니, 그 질문은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이다.
사이나는 표정을 풀지 않고 싸늘하게 촌장을 노려보았다.
그것을 본 촌장이 몸을 바르르 떨더니 바닥에 거의 포복 자세로 엎드려 빌기 시작했다.
“저 물은 샘에서 방금 떠온 것입니다! 정말입니다요! 독에 대해서는 전혀 모릅니다! 제발 믿어 주십시오! 제가 왜 우리 마을 사람들을 죽이겠습니까요!”
눈물, 콧물을 다 쏟다 못해 이마를 바닥에 쾅쾅 내리찍으려 하는 것을 기사들이 붙들었다.
이에 청년들 역시 울부짖으며 억울함을 호소했다.
정신없이 울부짖는 표정이…… 거짓처럼 보이진 않았다. 파리하게 질린 안색은 진심으로 이 상황을 두려워하는 것처럼 보였으니까.
대체 이게 무슨 상황이야…….
저들이 아니면 대체 누가 범인이라는 거지?
“…샘? 샘이 어디지?”
“마, 마을 뒤편에…. 흐흑.”
사이나는 벌떡 일어났다. 샘을 직접 봐야 할 것 같았다.
그리고 알게 되었다.
-…이게 원인이었군.
마을 사람들은 이 샘의 물을 마시고 그렇게 된 것이다.
-누군가 독을 탄 것 같다.
이 샘은 흘러가는 물이 잠깐 고였다가 지나가는 장소라 물이 끊임없이 회전되는 형태였다.
그러니 독을 탄 시점을 기준으로, 시간에 따라 희석의 정도가 달라졌을 것이다. 그리고 언제 이 물을 길어다가 마셨느냐에 따라 중독의 정도도 달랐을 것이다.
보통 물을 가득 길어다 두면 2-3일은 먹는다는 증언이 있었으니, 운 좋게 독을 타기 전에 물을 길어다 뒀던 사람들은 중독을 피해 갔고, 그렇지 않은 자들은 아프거나 죽게 된 것 같았다.
“지금도 독 기운이 있어?”
-응.
“그럼 이 샘을 정화하면 되나?”
-글쎄……. 여기가 진원지가 아닌 것 같은데.
“뭐라고?”
-여기 말고 그 위. 상수원 쪽의 독 기운이 더 강한 것 같다. 위로 갈수록 독 기운이 더 세게 느껴지는데?
“…….”
사이나는 산 위쪽을 바라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대체 이 마을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야?
* * *
사이나는 루퍼트만 데리고 산을 올랐다.
‘이 마을에서 만들어진 것은 아무것도 먹지 말라고 전해. 특히 물, 물을 이용해 만든 요리나 음식물은 절대 안 돼.’
‘이 마을 밖에서 들인 것만 먹으라고 해. 다행히 식량을 미리 챙기라고 했으니 우선 그것들을 배식해. 환자들은 따로 스튜를 끓여 그것을 주도록 하고.’
‘이 약이 다 다려지면 환자들을 먹이고, 남거든 마을 사람들에게 모두 먹이도록 해. 상태가 안 좋은 환자에게는 여러 번 먹이면 더 좋을 거야.’
호위 기사를 한 명만 데려가면 안 된다며 뻗대는 기사들에게 여러 가지 일거리를 잔뜩 주고 왔다.
사이나로선 다른 기사들을 데려가면 안 될 이유가 있으니 별수 없었다.
마찬가지로 수호령 노출의 문제 때문이었다.
마을 사람들에게 물으니 산 중턱보다 좀 더 높은 곳에 폭포가 떨어져 물이 고이는 계곡이 있다고 한다. 그게 이 샘의 상수원이라고 했다.
아무래도 거기에 문제가 생긴 듯하니 가서 정화를 하고 와야 할 것 같은데, 가서 능력을 쓰는 것을 대놓고 보여줄 사람이 루퍼트밖에 없어서 사이나에게도 선택지가 없었다.
