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6화. 악연의 끝
누군가 하고 돌아보자, 콘스탄틴이 열린 문가에 기대어 있었다. 그는 사이나와 눈이 마주치자 안쪽으로 걸음을 옮겨 들어왔다.
“왔어요?”
“마지막으로 가족을 만날 기회를 줬다고 하더군요.”
“-네?”
콘스탄틴은 약간 가라앉은 기색으로 다가와 그녀의 이마와 머리카락의 경계 위로 입술을 느릿하게 찍었다가 떼었다.
“발데즈가에서 잠시 입성했었습니다.”
…아니, 잠깐. 그럼 마지막으로 가족을 만난 자리에서 엘리자베스가 내 살인을 교사했다는 거야? 그리고 그 가족은 그걸 들어줬고?
‘…제정신인가?’
도무지 이해가 가질 않아서 사이나는 입을 벌렸다.
“……이겁니까?”
콘스탄틴이 화장대 위에 놓인 향유 병을 들고 쳐다보며 그녀에게 물었다.
“네? 아, 네. 희석도 안 된 독의 원액이 타진 상태인 것 같으니 조심하세요.”
어딘가 가라앉아 보이던 표정이 저것 때문이었나. 아무래도 보고를 받고 온 모양이다.
매우 서늘한 얼굴로 병을 바라보던 그는 마개를 들어 도로 병을 닫고는 제 품에 챙겼다.
“……그거 왜 가져가세요?”
“그럼 이 위험한 걸 그대가 가지고 있을 생각입니까?”
“그건 아닌데…….”
표정이 위험해 보여서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독살 의뢰자가 눈앞에 있다면 당장 저 향유를 목구멍에 들이부어 줄 것 같은 느낌이랄까.
화가 난다고 생각 없이 사고를 칠 사람은 아니지만, 잔걱정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런 그녀의 기색을 알아챘는지 콘스탄틴이 경직된 얼굴을 풀며 웃었다.
“걱정 말아요. 위험하니 내가 잘 처리하겠습니다.”
하긴, 잘못 놔뒀다가 누가 착각해서 쓰기라도 하면 큰일이긴 하지.
“하녀 역시 내가 처리하겠습니다.”
“……처리요?”
순간 단어가 이상해서 그녀는 되물었다.
“…심문을 한다는 뜻입니다. 혹시 이 향유 외에도 다른 지시를 받았는지도 모르는 일이니.”
“아, 그럴 수도 있겠군요.”
“그러니 그대는 쉬고 있어요. 피곤하면 먼저 자도 괜찮습니다.”
사이나는 알았다고 대답하려다가 문득 이상함을 느꼈다.
그가 칼리고의 부작용을 겪을 때처럼 서늘한 기운이 갑자기 훅 끼쳐 드는 느낌에 사이나는 반사적으로 콘스탄틴의 팔을 잡았다.
“…사야?”
팔의 온도를 손바닥으로 느꼈다가 앞가슴 쪽을 더듬어 목덜미까지 쓸어 올라갔다. 손길을 따라 근육이 움찔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사야, 왜….”
“아, 차갑진 않네요. 갑자기 서늘한 기분이 들어서 혹시 또 아픈데 숨기는 건가 하고…….”
그의 목덜미 온도를 확인하던 손을 콘스탄틴이 붙잡았다. 그리고는 손바닥에 입술을 묻었다.
“…콘, 스탄틴?”
나른하게 내려다보는 눈빛이 짙었다.
‘……갑자기?’
가끔 이렇게 알 수 없는 지점에서 저런 눈빛을 하고는 하는데, 사이나로서는 이해가 잘 안 됐다.
느릿하게 허리를 감아오는 손길과 지긋한 눈빛이 허락을 구하는 듯 집요했다.
어느새 허리는 밀착되었고 그의 고개가 내려오고 있었다.
-아, 이 새낀 또 예고도 없이……!
욜리가 단발성의 욕설을 내뱉고는 사라졌다. 그의 부재를 대신 메꾸기라도 할 듯이 콘스탄틴이 입 안을 점령해왔다.
“으, 응…….”
정신없이 그에게 떠밀려 어느새 무릎 뒤로 침대가 닿았다. 오금이 꺾이며 풀썩 쓰러진 그녀를 그가 가두고 한참이나 더 키스에 몰두했다.
“취소하지요.”
