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9화. 새로운 계승자
“…….”
황녀는 그 뒷모습을 보며 침음을 삼켰으나, 그녀가 사람을 바꿀 수는 없었다.
할 일은 산적해 있었고, 현 상황에서는 슬픔에 잠길 틈도 없었다.
“…오늘 일어난 일이 황성을 넘어간 것이 들려오면 황제를 제대로 보필하지 못한 너희들을 모조리 참형하겠다.”
황제가 승하했다는 소식이 지금 상황으로선 밖으로 나가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황녀는 판단했다.
계승자가 없는 상태에서 황제의 서거 소식이 밖으로 알려졌다가는 엄청난 불안감이 제국 전체에 조성될 수도 있었다.
그러다 보면 외세의 침략이라든지, 민란 등의 불미스러운 일이 벌어질 수도 있는 것이다.
“……예!”
시종들이 떨며 대답했다.
“황후 폐하께서 깨어나셨다고 합니다.”
“그래? 황후궁으로 가자.”
황제궁의 시종들에게 신신당부하고, 몇몇 허가된 자들 외에는 출입을 금하도록 처리했다.
그리고 외부에는 황제의 암살 시도가 있었는데 불발되었고, 이후 황제궁의 경비가 배로 삼엄해졌다는 핑계를 대도록 했다. 갑작스러운 폐쇄 명령에 괜한 소문을 조장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조치였다.
이런저런 급한 조치를 취하고 나서야 황녀는 황후궁으로 이동했다.
“당장 그 시종장의 가문을 몽땅 잡아들여라!”
“예?”
황후는 황녀를 보자마자 다짜고짜 외쳤다.
듣자 하니 황녀가 황제궁에서 이것저것 조치를 취하는 동안 황자가 다녀갔다고 했다.
황자가 무슨 말을 어찌 한 것인지 무작정 외치는 주장이 나름 단호했다.
“분명 꿍꿍이가 있을 것이다. 당장 잡아들여서 내막을 캐 보아야 하지 않겠니? 그래야 폐하께서도 억울하지 않으시지…….”
황후는 새삼 황제의 죽음이 실감 나는지, 잠시 울먹였다.
“아직 결론도 안 났는데, 절차도 없이 그렇게 할 수는 없습니다. 대를 이어 헌신한 가문이에요.”
“하지만 시종장이 그랬다지 않니.”
“시종장이 폐하를 시해할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그는 충성스러운 자였어요, 어마마마도 아시지 않습니까?”
아직 충격이 큰 것처럼 보여서 황녀도 큰 소리를 내고 싶지는 않았으나, 자꾸만 답답한 소리를 하는 황후의 말에 저도 모르게 언성을 높이고 말았다.
“하지만… 황자가…….”
“어마마마께선 어머니이기도 하지만 이 제국의 황후 폐하이십니다. 수많은 제국민의 목숨이 황실의 어깨 위에 달렸습니다. 이렇게 사사롭게 판단을 하시면 안 되는 것, 아시지 않습니까.”
헤베타라는 제도 때문에 한미한 가문에서 황후를 들인 부작용은 이런 식으로 나타나고는 했다.
황후는 살벌한 중앙 정치를 경험하며 자라난 사람이 아니다. 그래서 이런 위기 상황이 오면 결단을 잘 내리지 못하고 심약한 모습을 보여주곤 했다.
여태까지는 그래도 상관이 없었다. 황후 외에 황비나 첩이 있는 것도 아니고, 황태자를 황태자가 되게 하는 것 또한 정치 알력이나 권력 싸움의 결과가 아니었으니까.
그저 계승의 증거만 있다면 그것으로 모든 조건을 다 채울 수 있으니, 치열해질 필요도, 관계나 상황 속에서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릴 필요도 없었던 것이다.
물론 황자야 미래의 황제가 되어야 하니 상당한 교육을 받아야 하고, 황태자가 된 이후부터는 제왕학을 비롯하여 정치, 경제 등의 분야에서 심도 깊은 영역을 소화해내어야 하지만, 황후는 그렇지 않았다.
