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5화. 마침내, 그날
찐득한 공기. 비릿한 냄새. 보기만 해도 불쾌한 정경.
전체적으로 훅 끼쳐오는 불쾌함에 미간이 절로 찌푸려졌다.
잘은 몰라도 별로 알고 싶지 않은 일들이 잔뜩 일어난 것은 분명해 보였다.
“하아…. 이자들을 깨워 다 내보내도록.”
“예!”
강제로 깨워진 자들이 줄줄이 방을 나갔다.
술인지, 약인지는 몰라도 아직 덜 깨어난 자들이 멍한 얼굴로 끌려 나가다시피 나갔고, 적당히 정신이 든 자는 몸보다는 얼굴을 가리며 나갔다.
“대체 저 방에서만 몇 명이 나오는 거야?”
“아니… 그것보다 죄다… 남자잖아…….”
황자가 발견되었다던 방에서 헐벗은 남자들만 죄다 나왔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황자가 남색가였어?”
“허어…. 그래서 계승이 안 됐던 거 아니야?”
“남색도 남색이지만, 하룻밤에 한 명으로는 만족을 못 하나 보지?”
“헤베타도 남자가 둘이었잖아?”
“황자도 헤베타도……. 아니,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각각의 추측이 피어나며 또다시 해명하지 못할 오해가 스멀스멀 퍼져나가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도 황자만은, 깨어나지 못한 채로 시종들에게 들려 황자궁으로 옮겨졌다.
* * *
황실에서 열린 최초의 가면무도회는 엄청난 파장을 불러일으키며 막을 내렸다.
이 하룻밤을 통해 인생이 뒤집힌 자들이 아주 여럿.
그중 한 명은 바로 헤베타 엘리자베스였다.
그녀는 스스로 자초한 면이 있으니 딱히 안타깝지는 않지만 말이다.
“황실의 혈통을 더럽히려 한 저 헤베타를 당장 잡아들여라!”
“예!”
황녀 역시 엘리자베스가 설계한 계략의 피해자가 될 뻔했던 사람이다. 의식도 없는 상태에서 자칫하면 큰일을 당할 뻔했다.
구제 불능인 오라비는 그렇다 치고 저 헤베타는 제 주제도 모르고 감히 황족에게 해를 끼쳤다.
이는 절대로 용서할 수 없는 일이었다.
황녀는 엄청나게 화가 났다.
“아니야! 뭔가 잘못됐어! 이건 함정이야! 황자 전하를 불러줘!!”
엘리자베스는 구속되어 끌려 나가는 동안 내내 억울하다는 듯 악을 썼으나, 아무도 그녀를 구해주지 않았다.
그 길로 바로 감금되었다.
이후 이 소동에 대한 소식을 들은 발데즈 가문에서 급하게 황가에 알현을 올렸으나 허락되지 않았다.
엘리자베스의 생사와 가문의 안위가 바람 앞의 촛불 같은 상태로 휘날렸다.
그 와중에 황자는 상황 파악을 못 하고 헤베타의 소식에 길길이 날뛰었다
“뭐라? 헤베타가 남자 둘과 발견돼? 이 더러운-! 당장 이것을 폐하겠다!”
발뺌은 기본이었다.
“이 모든 것은 다 그년이 한 짓이야! 난 연회에 참석했을 뿐이다!”
그리고 헤베타는 또 헤베타대로 모든 혐의를 황자의 탓으로 돌렸다.
“전 황자 전하를 대신하여 움직인 것뿐입니다. 제가 무슨 힘이 있어서 그랬겠어요! 전 억울해요!”
온갖 소문이 황도에 들끓었고, 그런 난장판 속에서 사람들은 황실이 제대로 된 조사 결과를 발표해주기를 기다렸다.
얼마 전에도 황자에 관한 애매한 소문이 돌다가 은근 슬쩍 묻힌 것을 기억하고 있던 사람들은, 이번에야말로 확실한 처벌을 바라며 연신 제 주장을 펼쳤다.
가면무도회는 단순히 파티로 끝나지 않고 그 파장이 꽤 길게 남았다.
그런 와중에 드디어 공고가 나왔다.
[발데즈가의 엘리자베스를 헤베타의 지위에서 폐한다.]