웨슬리 단장이 있었다면 말이 좀 달라졌겠지만(그는 황도에서 있었던 일들 때문에 이미 알고 있다.) 공교롭게도 오늘 같이 오지 못했기 때문에 결국 둘이서 가야만 했다.
그렇게 산에 오르기를 한참.
“말에서 내려야 할 것 같은데요.”
“그러네요…….”
지형상 더는 말을 타고 오를 수 없는 구간이 등장했다.
둘은 말에서 내려 말들을 근처 나무에 묶었다.
“이쪽입니다, 가시죠.”
그리고 계속해서 산을 타기 시작했다.
사이나 때문에 속도가 빠르진 않았다.
호흡이 흐트러지기는커녕 평지를 걷는 것 같은 루퍼트 경과 달리, 사이나는 점점 더 숨이 차서 헐떡이기 시작했다.
“업어드릴까요, 마님?”
“음. 괜찮아요.”
“왜요.”
“콘스탄틴이 싫어할 것 같아요.”
가끔 그는 이상한 포인트에서 질투를 하곤 하니까.
“허, 그분이 좀… 그렇긴 하시죠.”
자신만 그리 생각하는 것은 아닌지, 루퍼트 경이 동의했다.
“근데 비밀로 하시면 되잖아요.”
사이나가 헉헉대는 게 영 안쓰러운지 루퍼트가 계속 권했다.
“어차피 조금만 더 가면 되는걸. 그 정도는 걸을 수 있어요.”
“그놈을 꺼내서 타고 가시는 건요?”
“욜리?”
“예. 지금 저희뿐이지 않습니까.”
“좋은 생각이긴 한데… 그래도 지금은 조심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다 떨구고 온다고 오기는 했지만, 혹시 모르는 일이다.
어차피 상류에서 정화를 써야 하나, 떡하니 수호령을 달고 다니는 것은 대놓고 봐달라고 하는 것 같아서 좀 그랬다.
“휴우…….”
하지만 역시 쉽지는 않았다. 평소 활동이라고는 거의 없는 몸이니, 금세 티가 났다.
그렇게 가다가 어느 순간부터 루퍼트가 계속 말을 걸어오기 시작했다.
수다라도 떨며 올라가면 그녀가 덜 힘들게 느껴질 것이라고 생각한 것 같았다.
“근데 대마수 훈련은 확실히 다르더라고요.”
“그래? 어땠어요? 할 만했나요?”
“힘들던데요. 합격술이 많아서.”
“아, 서로 호흡을 맞춰야 하니까?”
하긴 수호령의 힘이 없는 일반 기사들이 제 몸집보다 큰 마수를 잡으려면, 아무래도 함을 합치는 편이 쉽겠지. 생각해보니 당연한 것 같았다.
“근데 다른 기사들이 사이나님 보고 다들 마님이라고 하니까 저도 좀 익숙해진 것 같더라고요.”
“응?”
“마님이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나오던데요?”
아, 그러고 보니 아까 웬일로 마님이라고 부른다 했더니.
사이나가 피식 웃고 말았다.
사실 이렇게 웃고 떠들 상황은 아니지만 제 주인의 기분이나 안위를 살피는 것이 루퍼트에겐 더 중요해서 그런 거라는 게 눈에 보여서 뭐라 할 수도 없었다.
되레 고마운 일이지.
“황자를 아직도 못 찾았다면서요?”
그렇게 온갖 이야기를 다 하다가 화제가 황자로 넘어갔다.
“네.”
“와, 대단하네요. 어떤 의미로.”
루퍼트가 감탄했다.
“그렇게 뛰어난(?) 분으로 안 보였는데 말이죠.”
“…그러게 말이에요.”
사이나도 쓴웃음을 지었다.
“그래도 황자 전하 뒤통수를 제대로 먹이셨다면서요?”
“네에?”
“저번에 각하께서 그러시던데요.”
콘스탄틴이?
이따금 콘스탄틴이 친히 시간을 내어 루퍼트의 훈련을 봐주곤 한다고 듣기는 했다.
아무래도 그때 둘이서 한 얘기가 있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