황가에 들어와 새로 배워야 하는 황실 내정이나 예법, 의전 등 역시도 적은 양은 아니라 수년을 애써 습득하며 황족의 위엄을 나타내려 애써야 하긴 하지만, 그게 성향 자체를 바꾸진 못했다.
지방 소귀족으로 살다가 어느 날 헤베타가 된 소극적인 소녀에서 크게 성장하지 못한 것이다.
게다가 현 황후는 타고난 성향 자체가 심약한 편이라 이런 상황을 유독 더 힘겨워했다.
“설마 황자가 제 아버지를… 그랬을 리는 없지 않니.”
그러다 보니 황후는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황후의 얼굴과 말하는 내용이 별로 일치하지는 않았으나, 그래도 그녀는 필사적으로 부정했다.
사실 본인도 이 정황이 너무 뻔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저 외면하고 싶은 것뿐.
남편이 죽은 것도 괴로운 상황인데, 그 남편을 제 아들이 죽였다고 믿고 싶은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오라버니는 지금 장례식보다 즉위식에 더 관심이 많습니다. 그래도… 아니라고 생각하십니까?”
“…….”
“심지어 지금 오라버니는 생물학적으로도 계승이 불가능한 상태입니다. 의원의 진단을 들으셨지 않습니까?”
마찬가지 이유로 황후는 제 아들이 고자라는 것도 인정하고 싶지 않아 했다. 인성 면이나 능력 면이나 생물학적인 면에서 모두 함양 미달을 가리키고 있지만, 언제나 황후는 그 사실을 외면해 왔다.
고집스럽게 다물린 황후의 입을 보며, 황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바마마…. 어찌하면 좋을까요…….’
매디얼 황녀는 더 첨언하지 않고 일어났다.
‘결국 그 방법뿐인가…….’
황녀는 황녀궁으로 돌아가 서신을 썼다.
곧 서신을 든 전령이 황성을 벗어났다.
* * *
회동을 끝내고 황도로 돌아온 크레이머 부부에게 놀라운 소식이 들려왔다.
“…뭐? 황제 암살 미수?”
“시종장이요?”
어이없는 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시종장이 무슨 영화를 보겠다고 황제를 시해한단 말인가.
“뭔가 이상한데요.”
“이미 돌아가셨다는 소문도 있더군요.”
“…네?”
“황성에 무슨 일이 있긴 했던 것 같습니다.”
“…알아봐야 할까요?”
“보나 마나 황자와 관련된 일일 것 같기는 한데…… 그래서 더 수상하군요.”
“아무래도 황녀 전하께서는 본인의 회임 사실을 아직 모르시고 있는 게 아닐까요?”
“그렇지 않았다면, 벌써 황자와 입장이 바뀌었을 테니?”
“네.”
애버딘 공작의 말을 듣기는 했으나 이는 애버딘 공작이 스스로 눈치를 챈 것이지 황녀로부터 들은 것은 아니었다.
황녀가 스스로의 기운을 알아채는 능력이 있지 않는 이상에야, 어쩌면 아직 모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사실 이렇게 조용한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실상 황실 전체가 조용하지는 않지만, 황녀 쪽의 반응이 조용했다.)
“알현 요청을 드리는 게 좋을까요?”
이젠 황성에 가는 게 그렇게 위험하게만은 느껴지지 않았다.
여차하면 내뺄 능력이 있어서 그런 것 같았다.
“주인님.”
그런데 그때, 로이터 집사장이 찾아왔다.
“무슨 일이지?”
“황실에서 서신이 왔습니다.”
콘스탄틴은 한쪽 눈썹을 씰룩하고는 은쟁반 위의 봉투를 집어 들었다.
“…황녀로군요.”
“황녀 전하요?”
“근데 제 앞으로 왔습니다.”
황녀가 사이나가 아니라 콘스탄틴에게 서신을 보냈다면, 아마 공적인 일일 가능성이 컸다.
사이나는 얼른 읽어보라는 표정으로 그를 재촉했다.
