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화. 진범을 알아낼 방법
무표정한 표정 이면으로 꽤 복잡한 생각을 하고 있으리라.
“…….”
사실 황녀에게도 다른 길은 없었다.
그럼에도 스스로 내면을 갈무리할 필요성이 있음은 다들 이해하는 바라, 조용히 그 침묵에 함께 동조했다.
그마저도 상황이 긴 시간을 허락하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이런, 불청객이 오신 모양입니다.”
애버딘 공작이 화사하게 웃으며 일어났다.
“어차피 모시려 했는데, 알아서 오셨군요.”
입은 웃지만 차갑기 짝이 없는 눈길로 문가 쪽을 응시했다.
“때마침.”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쾅-! 하고 문을 걷어차며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하!”
황자였다.
무도한 침입자의 작태를 네 명의 맹약자들이 죄다 서늘한 눈으로 응시했다.
“…대체 황녀까지 불러다 놓고 무슨 작태를 꾸미는 거지? 지금 황성 안이 조그마한 의심도 피해야 하는 상황인지 몰라서 이러는 겐가!”
이 방엔 황후조차도 함부로 들어올 수 없었다. 맹약자가 아닌 누구에게도 예외를 만들어 준 적이 없었다.
그 예외를 황자는 스스로 만들어냈다.
“이, 이 무도한 것들! 이젠 인사도 안 하겠다는 건가?!”
냉랭한 다섯 쌍의 시선과 그 뒤에 선 거대한 수호령 넷의 시선까지 더해지자, 자꾸 움츠러드는 어깨를 가까스로 펴며 황자가 외쳤다.
그는 황족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지고한 존재. 맹약자 따위에게 움츠릴 수는 없었다.
“이게 누구야, 황자 전하 아니십니까?”
애버딘 공작이 화사하게 웃으며 황자에게 다가갔다. 인사를 하라니까 한다는 듯이.
하지만 눈빛만큼은 칼 같아서 황자는 잠시 몸이 굳었다.
그렇지 않아도 황녀를 감시하고 있던 중에 그녀가 원탁의 방으로 갔다는 소식을 듣고 뭔가 불길한 예감에 여기까지 쫓아오기는 했으나, 애버딘 공작의 적의 어린 시선을 받자 가면무도회에서 제가 하려고 했던 일이 생각났다. 그러자 갑자기 굉장히 쫄리는 기분이 들었다.
‘근데 뭐! 어차피 성공도 못 했고! 오히려 피해자는 나라고!’
하지만 그는 특유의 낙천성(?)으로 금방 극복했다.
“대체 황녀를 불러다가 뭘 하고 있었지?!”
저년이 쓸데없는 소리를 잔뜩 늘어놓은 것은 아니겠지?!
황자는 황녀를 향해 눈을 부라리며 눈빛으로 경고를 보냈다.
“-원탁의 방에 대한 불문율 정도는 들어보셨을 텐데요.”
콘스탄틴이 스윽 일어나 황자를 바라보았다.
“하! 맹약자 외엔 출입이 불가하다는 것 말인가?! 저 계집애도 들어가 있는데 내가 안 될 것은 무언가!”
자신은 사령의 대여자니, 차라리 자격은 제게 더 있다고 황자는 생각했다.
“어이, 크레이머. 황자 전하께 너무 그러지 않아도 괜찮아.”
애버딘 공작이 얄궂은 말투로 콘스탄틴을 말렸다.
“그렇지 않아도 황자 전하를 모시러 갈 예정이었거든요.”
“…나를? 왜지?”
수상하다고 원탁의 방을 찾아온 것이 본인이면서, 막상 부르려고 했다는 말을 들으니 그건 또 그것대로 불안한 기분이 들어 황자가 물었다.
“황제께서 승하하셨다는 말을 들은 참인데, 사실인가요?”
“…사실이다. 망할 시종장 놈이…….”
“황자 전하께서 유일한 목격자라고 하시니, 정황을 듣지 않을 수가 없어서 말입니다.”