헤베타의 꼴사나운 모습을 목격한 자들이 워낙 많았기에 이 부분에 대해서는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자들이 많았다.
[황족의 핏줄을 더럽히려 한 죄와 황족 위해라는 위중한 죄를 범한바, 상기 죄인은 영구히 자손을 생산할 수 없으며, 평생 유폐의 형에 처한다.]
하지만 이어진 내용에는 의견이 분분했다.
황족의 핏줄을 더럽히려 했다는 혐의는 이해가 가는데 황족 위해는 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 내용이 사실이라면, 사형에 처해지지 않은 것만으로 운이 좋은 것이라며, 처벌이 너무 약하다고 투덜거렸다.
그렇다면 엘리자베스가 사형을 면한 이유는 무엇일까.
사실 그것은 자비의 문제가 아닌 사감의 영역이었다.
엘리자베스가 계획했던 그 하루를 통해 인생을 망칠 뻔했던 사람들. 더 정확하게는 애버딘가의 남매와 황녀 전하, 그리고 그것을 제지한 콘스탄틴과 사이나.
이들 전체의 의견이 모인 결과였다.
엘리자베스가 공식적인 사형 같은 편안한 방법으로 죽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공통된 생각이었다.
준황족인 헤베타의 지위를 폐하여 신분이 강등되고, 그마저도 죄인에 불과하여 가문의 방패막이조차 기대 못 할 변변찮은 신세.
그런데 이토록 많은 자들이 그녀를 향해 이를 갈고 있으니, 엘리자베스의 앞날에 대해서야 말을 해서 무엇할까.
사방이 위험으로 가득한 앞날을 면전에 두고,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두려움에 떠는 것밖에 없을 그런 입장이 되었다.
‘이렇게 끝이구나.’
사이나는 조용한 감상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 * *
그래……. 그렇게 생각했는데 말이다.
어쩌면 그건 사이나의 일방적인 감상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엘리자베스의 형이 집행되기 얼마 전.
미심쩍은 정황이 발견되었다.
“음? 너는? 에이미 아니니?”
잠자리에 들기 전 사이나는 몸을 씻고 나왔다. 나가니 평소에 못 보던 아이가 있었다.
화장대 앞 스툴에 사이나가 앉자 에이미와 다른 하녀가 자연스럽게 다가와 능숙하게 타월로 머리카락의 물기를 제거하기 시작했다.
“…예.”
에이미. 전에 엘리자베스가 매수한 정황을 발견하고 델본에서 크레이머 타운 하우스로 데려왔던 바로 그 하녀였다.
“타샤는 어디 갔니?”
타샤는 욕실 시중 담당인데 사이나가 욕실에서는 시중 받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목욕 후 머리카락을 말리고 정돈하는 것 정도만 맡아서 하고 있는 아이였다.
“갑자기 배탈이 나서 저와 바꾸었어요.”
“그래?”
“예.”
흠…. 배탈이라.
약간 미심쩍기는 하지만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기도 했다.
사이나는 거울을 통해 에이미가 일을 하는 모습을 조용하게 살폈다. 묵묵하게 제 할 일을 할 뿐, 딱히 수상한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그사이 하녀 둘이 머리의 물기를 얼추 다 제거했다. 그리고 한 명은 빗을 들고, 에이미는 머리에 바를 향유 병을 들고 왔다. 평소에 쓰던 것이다.
퐁, 하고 마개를 열자 익숙한 향이 훅 끼쳤다.
‘…아니, 좀 다른가?’
비슷한 듯 달랐다. 실은 후각의 영역이라기보다는, 예감의 영역에 더 가까웠지만.
“잠깐.”
“예?”
“기다려.”
미세하게 에이미의 동공이 흔들리는 것을 보며 사이나는 몸을 틀었다.
때마침 다리엘이 들어와서 그녀 때문에 멈추는 것 같은 타이밍이 되었다.
“다리엘.”
사이나는 웃으며 그녀를 반겼다.
“마님.”
“응. 무슨 일이니?”
“급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그래?”
대충 무슨 일 때문인지 알 것 같았다.
“너흰 잠시 나가 있다가 다시 오렴.”
