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4화. 그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다리엘?”
이렇게 아침부터?
어제 늦게까지 유족들의 피해 보상 서류와 영지 관련한 서류들을 잔뜩 보다가 잔 터라 사이나는 매우 피곤했다.
다급한 외침에 엉겁결에 일어나긴 했는데 아주 몽롱한 상태로 사이나가 물었다.
“무슨, 하암- 일이야?”
“큰일 났어요!”
“으응?”
“전염병이 터졌다고 해요!”
잠이 확 깼다.
“저, 전염병?!”
“네. 크림성에서 두어 시간밖에 안 되는 거리에 있는 마을이라 당장 대책을 취하지 않으면 이곳까지 위험할 수도 있어요.”
“갑자기 이 무슨…….”
급작스럽게 들이닥친 문제가 너무 큰 건이라 일순 머리가 하얘졌다.
‘…치, 침착해야 돼.’
사이나는 눈을 질끈 감고 호흡을 골랐다.
“우선…….”
하아. 크게 숨을 들이쉰 다음 사이나는 눈을 반짝 떴다.
“다시 한번 설명해 봐. 천천히. 자세하게.”
“네, 그러니까 아침에 한 촌장이 급히 영주님을 뵈어야 한다며 찾아왔는데…….”
다리엘의 설명은 이랬다.
크레이머 중앙령에서 말을 타고 전속력으로 달리면 한 시간, 마차로는 두세 시간 정도 걸리는 마을.
산을 끼고 그 아래에 자리를 잡은 곳으로 약초꾼과 사냥꾼, 그리고 밭을 일궈 사는 농부까지 다양하게 섞여 살아가는 곳이라고 했다.
그런데 어제부터 사람들이 하나둘 복통으로 괴로워하기 시작하더니, 지금은 마을 전체 인원의 삼분지 일이 넘는 사람들이 쓰러지고 말았다는 것.
그것도 모자라 본래 몸이 좋지 않았던 자와 노인들이 밤사이 십수 명이나 죽고 말았단다.
“어제 갑자기 발병해서 하루 만에 십수 명이 죽었다고?”
“네. 이 속도라면 순식간에 번져버리는 것은 아닌지…. 당장 대책이 필요합니다. 아, 주인님께도 연락을 취할까요?”
아무리 대단한 전염병이라도 어찌 하루만에?
뭔가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각하께는…….”
급한 안건이기는 하지만, 어차피 내일이면 돌아올 텐데 굳이 급히 부를 필요가 있을까?
그사이에 혹시 황자가 들이닥쳐서 황실에 변고라도 생기면?
아무리 공작가라도 책임을 면치 못할 것이다.
“아냐, 알리지 마.”
‘하루쯤은 그가 없어도 괜찮을 거야….’ 게다가 전염병은 사이나도 영주 부인으로 대처를 해본 적이 있었다. 홀랜더 영지는 워낙에 제대로 된 것이 없어 툭하면 전염병이 돌았기 때문이다.
별로 유쾌했던 시간들은 아니지만, 이리되고 보니 도움이 되는 것도 있어 다행이다 싶었다.
“우선은 상황이 급하니 내 눈으로 직접 봐야겠다.”
“직접이요? 하지만… 가셨다가 혹여 옮으시기라도 하면 주인님께 저희가 죽을지도 몰라요.”
“그였어도 직접 갔을 거야. 난 영주 대리의 입장이니 마찬가지로 직접 가야 맞지.”
“……그렇지만.”
“눈으로 봐야 해. 뭐가 원인인 줄 알아야 고치든 말든 하지.”
다리엘은 매우 불안한 눈빛이었으나, 사이나가 단호하게 나가자 입을 다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우선 짐마차를 준비해서 필요한 물품들을 싣도록 하고. 물품 목록은 곧 적어서 주마. 혹시 모르니 집사장에게도 교차 확인해서 더 필요한 것이 있는지 묻도록 하고.”
“네.”
“성내 의원들을 불러 증상을 설명한 뒤 동행을 요청하고, 약재상에겐 가용 약재들을 알아보고 최대한 많이 준비시키렴.”
“네.”
“기사들을 준비시키고, 나도 말을 타고 갈 것이니 준비시키고.”
“말을 직접 타시게요?”
“마차로 가면 배는 걸릴 테니, 응.”
사실 욜리를 타고 가면 순식간일 테지만…….