그가 레터 나이프로 봉투를 개봉하고는 이내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마침, 잘되었습니다. 개인적인 알현을 요청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네?”
“때마침 황녀 전하께서 4대 공작의 입성을 요구하셨습니다. 계승과 관련하여 맹약자들과 긴히 의견을 나눌 것이 있다고 하십니다.”
“아, 회임 사실을 아신 걸까요?”
“그건 들어가 봐야 알 것 같습니다. 황제 폐하와 관련한 문제 때문에 그런 것일 수도 있으니.”
사이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공식적인 명분도, 진짜 황태자가 되실 분도 있으니, 해결이 용이할 것 같습니다.”
콘스탄틴은 씨익 웃었다.
“이참에 단번에 뿌리까지 뽑도록 하지요.”
황자 문제는 지지부진 끌어왔다.
황족이라는 신분과 유일한 계승자 후보라는 명분이 아주 큰 방패라서 손을 댈 수가 없었는데, 그 방패를 이제야 뚫어낼 방도가 생긴 것이다.
“게다가, 황녀의 호위 때문에라도 어차피 만남이 필요했었는데 겸사겸사 잘되었군요.”
“아, 돌아가며 번을 선다고 하셨죠.”
맹약자의 회동에서 그들은 돌아가며 황녀궁의 번을 설 필요성에 대하여 합의했다.
드디어 등장한 귀한 계승자가 완전히 계승에 성공할 때까지 신변을 지킬 필요가 있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자신이 황태자가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발광을 할 황자의 모습이 그려지기도 해서, 맹약자 다섯은 만장일치로 합의를 보았다.
물론 사이나는 번을 서는 것에서 제외였지만.
* * *
다음 날, 4대 공작이 황성에 입성했다.
사이나는 아직 공식적인 맹약자가 아니라서 함께 갈 수 없었다.
황성에는 맹약자만이 들어갈 수 있는 방이 있었는데 그 원탁의 방에 황녀를 초대했다.
그리고 그들은 황제 폐하가 이미 승하하셨다는 기함할 소식을 알게 되었다.
“하아….”
“어찌 이런 일이.”
정황을 들어보니 역시 소문은 거짓이었던 것이다.
30년을 한결같이 곁에서 황제를 보필했던 시종장이 시해범이라니.
계기도 목적도 불명확하다. 말이 되지 않았다.
“그래도 이 사실을 막은 것은 잘하신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지금 상당히 혼란한 상태였을 것입니다.”
“저도 그리 생각됩니다, 전하.”
“하지만 이젠 공표해도 될 것 같습니다.”
잘했다고 해놓고 바로 말을 바꾸는 공작들의 발언에 황녀는 어리둥절했다.
“어째서, 입니까?”
“계승자가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정말입니까?”
황녀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결국, 그 헤베타가? 아니, 헤베타는 이미…….”
대체 누구를 말하는 것인지 전혀 감이 오질 않아서 황녀가 허둥지둥했다.
“전하 본인이십니다.”
“다른 여자 중 누가…, …예? 저요?”
“예.”
“무슨……, 아…!”
황녀가 갑자기 자신의 배에 손을 올렸다.
“맞습니다. 회임하신 듯 보이는군요.”
“…저, 정말입니까?”
로즈데일 공작과 프랜시스 공작이 묵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애버딘 공작이 그렇게 말을 하기는 했으나 사실 어제까지도 긴가민가했던 것이 조금은 있었는데, 막상 황녀를 만나보니 그런 감상이 쏙 들어갔다.
맹약자라면 누구라도 저 기운을 느끼지 않을 수 없으리라.
그만큼 강렬했다.
“아켈리온의 기운이 느껴집니다. 선택을, 받으셨군요.”
“아…….”
황녀의 표정은 꽤나 복잡해 보였다.
감격 같기도 회한 같기도 결의 같기도 한, 복잡다단한 결이 느껴지는 표정이었다.
“그러니, 이제 황녀 전하께서 황태자의 위에 올라 주셔야겠습니다.”
묵직하게 선언처럼 내려앉은 말에, 황녀의 입이 다물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