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1화. 철퇴의 시간
그러나 디오스의 공격은 시작도 전에 막혔다.
“본 주인이 명한다. 그간 네게 부여된 계약의 줄기를 거두고 돌아오라.”
다급한 상황임에도 황녀는 별 요동 없이 아예 디오스의 대여를 해제해버렸다.
그에 따라 디오스는 띄웠던 몸을 다시 지상에 내리며 황녀 앞에 다소곳하게 섰다.
디오스의 복종에 따라 황녀의 계승권이 가시적으로 증명되었다. 누구도 황녀가 아켈리온의 선택을 받았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으리라.
반면, 디오스의 제어권을 완전히 잃어버린 황자는 길길이 날뛰었다.
“네가! 네가 어찌!”
어째서인지 황자는 황녀에게 쓰디쓴 배신감을 느끼는 표정이었다.
마치 절대 그럴 수 없는 사람이 배신이라도 한 것처럼.
그사이 콘스탄틴은 홀의 문을 열어 기사들을 들였다.
“황자 전하께서 과격하게 움직이다가 다치실까 저어되는구나.”
황녀의 말을 들은 헤비아탄이 황실 기사단에 명해 황자를 잡아 몸을 구속했다.
“놔! 이 천한 것들이! 감히 누구에게 손을 대는 것이냐! 당장 치우지 못해!”
길길이 날뛰는 황자를 무감한 표정으로 내려다보며 황녀가 첨언했다.
“황자 전하께서 목을 너무 쓰셔서 목이 쉬실까 걱정스럽구나.”
그러자 이번엔 황자의 입에 재갈이 채워졌다.
“죽여버- 읍! 으으읍!”
생각 이상으로 단호하고 위엄찬 황녀의 태도에 다들 의외롭다는 침묵과 함께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몸이 약하고 성격이 조용하여 대외적인 활동을 부담스러워 한다고 소문났던 그 황녀와 동일인물이 맞나?
사실 황녀가 황실의 모든 업무를 처리하면서도 공식 석상에서 두각을 잘 드러내지 않았던 이유는 그럴 때마다 황자가 온갖 짜증을 내며 성가시게 굴었기 때문에 자발적으로 상황을 배제해 온 것이지만, 사람들은 이유를 잘 몰랐다.
‘기대 이상이군.’
누굴 올려도 황자보다는 낫겠지, 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황녀를 다시 보고 있었다. 생각 이상으로 위엄 있고 능숙한 일 처리에 감탄함과 동시에, 참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아직 제국이 건재함을 느낄 수 있었으므로.
“자, 디오스.”
소란스러움이 정리된 장내를 둘러보며, 황녀가 다시 본론에 진입했다.
“묻는 말이 맞다면, 고개를 끄덕이거라. 알겠니?”
디오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 폐하가 돌아가신 장면을 보았느냐?”
끄덕.
“누군가 폐하의 생명을 강제로 뺏었느냐?”
끄덕.
정말로 시해라는 것이 드러나자, 주변이 술렁였다.
“조용.”
황녀의 명령에 다시 조용해졌다.
“그 범인이 시종장이더냐?”
절레.
“그럼… 누구지? 가리킬 수 있겠나?”
디오스가 고개를 돌려 황자를 빤히 쳐다보았다.
“으읍! 읍!!!”
황자의 입 막힌 발악 외에는 사방이 조용해졌다.
“…베개를 사용했나?”
끄덕.
“하아…. 그럼 시종장을 죽인 건 누구지?”
디오스는 고개를 끄덕이지도 젓지도 않고 가만히 있었다.
“…혹시 너더냐?”
끄덕.
“황자의 명으로?”
끄덕.
“…….”
실은 시종장이 목격자였다.
아바마마와 단둘이 있겠다며 강압적으로 사람들을 내보낸 황자의 요청에 수상함을 느껴 명을 어기고 몰래 들어갔다가, 변을 당하고 만 것이다.
“알았다. 이만 들어가거라.”
디오스가 사라졌다.
주변의 침묵이 여전히 묵직하게 지속되었다.
“황후 폐하. 황제 폐하를 시해한 죄로, 황자의 구속을 요청합니다.”
너무 분명한 증거 앞에 황후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으읍! 으으으-으읍!!”
알 수 없는 외침과 함께, 그렇게 황자가 끌려 나갔다.
* * *
제국 전체에 황태자가 발표되었다.