“네놈들이 정황을 듣든, 듣지 않든 무슨 상관이지?! 감히 스스로 조사관이라도 되겠다는 건가? 황족을 상대로? 맹약자 네놈들은 아무튼 오만하기가-”
“어허, 어허, 왜 이리 흥분하고 그러십니까. 조사관이라뇨.”
“그게 그 말이 아니면 뭐지?!”
“황제 시해의 진범을 알아낼 방법이 있으니까 그렇지요.”
“……뭐라?”
황자의 동공이 살짝 흔들리는 것을 보며 애버딘 공작이 더욱 더 화사하게 웃었다.
“정말입니다? 황후 폐하를 비롯해 모든 황족이 모인 곳에서 증명하도록 하지요.”
루카스가 내부 인원들에게 양팔을 벌려 펼치며 연극조로 덧붙였다.
“그러니, 자리를 옮기실까요?”
“…….”
* * *
황좌가 있는 홀.
그 황좌에 황제의 대리격인 황후가 앉아 좌중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안색은 위엄 있는 표정이라기보다 감당하지 못할 자리에 앉은 듯, 곧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
“…….”
오히려 아래에서 그녀를 올려다보는 네 명의 공작의 기세가 그녀를 짓누르고 있었다.
다만, 황후가 앉아 있는 자리를 열망에 찬 눈빛으로 올려다보고 있는 한 명이 있었으니, 그는 바로 황자였다.
곧 그의 것이 될 그 자리, 그가 마땅히 가져야 할 보좌.
이 네 명은 그가 마땅히 앉아야 할 저 자리에 앉는 데에 가장 방해가 되는 것들이었다.
힘이 있다면 당장에라도 없애버리고 싶을 정도로 말이다.
공작들을 바라보는 황자의 눈에 새삼 경멸과 증오가 진하게 번들거렸다.
“앞서 말했듯, 황제 폐하의 시해범이 정확히 누구인지, 어떤 식으로 폐하께서 돌아가셨는지 알아낼 방법이 있습니다.”
그런 황자의 증오는 전혀 개의치 않는 표정으로 애버딘 공작이 비시시 웃으며 설명했다.
“그, 그게 정말인가?”
황후가 흔들리는 눈으로 물었다.
“예. 황후 폐하. 당연히 진상을 알고 싶으시겠지요?”
“…….”
황후는 머뭇거리다가 입을 다물었다.
“알고 싶지 않으십니까? 황제 폐하가 불의한 방법으로 승하하셨는데요?”
“……아, 아니네. 그저 놀라워서.”
“예. 그럼 동의하시는 것으로 알고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
황후는 슬며시 자신의 두 손을 꽉 잡았다.
“그 전에 우선 먼저 축하드릴 일이 있습니다.”
“……?”
황제 시해에 대해 말하다가 갑자기 축하라니?
갑작스러운 분위기 전환에 어리둥절할 때쯤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드디어 제국에 다시 안정이 찾아오겠군요. 맥페이든 제국의 한 제국민으로서, 또한 국경을 지키는 맹약자로서, 모두 기뻐할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애버딘 공작은 유려하게 몸을 틀더니 황녀를 향해 공손하게 말했다.
“계승에 성공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위대한 수호가 고귀한 피를 따라 영원하기를.”
애버딘 공작의 선창에 4대 공작 전체가 가슴에 주먹을 대고 황녀를 향해 무릎을 굽히며 예를 표했다.
“축하드립니다. 위대한 수호가 고귀한 피를 따라 영원하기를.”
그 극명한 충성의 예에 황후와 황자가 충격 받은 표정을 지었다. 심지어 황녀조차 놀란 표정이었다.
“…이, 이 무슨-!”
황자가 외쳤다.
“자네들은 눈이 삐었나! 황자는 이쪽이라고!”
분해서 황자가 고함을 치든 말든, 공작들은 충분한 예를 다 취하고 나서야 다시 일어섰다.
“반역- 반역이야! 너희들은 지금! 여봐라! 게 누구 없느냐!”