“…하지만 향유를 아직 바르지 않았는걸요.”
“나중에 해도 돼.”
하녀는 고개를 숙이고는 나갔다. 에이미 역시 잠시 머뭇거렸으나 별수 없이 나갔다.
“저번 접선 이후, 오늘이 ‘그날’인 것 같아요.”
하녀들이 다 나가는 것을 확인한 후, 다리엘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역시나 에이미의 얘기였다.
그 하녀 자신은 모르겠지만 안팎으로 감시의 눈이 붙어 있는 상태였다. 이곳에 온 첫날부터 그랬다.
그렇지 않아도 저 하녀가 며칠 전 외출 허락을 요청했다는 보고에 미행을 붙였다. 비밀리에 꼬리 역할을 하고 온 자가 말하길 에이미가 잡화점에 들어가 있는 동안 누군가가 마찬가지로 손님인 척 들어가 그녀의 옆을 지나며 주머니에 뭔가를 넣는 것을 보았다고 했다.
그게 뭔지까지는 보지 못했다고 했는데, 사이나는 이제 그게 뭔지 알 것 같았다.
‘저 향유에 든 무언가.’
사실 에이미는 혹시나 하고 뿌려둔 미끼였는데 정말로 뭔가가 걸려들 줄은 몰랐다.
“고향에서 먹을 것을 보내줬다며 같이 나눠 먹자고 낮에 타샤에게 놀러 왔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에이미가 가고 몇 시간 후에 타샤는 갑자기 설사병이 났다고 한다.
이후 상황은 지금과 같았다.
결론은 뻔했다.
-쟤 눈치 엄청 빠른데? 지금 짐 싸고 있어. 도망가려나 봐.
욜리가 나타났다.
“끼약-?”
갑작스런 등장에 다리엘이 이상한 비명을 지르고는 홀린 듯 욜리를 보았다.
‘수호령 욜리는 처음 보던가?’
사이나는 처음 보는 다리엘의 멍청한 표정을 보며 귀엽다고 생각했다.
“다리엘. 방금 걔 도망가려나 봐.”
하지만 할 말은 해줘야겠지.
“예, 예?”
“지금 짐 싸고 있대.”
“……헉!”
다시 현실로 돌아왔는지 다리엘이 몸을 돌렸다.
“기사님께 말하고 올게요!”
그렇게 휙, 하고 사라졌다.
-재밌는 애네.
“그치? 참 유쾌한 아이야.”
욜리의 감상에 사이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저나 저긴 뭐가 들었어?”
사이나가 향유병을 가리키며 물었다.
-독.
“정말 독이란 말이야?”
-응. 희석은커녕 농축액 같은데. 이 정도면 손에 옮겨 바르는 사람도 중독될걸?
향유를 머리카락에 바르려면 자연스럽게 하녀의 손바닥에도 묻을 수밖에 없다. 제 손에도 묻을 것이 뻔한 향유에 뭘 믿고 수상한 액체를 탔을까?
저런 암로로 주인 몰래 섞으라고 넘어온 것이 당연히 몸에 좋은 성분일 리는 없다는 것은 하녀도 충분히 추측해낼 수 있는 것일 텐데, 의심스럽지도 않았나?
-바로 손을 씻으면 괜찮다고 했나 보지.
하긴 머리카락에 발라두면 발린 입장에서는 하루 종일 독에 노출되는 것이니, 다르긴 하겠다.
그쪽에서도 거짓일망정 뭔가 속살거리며 설득을 했을 것이다.
-근데 저 양은 아니야.
하녀가 이 향유를 발라주다가 중독되어서 다음 날 바로 죽더라도 엘리자베스로서는 전혀 상관없었을 것이다.
하녀 하나의 목숨쯤이야, 목적한 바만 이룰 수 있다면.
“……대체 어느 경로로 밖과 연락을 취했을까?”
그보단 이게 더 궁금했다.
지금 엘리자베스는 감금 상태였다.
그 와중에 필사적으로 밖으로 연락을 했는데, 지시한 게 사이나를 죽이는 일이라니.
아무래도 가면무도회 때 방해 공작을 펼친 게 이쪽이라는 걸 알아챈 모양이다.
똑똑.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