아직 밝히면 안 되니 이런저런 제약이 있어서, 이점이 있어도 이용을 할 수 없었다.
“짐마차와 함께 시종들도 잔뜩 데리고 오고. 식량 배분도 좀 필요할 거야.”
“네.”
“그리고 나 역시 당장 외출 준비를 해야겠다. 준비를 좀 해주렴.”
“네!”
사이나는 최대한 빨리 준비해서 포치로 내려왔다.
거의 세수만 하고 승마복만 갈아입은 것과 다름없었다. 화장도 하지 않았고, 꾸밈도 없는 매우 단출한 복장이었다.
아, 콘스탄틴이 준 팔찌와 무기용 반지 한 개만 혹시 몰라 착용했다.
“마님!”
밖으로 나가자 반가운 얼굴이 있었다.
“루퍼트 경?”
사이나가 알기로 루퍼트 경은 훈련 중에 있어야 했다.
크레이머령에 온 김에 마수를 상대하는 훈련을 받겠다며 해서 그러라고 한 것이 사이나였기 때문이다.
“난 다른 기사님과 가도 되는데요?”
“우리 마님은 제가 모셔야죠. 얼른 말에 오르시죠, 제가 돕겠습니다.”
미리 지시해둔 대로 그녀의 말이 대기 중이었다.
사이나는 루퍼트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말 위로 올라섰다.
“웨슬리 단장은요?”
말에 오른 다음 사이나가 물었다.
사안이 중대하니 당연히 따라올 줄 알았는데 없어서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방금 전에 방어선에 문제가 생긴 것 같다는 연락을 받고 급히 가셨어요. 그래서 제게 마님을 맡기셨습니다.”
아, 그래서 루퍼트가 온 거구나. 훈련 중이라 일부러 안 불렀는데 말이다.
“근데, 방어선이라니? 설마 또 마수예요?”
“그런 것 같습니다. 근데 저희가 가는 쪽은 반대편이라서 괜찮다고 하시던데요. 여차하면 이쪽도 인원은 많으니까, 너무 걱정 마십쇼.”
하긴, 전염병을 무력으로 해결할 것도 아니고.
게다가 단장이 없을 뿐, 호위로 붙여준 기사만 열이 넘었다. 그러니 전혀 상관없을 것 같다.
오히려 방어선 쪽이 더 걱정이 됐지만, 사이나가 도울 수 있는 것은 없으니, 할 수 있는 것이나 서둘러 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그래요. 얼른 가요.”
사실 한시가 급했다.
* * *
사이나의 승마 실력은 귀족 영애치고는 나쁘지 않았지만, 기사들에게 비할 것은 아니었다.
“괜찮으세요, 마님?”
그냥 편하게 달리는 것이 아니라, 최고 속도를 유지하며 목적지까지 계속해서 달리는 것은 확실히 달랐다.
“으…….”
긴장하며 달려서 그런지 허리와 어깨가 결렸다. 엉덩이와 허벅지도 아팠으나 부위명을 입 밖으로 꺼낼 수 없었다.
속도 좀 안 좋았다.
“괘, 괜찮아요…….”
마을에 도착한 것으로 기존 가지고 있던 에너지를 다 써버린 기분이었으나, 사이나는 눈을 감고 호흡하며 컨디션을 조절해보려 애썼다.
그러기를 한참.
겨우 몸 상태를 수습한 사이나가 마을을 돌아보기 시작했다.
그녀의 경험상 전염병은 여름에 가장 빈번하게 일어났다.
또한 환경의 문제도 있었는데 세금을 걷기만 하고 영지 정비를 안 한 영지일수록 쓰레기나 분뇨, 사체 등의 잘못된 처리가 악순환이 되어 병을 일으키곤 했다.
‘근데 크레이머 영지는 관리를 꽤 잘하는 편으로 알고 있는데?’
동물 등의 사체를 처리하고 분뇨나 쓰레기를 버리는 방법이 매뉴얼화 되어 각 마을 촌장이나 관리인이 따로 교육을 받고 정기적으로 중앙 관리자가 시찰까지 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근데 이 마을은 대체 뭐가 문제일까….
사이나는 전염병의 원인을 찾기 위해 천천히 이곳저곳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근데 뭔가 이상했다.
‘…이 정도면 깨끗한데?’