황태자라니!
계승에 성공했다는 뜻이 아닌가!
거의 10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애타게 기다리던 소식이었다. 귀족이고 제국민이고 할 것 없이 기뻐하며, 더 자세한 내용을 알기 위해 방이 붙은 곳으로 몰려들었다.
[…중략…
초대제의 유지를 따라 계승에 성공한 명백한 증거를 따라, 매디얼 맥페이든을 황태자의 위에 명한다.]
그리고 알게 되었다.
황태자의 이름이 길리언 맥페이든이 아니라 매디얼 맥페이든이라는 것을.
“황자 전하가 아니라, 황녀 전하의 성함 아닌가?”
“그런… 거 같은데?”
“그럼 다음 황제가 황녀 전하가 되시는 거여?”
이 소식에 제국 전체가 들썩였다.
여황의 존재는 그만큼 낯선 것이었다.
대체 이 소식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라 우왕좌왕할 무렵, 황도의 분위기가 급변했다.
곳곳에 엄중한 철퇴가 떨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황태자의 실권을 틀어쥔 황녀가 단호히 칼을 들었다.
잠시 멈칫했던 가면무도회의 여파가 폭풍우처럼 각 가문에 몰아치기 시작했다.
“성별 불문, 약을 쓴 자들을 엄히 처벌한다. 이는 타인의 자유권을 강제로 뺏고 미래까지 저당 잡은 무도한 범죄다!”
가장 먼저 그 철퇴를 맞은 것이 홀랜더 가문이었다.
사이나는 콘스탄틴과 함께 있다가 그 소식을 들었다.
“홀랜더 자작은 물론 그 여동생의 소지품에서도 약이 발견되었습니다.”
조지 홀랜더는 그렇다 치고, 조아나까지?
“특히 조지 홀랜더는 헤베타에게 약을 대준 공급책으로 밝혀져 더 큰 형벌을 받았습니다.”
“…….”
그런 사이였단 말이야?
그럼 전에도……. 근데 매번 그렇게 본인과는 상관없는 척…….
그리고 약 공급책이면 혹시… 자신을 죽음으로 이끌었던 독약도?
조지 홀랜더가 그렇게 위험한 약까지 구할 능력이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럴 가능성이 높다는 것만으로도 이마에 핏줄이 돋는 기분이었다.
저런 자를 어떻게 남편으로 생각하며 살 수 있었을까.
“그래서 어떻게 되었어요?”
“그 약물이 황족에게까지 미쳤으니, 작위 몰수, 가산 압류는 물론 국경지대 토벌군으로 강제 징집되었습니다. 전투 경험이 없으니 아마 반년도 못 가서 죽을 겁니다. 그 여동생은 한 집안에서 둘이나 현행범이 나온 것 때문에 가중 처벌을 받아 수도원에서 평생 봉사형이라고 합니다.”
조지 홀랜더가 사이나에게 집적거리려 했던 정황을 콘스탄틴에게 알려 미리 밑밥을 깔아두기는 했으나, 생각보다 형별이 강경했다.
과거 오라비와 함께 무수히 사이나를 괴롭혔던 조아나까지 걸려들 줄이야.
말 그대로 홀랜더가는 풍비박산 나고 말았다.
“헤베타의 침대에서 발견된 또 다른 남자는요?”
“그자는 약물 쪽 정황은 발견된 바가 없지만, 황실의 혈통을 오염시키려 한 중죄인으로, 광산에서 평생 노역형이 떨어졌습니다.”
“…….”
말 한번 섞어 본 적 없으나, 화인처럼 남았던 남자의 얼굴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발데즈 백작가는요? 황도를 떠났다는 것 같던데요.”
“엄청난 죄인을 배출한 집안이니, 중앙 귀족으로 살기는 힘들겠지요. 앞으로 다시 중앙 진출은 힘들 겁니다.”
아니, 귀족 계보에서 사라지지나 않으면 다행일 것이다.
중앙 귀족으로 사태 파악을 못 하고 딸을 헤베타로 들여보내어 이런 상황을 만들어낸 것만으로도 발데즈가는 몰락을 미리 따둔 것이나 다름없었다.
헤베타에게 반감을 품은 권세가가 한둘이 아니니, 자연스러운 몰락을 부추길 부자연스러운(인위적인) 재해가 추가로 가문을 덮치게 될 예정이겠지만, 사이나에게는 굳이 더 말하지 않았다.
