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7화. 맹약자들의 회동
-다른 곳이야.
욜리의 속삭임이 들렸다.
‘다른 곳?’
-4대 공작령도 황령도 아닌 그 외의 곳.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지하 공간 중간에 게이트가 생성되었다. 평소와 달리 4개의 문틀의 중앙점이 교차되는 지점이었다.
콘스탄틴은 안심하고 따라오라는 듯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천천히 뻗은 그녀의 손을 잡고 둘은 워프 게이트로 들어섰다.
새로운 곳에 도착한 사이나가 가장 먼저 인지한 것은 햇살과 숲의 내음이 뒤섞인 듯한 냄새였다.
“중립 지역입니다.”
“…중립?”
“더 정확하게 말하면 ‘잊혀진 땅’.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곳이기도 하지요.”
이곳을 발견한 것은 어쩌면 누군가의 우연이었을 것이다.
여러 개의 게이트를 동시에 열면 어떻게 될까. 그런 의문을 가지고 실험을 해본 자일 수도 있고, 그도 아니면 워프 게이트 생성 당시 원래 이렇게 설정이 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확실한 것은 이곳의 존재가 대대로 맹약의 계승자에게(특히 황가를 제외한 계승자에게) 전해진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 정보를 따라 4대 공작가는 황실의 눈을 피해 회의가 필요할 때 이곳을 이용하고는 했다.
같은 맹약자일지라도 황가는 황가.
황가의 신하 된 자들로서 국경을 지키는 4대 공작가와 이익이나 의견이 반하는 경우는 어느 때고 존재해왔다.
그렇다고 4대 공작가가 담합하여 황실을 척지거나, 반역을 저지르거나 하기 위함은 아니었다.
어쨌든 이 제국 전체를 지키는 수호의 힘은 황실의 혈통을 통해 전해지는바, 무작정 황가에 대적하는 것은 멍청하기 짝이 없는 짓이나 다름없었다.
맹약자들의 힘은 어디까지나 마수와 이민족으로부터 제국을 지키기 위한 수단이자 의무였으니 말이다.
“이 같은 상황을 위해 존재하는 곳이라고 보면 됩니다.”
가령, 황자를 폐해야 하는 그런 상황.
이런 내용을 의논하기 위함이면 황성의 지붕 아래보다는 당연히 다른 곳이 더 낫긴 하겠지.
“네. 무슨 뜻인지 알겠어요.”
사이나는 고개를 돌려가며 주변을 살폈다.
산 위에 지어진 신전인가? 지금은 폐허처럼 보이긴 했지만, 그래도 한때 상당히 웅장하고 아름다웠을 것 같은 흔적이 보이는 구조물이었다.
벽은 무너진 것 같으면서도 견고했고, 지붕은 적당히 하늘을 가리면서도 빛을 투과하여 내부로 들여보내고 있었다.
틈새를 비집고 들어온 빛살들이 내부의 분위기를 굉장히 몽환적으로 보이게 만들었다.
마치 시간이 멈춘 것 같은…….
“여어- 어서 오게나.”
그러나 사이나는 금세 몽롱함에서 깨어났다.
로즈데일 공작과 프랜시스 공작이 먼저 도착해 있었는지 콘스탄틴을 보고 반가워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수호의 주간 때 보고 처음이던가?”
“그런 듯하군요.”
인사가 끝나자 자연스럽게 시선이 사이나 쪽으로 넘어왔다.
“근데… 이쪽은…….”
“아니, 당신이로군!”
둘은 바로 기운을 느끼고 그 정체를 알아챘는지 활짝 웃으며 다가왔다.
“사이나 크레이머, 인사드립니다.”
그녀는 후드를 벗으며 깍듯하게 인사했다.
“기적의 맹약자가 여성이라니!”
“심지어 콘스탄틴, 자네의 부인이었어?!”
기적의 맹약자… 는 또 뭐람.
민망한 호칭을 얼른 머릿속에서 지우며 사이나는 설핏 웃었다.
“허어, 이런 일이!”
생각지도 못한 정체에 공작들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크레이머가만 너무 유리한 것 아닌가?”
“그래. 이건 정말 불공평한 일이야.”
