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8화. 황제의 승하
“예. 아무래도 황자가 없어도 될 거 같던데요? 황녀 전하가 계승하신 것 같아요. 기운이 느껴졌어요.”
“화, 황녀 전하께서 말이야?”
프랜시스 공작과 로즈데일 공작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아니, 어찌 이런 일이….”
“확실한 건가? 황녀 전하께서 정말로?”
그간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는 상황이다 보니 믿기가 어려워 다들 되묻느라 정신없었다.
‘…성공했구나!’
반면 사이나는 반색했다. 기다리던 소식에 기쁨을 금치 못했다.
“충분히 가능한 일이에요.”
이제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밝혀도 될 것 같아 사이나가 입을 열었다.
“2대 황제도 여황이었는걸요.”
“…뭐라고? 아이드라 황제 말인가?”
“네.”
그녀는 전에 황녀에게 했던 설명을 필요한 부분만 요약하여 다시 공작들에게 설명했다.
“허…. 그럴 수가…….”
“헤베타라는 제도가 오히려 황족의 피를 흐리고 수호의 힘을 약화시키고 있습니다.”
사이나는 헤베타 제도가 생겨난 시기와 여황이 사라진 시기의 관련성에 대해 다시 이야기했다.
그리고 헤베타 제도가 사라져야 하는 이유를 더 추가해 설명했다.
“확실히 이 시기 이후에 제국의 수호의 힘이 더 약해졌어요. 외부 침입의 횟수도 더 잦아졌고, 마수 범람의 양도 더 많아졌죠. 이는 실제 수치상으로 찾아보실 수 있는 증거입니다.”
사이나에겐 갖가지 사료에서 찾아내어 비교, 정리한 자료가 있었다. 그 수치들을 대략적으로 생각나는 것이나마 말했다.
이 자료는 황녀도 듣지 못한 것이다. 자료를 만든 것이 그 이후였기 때문이다.
황녀와의 만남 후에 혹시나 하고 여러 사료를 뒤져보았는데 이런 결과를 발견해서 사이나 스스로도 꽤 놀랐다.
“4대 공작가에서 흘린 피가 그 제도 이후 배로 늘어났다는 뜻도 되겠군.”
콘스탄틴이 사이나의 설명을 듣고는 감상처럼 덧붙였다. 내용이야 매우 시니컬했지만 말이다.
“허-!”
“그러네?”
다른 공작들도 갑자기 매우 표정이 안 좋아졌다.
지금 자신들이 하는 이 고생이, 실은 황가가 얹어준 것이었다고?
맹약자가 된 운명으로 이 모든 고생을 감수해야만 한다고 생각하며 꾸역꾸역 살아왔는데, 실은 반 정도는 덜 힘들 수도 있었다는 뜻이 아닌가!
반만 덜어도! 그들은 일상을 되찾을 수 있었다.
토벌과 토벌과 토벌을 하는 삶이 아니라, 토벌도 하고 이따금은 황도에도 갈 수 있고, 가끔은 쉬러 휴양도 갈 수 있었다는 것 아닌가!
황가의 혈통에 흐르는 수호의 힘에 기대어 살아가는 것이 맞으니 감안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억울한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특히 상대적으로 더 오랫동안(나이가 많으므로) 고생한 로즈데일 공작과 프랜시스 공작이 유독 더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모든 공작이 황도의 화려한 삶을 싫어하는 것은 아니었기(시간이 없어서 못 한 것뿐) 때문이다.
“하! 황자가 한 명뿐이라 여태 참고, 두고 본 것들이 얼마나 많았나!”
“그게 죄다 쓸데없는 짓이었다는 거잖아?!”
황가만 유독 계승자를 뽑는 방식이 난해하다 했더니, 이런 비밀이 있었을 줄이야.
“심지어 제 여동생을 건드리려고까지 했죠. 제국을 위해 매순간 피 흘리는 공작가의 딸을 말입니다.”
루카스가 음산하게 덧붙였다.
“이 행태를 참고 지나가실 겁니까? 황족이라는 이유만으로? 이번엔 제 여동생이었지만, 다음번엔 로즈데일의 딸이, 될 수도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허튼소리!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되지!”