하아. 벅찬 숨결에 폐가 아릿해질 때쯤 그가 떨어져 나갔다.
“쉬되, 자지 말고 기다려요.”
부드럽게 귓가의 여린 살을 머금듯 속삭이고는, 몸을 일으켰다. 일어나는 도중에도 아쉬운 듯, 입술은 쪽쪽거리기에 여념이 없었다.
“최대한 금방 돌아올 테니.”
마음이 급한지 성큼성큼 사라지는 뒷모습을 보며, 사이나는 피식 웃고 말았다.
엘리자베스니 독살이니 하는 문제로 어지럽던 마음이 어느새 괜찮아졌다.
혼자가 아니라는 것이, 너무 선명하다.
사이나는 누워 길게 입가를 늘이며 눈을 감았다.
* * *
엘리자베스는 황성에서 퇴출되기 전, 약을 마셔야 했다.
영원히 후사를 볼 수 없으리라는 황가의 형벌을 이행하기 위한 약으로, 자궁을 강제로 굳히는 약이었다.
물론 엄청난 고통을 동반한다고 들었다.
‘아아아아아아아-아악!!’
고통에 몸부림치다가 혼절한 몸은 치료도 없이 성 밖으로 내쳐졌다.
아무런 문장이 없는 특수 마차가 그녀를 싣고 나왔다. 죄수를 가두어 이동하는 용도의 마차였다.
그리고 그 마차는 그대로 유배지로 향했다.
듣기로 유배지는 꽤나 멀고 험한 곳이었다. 마차로 이동하는 데에만 한 달이 넘게 걸리는 곳이라고 했다.
그 여정은 보나마나 고되기 짝이 없을 터.
자궁을 굳히는 약으로 인한 고통부터, 보잘것없는 식사나 간수의 대우로 인한 수치감과 모욕, 노예처럼 몸을 옥죄는 족쇄 등. 모든 것이 절대 만만치 않을 것이다.
그것도 모자라 권세가 여럿의 분노를 산 상태니, 유배지까지 무사히 도착이나 할는지도 장담할 수 없었다.
‘정말 끝이야.’
이젠 정말 끝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와의 악연이.
‘그러니, 완전히 잊어줄게.’
어쩌면 엘리자베스에게는 이게 가장 큰 벌일지도 모르겠다.
사람들의 관심으로 때론 살고, 때론 죽는 것처럼 굴던 그녀였으니 말이다.
황도에서 꾸준히 멀어지는 동안, 꾸준히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히게 될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누구도 그 존재를 입에 올리기는커녕 생각조차 안 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사라진 존재가 될 것이었다.
* * *
그리고 사라져야 할 또 한 사람.
사라지기는커녕 황도에 존재감이 가득했다.
사람들은 모였다 하면 황자의 이야기를 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고자래.”
“뭐?”
“황자 전하께서 고자가 되었다는군!”
“아니! 그러면 계승은 어찌 되는 것인가? 우리 제국의 미래는?!”
“미래는 무슨 미래야! 계승을 할 수 있었으면 진작 했겠지! 자네는 가면무도회 때 있었던 일을 듣고도 황자 전하께서 계승을 하길 바라나?!”
“하지만 다른 방도가 없지 않은가! 제국이 망하면 어째?”
“그런 황자가 황제가 되어도 망하는 것 똑같겠구먼 뭐! 남색이라니! 얼마나 막 살았으면 남색도 모자라 고자가 된단 말인가! 에잉!”
길리언 황자는 정말 고자가 되고 만 것일까?
가면무도회에서 깨어난 황자는 정신이 들자마자 하반신의 고통을 호소하며 의원을 불러오라고 난리 법석을 떨어댔다.
그리고 처음으로 들어간 황실 의원이 시체가 되어 나왔다.
중요한 부위가 터져서 더 이상 생산(?)이 불가능하다는 진단결과를 들은 황자가 화가 나서 의원을 죽여 버린 것이다.
그러나 다른 의원의 진단도 다르지 않았다. 터진 부위는 다시 회복될 수 없었고, 어째서인지 고통이 사라진 뒤에도 중요 부위가 꼼짝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황자는 괴성을 지르며 온 궁의 물건들을 부수기 시작했으나 그렇다고 그의 남성성이 회복되지는 않았다.
이내 황자는 온갖 여자들을 제 궁으로 끌어들이기 시작했다.