그 외에도 유수의 가문들이 숨죽여 몸을 사렸다.
황자의 방에서 끌려 나오며 사람들에게 얼굴도장이 찍힌 자들이 남색가로 찍혀 죄다 가문에서 내쳐졌다.
남색가라니. 어느 가문에서도 딸을 보내지 않으려 할 것이다. 결혼 시장에서 최악의 후보가 되어버린 것에 가주의 분노를 사서 내쳐진 자들도 있었고, 지금 황도가 돌아가는 상황을 보니 어떻게 불똥이 튈지 알 수 없어 미리 꼬리를 끊어내고자 내친 가문도 있었다.
사실 그들 중 진짜 남색가는 몇 안 됐지만, 남색가든 아니든 타인을 강제로 희롱하려던 자들을 잡아다가 모아둔 것이었기에 불쌍해할 필요는 없기도 했다.
그렇게 많은 자들이 뒤안길로 사라졌다.
사이나는 기분이 묘했다.
후련한가? 잘 모르겠다.
기쁜가? 그것도 잘 모르겠다.
다만…….
‘끝이네.’
또 하나의 매듭이 지어졌다는 느낌만은 선명했다.
그렇게 사이나는 과거의 고통스러운 기억 한 줄기를 또 놓아주었다.
* * *
황제 시해라는 극악의 죄를 저지르고서도, 황자의 목은 아직 붙어 있었다.
황태자가 된 황녀와 4대 공작은 그의 처벌과 관련해 회의를 열었다. 처벌을 어떤 식으로 하는 것이 좋을지 의견이 분분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도 황족이라는 신분은 황자에게 큰 방패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황자가 아니었다면, 이미 목과 몸이 분리되고도 남았을 것이니.
하지만 얼마 남지 않았다. 회의 참석자들은 지난 황실 실록을 다 뒤져가며 최대한의 징벌을 뽑아내기 위해 선례를 찾는 등 애를 쓰고 있었다.
한편, 그 시간 다른 곳에서는 황후와 황자의 만남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어머니! 이건 다 모함입니다!”
“흐흐흑, 황자.”
“이 소자가 그랬을 리가 없지 않습니까? 제가 얼마나 아바마마를 존경했는지 다 아시지 않습니까! 제가 시해라니요! 이건 다 모함입니다! 황녀와 공작들이 짜고 저를 모함한 것이 틀림없어요! 제발 저를 풀어주십시오, 예?”
황후는 흐느꼈지만 그렇다고 그를 풀어줄 수는 없었다.
누가 봐도 증거가 명명백백했기 때문이다.
황제의 위를 향한 오랜 집착으로 그랬으려니 이해하면서도, 눈앞의 제 자식이 권력을 위해 아버지까지 죽이는 무정한 사람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기도 했다.
“어머니, 어마마마. 그럼 투옥 위치라도 좀 바꿔주십시오. 그 정도는 하실 수 있지 않습니까.”
울면서도 고개를 젓는 황후에게 갑자기 황자가 태도를 바꿨다.
황자는 현재 지하 감옥에 투옥된 상태였다. 감옥이라는 장소의 특성에 지하라는 위치적 속성이 더해진, 당연하게도 장기간 머무를수록 좋지 않을 게 뻔한 그런 곳이었다.
“얼마 전 사고로 그렇지 않아도 몸이 별로 좋지 않은데 눅눅한 지하에서 장기간 있다가는 이 소자, 금방 죽을지도 모릅니다.”
황자는 벌써부터 몸이 쑤시고 습기 때문에 뼈마디에 한기가 든 것 같다며 호소했다.
그나마 황자라는 신분으로 고신도 한 번 안 받았음에도 그는 죽을 것 같다며 울상이었다.
“어마마마, 이 소자 황족입니다. 설령 형을 받아 죽더라도, 그 정도 품위를 지킬 자격은 있지 않습니까?”
황자는 다양한 방식으로 제 주장의 타당성을 읍소했다.
그리고 결국 황후는 설득당했다.
보나 마나 큰 형벌을 받을 텐데, 그 전에 몸을 조금 편하게 해주는 것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어미 된 자의 입장으로 마음이 매우 약해졌다.
그렇게 황후는 아직 황태자에게 넘어가지 않은 황제의 인장으로 조서를 내렸다.
황자의 투옥 위치를 지하 감옥이 아니라 황성 북탑으로 옮기라는 조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