로즈데일 공작뿐 아니라 마찬가지로 딸이 있는 프랜시스 공작이 함께 분개했다.
“내 가족이야 당연히 소중하지만, 제국의 안녕이 걸린 문제이다 보니 사실 고민이 많았네. 하지만 이젠 황자의 그 모자란 꼴을 안 봐도 된다는 것 아닌가?”
“그런 것 같군! 당장 황녀 전하께 인증을 요구한 뒤, 계승자 검증식을 끝내고 황태자로 올리도록 하세나.”
회동은 성공적으로 끝났다.
새 시대의 바람이 불고 있었다.
* * *
그사이 황성에서도 큰일이 벌어졌다.
“…폐하께서?!”
갑작스러운 소식에 황후의 안색이 창백해지더니, 이내 쓰러지고 말았다.
“황후 폐하!”
“의원을 불러라!”
황제가 승하했다.
황제의 환후가 좋지는 않았으나 당장 이리 갑자기 죽을 정도는 아니었다.
당연하다고 해야 하나. 인위적인 손길이 닿았다는 것이 밝혀졌다.
“저 무엄한 놈이 감히 아바마마를 시해했다!”
범인은 황제의 시종장이라고 했다.
베개로 황제의 얼굴을 눌러 질식사시키려던 것을 때마침 문안을 드리러 갔던 황자가 발견했다고 한다.
황자는 즉시 시종장을 떼어내 즉결 처형했으나 너무 늦게 발견했는지 황제는 이미 숨이 끊어진 상태였다고 했다.
“말도 안 됩니다! 시종장은 황제 폐하를 곁에서 30년 넘게 모신 사람이에요! 그가 폐하를 왜 시해하겠습니까!”
황후가 쓰러지는 바람에 대신 상황을 파악하러 황제궁을 방문한 황녀가 황자의 말을 듣고 반박했다. 정황상 말이 되질 않았다.
“그럼 넌 내가 거짓말을 한다는 거냐?!”
황자는 되레 고함을 쳤다.
“시종장을 왜 죽이셨습니까? 그가 범인이라면 감옥에 가두고 배후가 있는지 캤어야 했던 거 아닙니까?”
“…그건, 위급하니까 그랬지! 그자를 놔뒀다가 또 뭔 짓을 할까 봐!”
“무기라고는 베개 하나 든 상태에서 말입니까?”
“시끄러워! 지금 그게 중요하냐! 부황이 돌아가셨는데!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따박따박 따지기나 하다니! 네가 정말 황녀냐!”
황녀는 가라앉은 눈으로 황자를 보며 물었다.
“하…. 정말 시종장이 한 게 맞긴 합니까?”
황자는 그간 황제를 문안한 적이 거의 없었다.
그런데 하필, 어쩌다 한 번 문안을 온 날 시종장이 황제를 시해하려던 것을 목격했다고?
“뭐, 뭐? 그럼 내가 거짓말을 한다는 거냐?! 아니면 엉! 내가 그러기라도 했다는 뜻이냐!?”
황자는 위협적으로 황녀에게 다가갔다.
“엉? 말해봐! 이 오라비가 관대하게 대해주니까, 할 말 못 할 말도 못 가리지?”
멱살이라도 잡을 듯 뻗어온 손이 떡하니 잡혔다.
“뭐야! 이거 안 놔?!”
황녀의 호위, 헤비아탄 부단장이었다.
“감히 어디다 손을 올려!”
“제 임무는 황녀 전하를 보호하는 것입니다.”
“이 새끼가…. 상전도 몰라보고……!”
황자의 자유로운 다른 손이 헤비아탄에게 향했다. 짝, 소리와 함께 샤피로의 고개가 돌아갔으나 그의 표정은 변화가 없었다.
황녀를 향한 손은 막았지만, 제게로 향한 손까지는 막지 않았다. 그 한 대로 황족을 붙잡은 제 불충을 가감하고는, 황자를 놓고 뒤로 물러섰다.
“하, 개나 소나 이 몸 알기를 우습게 아는구나. 내가 황제가 되는 즉시 넌 변방으로 보내주마.”
“…황제라니요.”