부패한 곳도, 썩은 곳도 없었다. 벌레가 들끓는 곳도, 이상한 냄새가 나는 곳도 없었다.
대체 무슨 전염병이기에…….
“…환자를 좀 볼 수 있을까?”
환경에서 원인을 찾을 수 없으니, 다음은 환자를 보는 수밖에.
사이나는 촌장을 찾아 요청했다.
“안 됩니다!”
그런데 여기저기서 반대를 하고 나섰다.
“혹시 옮으시면…!”
“멀리서 보겠다.”
“마님….”
“얼른 원인을 찾아야지 않겠나? 그래야 한 명이라도 더 살릴 수 있을 것이 아닌가.”
사이나는 반대를 뚫고 환자들을 모아뒀다는 천막으로 안내받을 수 있었다.
“유리, 너 병은 못 고치지?”
가는 동안 속삭이듯 작은 목소리로 유리에게 말을 걸었다.
-날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난 요정이 아니고 수호령이야…….
“혹시나 하고…….”
말 그대로 정말 혹시나 하고 물어봤다.
“뭐라고 하셨습니까?”
“으응?”
“제게 뭐라고 하신 것 같아서요.”
“어? 아니에요. 그냥 혼잣말이었어요.”
중얼중얼거린 것을(실은 유리에게 말한 거지만) 루퍼트 경이 들었나 보다. 괜히 민망한 마음에 표정을 굳혔다.
그랬더니 굉장히 도도한 귀족 마님 같은 표정이 되어서 루퍼트는 속으로 신기해하는 중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환자들이 격리되어 있는 마을 외곽 천막 안으로 들어갔다.
“으으윽!”
“아이고! 살려줘…!”
내부는 사람들의 비명과 신음으로 난리도 아니었다.
-음. 뭔가 냄새가…….
유리가 불쾌한 어투로 중얼거렸다.
냄새라니. 너 냄새도 맡을 수 있어?
사이나는 유리의 말을 듣자마자 그런 시답잖은 물음이 들었으나, 그에게 묻기엔 적절하지 않은 상황인지라 입을 다물었다.
-익숙한 죽음의 냄새인데, 이거….
그런데 들어보니 진짜 냄새가 아니라, 어떤 기운 같은 것을 냄새로 표현한 모양이다.
그렇게 유리에게 신경이 잠시 뺏겨 있던 사이에, 어떤 여자가 사이나를 발견하더니 마구 소리치며 기어오기 시작했다.
“귀부인! 귀부인! 제발 저 좀! 살려주세요! 제겐 어린 아기가…! 흐흑!”
파리한 안색, 꺼멓게 죽은 눈 밑. 벌써 죽음이 코앞까지 다가왔다는 게 선명하게 보이는 여자였다.
허우적대며 사이나를 향해 뻗어오던 여자의 손이 가차 없이 막혔다.
루퍼트 경이 검집째 여자의 손을 막으며 소리쳤다.
“어딜 감히 손대려는 것이냐! 물러서라!”
“잠깐요.”
그러나 사이나는 루퍼트 경을 말렸다.
“마님, 손대시면 안 됩니다!”
“손대려는 게 아니에요.”
여자의 손에서 뭔가 발견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손을 한번 펴보겠느냐?”
“귀부인! 사, 살려주십시오!”
여자는 병으로 인한 공포도 모자라 기사들이 내뿜어대는 기세에 더욱 눌려 눈물지으며 사이나를 올려다보았다.
“해를 끼치려는 것이 아니다. 병의 원인을 찾고 있는 것이니 손을 내밀어 보거라.”
“…….”
그제야 말귀를 좀 알아들었는지 여자가 앙상한 손등을 내밀었다.
“흠.”
“왜요. 뭘 발견하셨습니까?”
-아, 그렇구나.
“거기.”
“예!”
사이나는 기사들을 불러 몇 가지 지시했다. 다른 환자들을 돌아보며 사이나가 지시한 것들을 확인하고 돌아왔다.
사이나를 보고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니 ‘일치한다.’는 뜻이었다.
색이 죽은 손끝과 혀끝. 위중한 환자일수록 색이 더 까맣게 죽어 있는 것이 확인되었다.
-이자들은, 병에 걸린 것이 아니야…….
사이나도, 유리도 눈치챘다.
이 마을 사람들은 집단 감염된 것이 아니라, 집단 중독된 것이라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