기사를 불렀으나 그들이 나타날 짧은 시간조차 못 참고 직접 찾으러 나가려던 황자의 앞에 스르륵, 한 형체가 나타났다.
모레프였다.
“이, 무슨! 크레이머 공작! 당장 이걸 치우지 못해?!”
“자중하시지요. 반역이 아니라 황실이 정한 규례를 따르는 것뿐이니.”
“규례?! 계집 따위에게 고개를 숙이는 게 지금 황실 규례라고?!”
“성별은 상관없습니다. 황녀 전하께 자격이 충분하다는 것을 말씀드리는 것뿐.”
“저 계집에게 무슨 자격이 있다는 거지!?”
“아켈리온이 황녀 전하를 선택했습니다. 그 외의 조건이 필요할까요?”
“……!”
황자의 눈이 경악을 그리다 못해 정지했다.
“마, 말도 안 돼…….”
그의 세계가 그의 눈 안에서 산산이 부서져 나가는 것이 들여다보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애버딘 공작은 다음 장으로 넘어갔다.
“황녀 전하께서 새 시대를 여시기 전, 이젠 선황이 되신 황제 폐하의 사인에 일말의 억울함이 없도록 처리하는 게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깨끗한 치세를 위해서 말입니다.”
황자에 대한 분노가 강해질수록 애버딘 공작은 더욱더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연극의 등장인물이라도 된 것처럼 능청스럽게 행동했다.
그 사실을 아는 나머지 공작들은 그 간극을 보며 몰래 소름 끼쳐 하고 있었지만, 굳이 분위기를 흐리지는 않았다.
되레 조용히 침묵을 보탬으로써 애버딘 공작에게 힘을 실어 주었다.
“사실, 그날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내는 것은 간단합니다.”
애버딘 공작은 곱게 휘어진 눈으로 황녀를 보았다.
“…간단하다고?”
“예.”
“어찌 간단하다는 겐가.”
“그저 명하시면, 되니까요.”
“그저… 명하라고?”
여전히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황녀가 되물었다.
“듣기로 황자 전하께서 그 자리에 계셨다고 하던데요.”
“그런데?”
“황자께 요청하세요.”
“…….”
황녀가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게 가능했다면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다.
“이제 황녀 전하께서는 아켈리온의 주권을 가지고 계십니다.”
아직 정식 계승식을 거치지는 않았으나, 이미 아켈리온의 기운이 황녀에게 스며든 것으로 보아 그러한 것으로 보였다.
“그리고…….”
애버딘 공작은 좌중의 당혹스러움을 약간 음미하듯 잠시 침묵했다가 극적으로 첨언했다.
“황자 전하께는 사령이 있지 않습니까.”
“아…!”
“불러다 물어보시면 됩니다.”
아무리 황자에게 대여된 사령이라고 할지라도 본 계약자는 맹약자.
맹약자의 물음에 사령은 당연히 솔직하게 대답할 수밖에 없다.
당연한 이치에 황족들이 입을 떡 벌렸다.
“…무슨 헛소리야! 감히 지금 황족을 심문이라도 하겠다는 건가!”
황자가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매디얼이 황자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같은 황족으로서 이런 모욕적인 상황을 허락해서는 안 된다! 이건 황실의 위신이 달린 문제야!”
황제 시해범을 가리는 상황에서 왜 황실의 위신을 운운하는지는 모르겠지만 황자는 절대 안 된다며 계속해서 외쳤다.
“디오스.”
그러나 황녀의 입이 열렸다.
“매디어얼!”
황자는 저주라도 퍼부을 것 같은 목소리로 황녀의 이름을 불렀다.
“네 본 맹약자의 부름을 듣고 나타나라.”
황가의 수호령인 아켈리온의 사령 중 하나인 디오스가 형태를 이루며 나타나기 시작하자, 황자는 되레 다급하게 명령했다.
“디오스! 죽여!”
무려, 황녀를 공격하라고 명령한 것이다.
그 명령에 디오스가 몸을 띄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