“폐하가 돌아가셨으니 내가 즉위를 해야지. 지엄한 자리를 오래 비워 둬서야 되겠느냐. 제국에도 좋지 않은 일이다.”
아비가 죽었는데 황자는 장례보다 즉위에 더 관심이 많았다.
부황이 돌아가셨는데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는다며 했던 질책은 황녀에게만 해당되는 것인가 보다.
황녀는 차게 가라앉은 눈으로 제 오라비라는 자를 보았다.
“오라버니께선 계승을 증명 못 하셨습니다.”
“그렇다 해도 별수 있던가? 그럼 누가 그 자릴 물려받지?”
“…….”
“설마 여자인 네가 그런 불손한 헛꿈을 꿀 리는 없고.”
황자는 코웃음을 치며 몸을 돌렸다.
제가 말하고서도 말도 안 된다는 투였다.
‘진작, 이렇게 했어야 했어. 이제야 나라가 제자리를 찾아가는군.’
황자는 20대 초반에 한 남부 왕국에서 1년간 유학차(유람에 더 가까웠지만) 머무른 적이 있었다.
그쪽 왕실의 극진한 대접을 받으며 머무르는 동안 길리언은 여러 가지로 놀란 점이 상당히 많았다.
그것은 제국인 맥페이든보다 그 작은 나라가 왕권이 더 절대적이라는 점이었다.
그 나라의 신하들이나 백성들은 왕을 거의 신처럼 여기며 모셨다. 황제보다 일개 왕이 더 떵떵거리며 살다니!
게다가 철저한 장자 우선 계승 방식도 그렇고, 처첩제도도 매우 마음에 들었다.
왕비 외에 측비만 여섯, 후궁은 셀 수도 없이 많았다.
왕이라면 응당 그래야 하는 것이 아닌가!
세상에 미녀가 얼마나 많은데! 자신은 왕도 아니고 황제가 되어도 황후 한 명밖에 두지 못하니, 얼마나 불공평하냔 말이지!
황자 길리언이 맥페이든의 계승방식에 불만을 갖게 된 것은 그때부터였다.
아이러니한 것은 그 왕국이 안일한 왕정 정치로 인해 완전히 부패했고, 지방 영주들의 지나친 착취로 인해 봉기한 민란에 의해 흔들리다가 결국 외세의 침략을 버티지 못하고 망해버렸음에도, 황자의 머릿속엔 가장 이상적인 국가 형태로 자리 잡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는 보고 싶은 것만 보는 아주 편리한 머리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네 혼처는 좋은 곳으로 내가 알아봐 주마. 그간 입 다물고 국장이나 준비해. 국장 끝나면 바로 즉위식이 이어지도록 함께 준비하고.”
여자라서 안 된다고 해놓고 할 일은 또 다 시켰다.
황녀로 태어났으면 제 오라비의 편의를 위해 애쓰는 것쯤이야 당연하지. 일을 적당히 잘하기도 하고.
‘물론 막상 내가 하면 더 잘하겠지만, 자잘한 업무보다 더 중한 일이 많으니까, 별수 없지.’
그간 황녀 덕분에 꽤 편했는데 시집을 보내버리면 업무적으로는 또 좀 불편할 것 같기도 했다.
‘그냥 제국 내 적당한 놈이랑 묶어놓고 업무나 보게 할까?’
황자는 고민했다.
생각해 보니 제 몸을 정상으로 되돌리려면 과로를 해서는 안 될 것 같기도 했다.
제국 내 존재하는 모든 의사와 치료사를 불러 어떻게든 죽은 그것(?)을 살려내고, 계승에 다시 힘써야 한다.
사실 그게 더 중요한 일이 아닌가?
그러면 자질구레한 업무에 신경 쓸 시간이 없기는 했다.
‘좀 비교를 해봐야겠군. 외국으로 보내버릴지, 만만한 놈이랑 묶어 결혼을 시킬지…….’
아직도 현실 파악과 자각이 덜 된 황자는 제 좋을 방향으로 열심히 미래를 꾸리며 자리를 떠나갔다.
그 뒷모습에 아비의 죽음이 끼친 슬픔이나 애도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