그러더니 갑자기 투덜거렸다. 심기가 매우 불편해 보이는 표정을 지었다.
“…….”
사이나와 콘스탄틴은 잠시 서로 눈을 마주쳤다가 두 중년 공작을 보았다.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일까.
“한 가문에 두 맹약자라니…….”
프랜시스 공작이 이는 안 될 말이라는 듯 고개를 마구 저었다.
“크레이머 공작. 아무래도……,”
그러더니 로즈데일 공작이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우리 토벌 양을 좀 떼어가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나?”
“그래! 그렇고말고! 같은 양이면 크레이머가만 반절로 줄은 게 아닌가!”
프랜시스 공작이 마구 찬동했다.
“왜 내 부인은 맹약자가 아닌 거지?”
“내 부인 역시 말일세!”
알고 보니 유치한 투정이었다.
“토벌기에 와서 한 달만 일하고 가게.”
“…….”
“별로야? 그럼 3주!”
“…….”
“2주! 그래도 싫어? 그럼 일주일만이라도…….”
“…….”
“거, 젊은 사람이 너무하는군. 노인 공경도 모르나?”
로즈데일 공작이 투덜거렸다.
“노인이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젊고 정정하십니다.”
“노인 맞으니 와서 좀 일해.”
“거절합니다.”
“이런 매몰찬 인간을 보았나.”
로즈데일 공작은 타깃을 바꾸어 사이나를 보며 말했다.
“그럼 자네라도…….”
“…네?”
“전투법은 내가 친절하게 가르쳐 주겠네. 알고 보면 쉬워.”
“…….”
저, 전투요?
사이나는 머쓱한 기분에 삐끗하게 웃었다.
“하아, 이 사람의 수호령은 전투형이 아닙니다.”
콘스탄틴이 한숨을 쉬며 로즈데일 공작에게 말했다.
“…전투형이 아니야?”
“저희처럼 어릴 때부터 훈련을 받은 것도 아니고요. 당연히 마수는커녕 토끼 한 마리도 못 죽입니다.”
“…….”
“아직 신혼도 못 즐겼는데 절 홀아비로 만들고 싶으신 게 아니면 이쯤 하시죠.”
“…쳇.”
로즈데일 공작이 툴툴거리며 물러갔다.
그런데 그 옆에 있던 프랜시스 공작은 아직도 미련을 못 버렸는지 물었다.
“우리가 자네의 수호령을 좀 볼 수 있을까?”
“제… 수호령이요?”
사이나가 콘스탄틴을 보자 그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보란 듯이 모레프를 소환해서 등 뒤로 세웠다.
그러자 프랜시스 공작이 할콘을 소환해 제 등 뒤로 띄웠고, 로즈데일 공작 역시 카니스를 소환해 곁에 두었다.
그것을 보고 마지막으로 사이나가 욜리를 소환했다.
‘그러고 보니 다른 수호령에 비해 네 이름을 너무 위엄 없이 지었나 봐.’
카니스, 할콘, 칼리고 등에 비해 욜리는 너무 귀여운 이름이 아닌가.
-난 좋아. 네가 좋고 내가 좋으면 되었지 무슨 상관이 있겠어.
‘그렇다면 다행이고.’
욜리가 제 형상을 이루며 사이나의 곁에 섰다.
불꽃이 이글거리듯 펄럭이는 터럭이 은회색으로 일렁였다.
그 모습을 보고 프랜시스 공작이 입을 떡 벌렸다.
“거참, 전투형도 아니라면서 되게 용맹하게 생겼구먼 그래.”
로즈데일 공작이 욜리를 보고 한마디 했다.
듣기로 두 공작은 얼른 제 아들들이 크기만을 기다리는 중이라더니, 정말 어지간히 토벌이 하기 싫은 모양이었다.
그 모습이 어쩐지 귀엽고 웃겨서 사이나는 작게 웃고 말았다.
-이 새끼가!
갑자기 욜리가 버럭 소리를 지르며 몸을 날린 것은 그때.
-푸르륵!
뻑, 소리와 함께 뭔가 하얀 것이 휙 하니 날아가고 있었다.
“……에렌혼?”