현실을 도무지 믿을 수가 없으니 외부에 그 원인을 돌리기 시작한 것이다.
머지않아 피해자가 속출했다. 제 몸이 반응하지 않는 것을 죄다 여자 탓으로 돌렸다. 궁에 들었던 여인들이 곤죽이 되어 실려 나오는 일들이 빈번해졌다.
곧 황자궁 근처에서 여성의 씨가 말랐다.
일이 그리되자 시종들이 코르티잔들을 구해다 넣기에 이르렀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황자는 다른 궁에서 일하는 시녀들을 납치하기까지 했다.
황성에서 일하는 시녀는 아무리 보잘것없는 위치라도 어쨌든 귀족 신분. 그런데 평민에게도 해서는 안 될 만행을 황자는 거리낌 없이 저지르고 있었다.
피해자가 많아지면서 귀족가에서 억울함을 이기지 못하고 온갖 상소를 올리기 시작했다.
원성이 높아지며 귀족 회의가 열렸다. 아무리 황자라도 이는 용납할 수 없다는 의견이 모아졌다.
모든 상황이 황자를 압박하며 조여오기에 이르렀다.
마음은 충만한데 따라 주지 않는 몸부터.
그로 인해 더 멀어져버린 계승.
매일같이 성토해오는 귀족들.
‘당장 황자를 폐위하라!’
환청까지 들려오는 듯했다.
“애버딘 공녀! 그년이…!”
이게 다 그 여자 탓이었다.
그의 마지막 기억은 침대에 누워 있던 애버딘 공녀의 옷을 벗기려고 했던 지점에서 끊겼다.
중간에 뭔가 고통스러운 사건이 있었던 것 같지만 그건 기억이 나질 않았다. 혼절에서 다시 깨어나니 남색 소굴이었다.
그날 그 방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리면 속을 게워내고 싶어졌다. 그의 남성성은 보잘것없이 쪼그라들다 못해 바스러졌다.
어쩌면 그의 하반신이 꼼짝도 안 하는 것이 끔찍했던 그 방의 새끼들 때문인지도 모른다.
죄다 잡아다 족치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다.
그는 이 울분을 어찌 해소해야 할지 알 수가 없어졌다.
“가만두지 않을 것이야!”
황자인 이 몸을 이 꼴로 만들었는데, 당장 끌고 와 제 마음대로 할 수도 없다니.
이 제국은 뭔가 잘못되었다.
그는 갈 곳 없는 분노를 황자궁 소속들에게 풀며 이를 갈았다.
* * *
“어디 가는 거예요?”
“회의하러요.”
현 상황을 놓고 4대 공작의 회의가 열린다고 했다.
“그런데 저는 왜…….”
아침부터 그가 외출 준비를 하라고 하기에 덩달아 나왔는데 회의라니.
“그대도 맹약자니까요.”
“하지만 제가 공작은 아니잖아요. 맹약자라는 신분 역시 아직 정식 인가를 받은 것도 아니고….”
“죄다 공작이라 4대 공작 회의라고 불리는 거지, 실은 맹약자라는 신분이 더 중요합니다. 정식 인가를 떠나 그대는 누가 뭐래도 맹약자이니, 그 자체로 참석할 자격이 충분합니다.”
그런 건가. 그쪽 방침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없으니, 그의 말을 믿기로 했다.
“하지만 아직 밝혀져서 좋을 것은 없으니…….”
콘스탄틴은 말을 하며 그녀의 후드를 당겨 더 깊이 모습을 가려주었다. 그 역시 후드 차림인 것은 마찬가지였다.
마차의 인장만으로 황성의 첫째 관문은 바로 넘었다.
내린 곳을 보고 사이나가 고개를 갸웃했다.
“워프 게이트를 탈 겁니다.”
“네?”
회의를 하는데 워프 게이트를 왜…….
어느 공작의 성에서 모이기로 한 건가?
사이나는 단순히 그렇게 추측했다.
곧 틀렸다는 것을 알았지만.
콘스탄틴은 평소 크레이머령에 갈 때와 다른 방식으로 힘을 주입했다. 더 정확하게는 크레이머령으로 통하는 문이 아니라 모든 문으로 동시에 힘을 주입하기 시작했다.
‘……?’
이건 대체 무슨?
사이나의 눈이 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