-저 변태 같은 건 또 뭐야. 왜 널 핥으려는 건데?
자세히 보니 혀를 빼물고 날아가고 있었다. 혀를 내밀고 다가오다가 욜리에게 얻어맞은 모양이다.
“…….”
글쎄.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는걸?
사이나는 제가 변명을 하는 대신 뒤를 돌며 그 주인을 찾았다.
멀리서 애버딘 공작이 머쓱한 표정으로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만나기가 무섭게, 사과할 일이 생기는군요. 부인.”
“각하. 에렌혼의 혀를 좀 더 잘 간수할 필요가 있어 보이네요.”
“하하…. 그러게 말입니다.”
마지막 맹약자의 도착으로 회의를 시작할 시간이었다.
“…정말 전투형 아닌 거 맞나?”
“…….”
그 와중에 욜리의 폭력성(?)을 보고는 아직도 미련을 못 버린 로즈데일 공작이었다.
* * *
폐허 안이지만 기묘하게 훈훈한 곳.
거대한 원형의 석조 탁자와 그것을 뺑 둘러 열 개의 석재 의자가 있었다.
의자는 성한 형태를 이룬 것도 있고 아닌 것도 있어서, 적당히 앉을 만한 형태가 아직 남아 있는 것을 골라 다들 앉았다.
4대 공작 회의.
아니, 이제 5대 맹약자 회의라고 명명해야 더 맞을 회동이었다.
그 주축이 되는 주제는 당연히 ‘황자’.
새 맹약자를 욕보이려 했던 것도 모자라 애버딘 공작의 여동생까지 건들려 했다.
절대 그냥 넘어가서는 안 될 문제였다.
“아무리 그래도 유일한 황자인데…….”
로즈데일 공작이 말을 얼버무렸다.
“황자가 건들려고 했던 게 플로리아가 아니라 그쪽 따님이었다고 생각해 보시죠?”
이에 애버딘 공작이 비아냥거렸다.
“…….”
“하아, 그렇다 한들 대안이 없지 않은가. 이 제국은 어쩌란 말인가.”
프랜시스 공작이 손으로 제 이마를 짚었다.
수호의 힘이 제국을 보호하는 동안에도 4대 공작들은 평생을 국경 안정을 위해 싸운다.
그런데 그 힘이 사라지기라도 하면 얼마나…….
차마 상상도 하기 싫었다.
“황족이 맞긴 한 걸까요?”
제 턱을 긁으며 애버딘 공작은 뜬금없이 말했다.
황후의 정절을 의심하는 기함할 발언에 놀랐는데, 하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별다른 표정의 변화가 없어서 사이나는 또 한 번 놀랐다.
“제가 황자에게 환시를 걸었거든요? 근데 너무 잘 걸리더라고.”
애버딘 공작의 설명이 이어졌다.
콘스탄틴과 루카스는 가면무도회에서 발정이 나서 여기저기서 죄를 짓기 일보 직전의 새끼들을 모두 잡아들였다.
황자를 포함해 다 한방에 몰아넣었다.
그리고 환시를 걸었는데, 웬걸.
누구 못지않게 환시에 떡 걸려서는 아주 더러운 꼴을 보여주는 것에 기함했다.
처음엔 그저 그 방을 떠나지 못하게, 다들 다음 날까지 더럽게 엉켜 있으라고 건 환시였는데, 물론 황자에게는 복수심에서 비롯된 마음으로 건 것인데 왜 황자까지 걸린단 말인가.
“황족이면 안 걸리는데 말이죠.”
너무 이상해서 루카스는 시범 삼아(?) 황녀가 정신없을 때 그녀에게도 걸어보았으나, 그쪽엔 전혀 통하지 않았다.
그러니 더 이상한 것 아닌가.
아무리 봐도 뭔가 이상했다.
“아, 계승자라 안 걸린 건가?”
“뭐? 방금은 걸렸다며?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다들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이었다.
“아니요. 황자 말고 황녀 전하요.”
“…뭐?”
“황녀 전하께서는 안 걸렸다고요.”
“방금은 계승자라 안 걸렸다며?”
앞뒤 안 맞는 소리에 다들 어리둥절해져서는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