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3화. 족칠 때가 왔다
“…콘스탄틴?”
콘스탄틴이었다.
그녀에게는 그렇게 무겁던 몸을 그는 고양이 뒷덜미라도 쥔 것처럼 가볍게(심지어 한 손으로) 들고 있었다.
“사야….”
그의 목소리가 안도의 기색을 띠었다.
어찌 알고 이곳에 왔을까. 놀랍고 반가웠다.
“그대는 나갔다 하면 어째서 이렇게 위험한 장면만 내게 보여주는 겁니까.”
“…….”
예상했던 대로 상당히 심기가 불편해 보이기는 했지만 말이다.
멋쩍은 표정으로 몸을 일으키는데 갑자기 커다란 소음이 들렸다.
콰앙-!
“……?!”
순식간에 덮쳐드는 무언가에 놀라 사이나가 반사적으로 욜리를 소환하려던 차, 그녀의 몸이 낚아채지 듯 들렸다.
콘스탄틴이 손에 쥐고 있던 황자를 놓으며(실은 던지며) 바로 사이나를 잡아채고 몸을 뒤로 물린 것이다.
확실히 같은 맹약자라도 반사 신경 자체가 달랐다.
“끄어억-!”
빠악- 소리와 함께 누군가의 비장한 비명이 방 안을 울렸다.
사이나는 콘스탄틴의 품에서 시야가 가려지는 바람에 소리만 들었다.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야?
콘스탄틴으로부터 벗어난 사이나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몸을 돌렸다. 뒤를 보자 의외의 장면이 눈에 들어왔다.
‘……?!’
비명의 주인공이 황자였나 보다. 경련하던 그의 몸이 때마침 추욱 처지며 바닥에 늘어지는 것이 보였다.
잠시 정신이 들었던 건가? 근데 아까 그 비명은 뭐고?
사이나는 상황을 조금이라도 추측하기 위해 주변을 살폈다. 그러자, 황자 저편에서 콧김을 내뿜고 있는 있는 존재를 알아챌 수 있었다.
‘…에렌혼?’
혹시 에렌혼이 황자를 들이받은 거야?
“하! 늦지 않은 모양이네!”
그리고 다른 존재 역시 알아챘다.
에렌혼의 주인. 순식간에 다가온 애버딘 공작이 그녀를 덥석 안았다.
“…엇!”
“다행이다. 다행이야!”
-푸르륵!
이유는 모르겠으나 에렌혼도 그녀의 등 뒤에 들러붙어서는 제 뺨을 그녀의 등짝에 비비적거렸다.
부적절(?)한 포옹에 놀란 사이나가 애버딘 공작을 밀려 했으나 어찌나 꽉 안았는지 전혀 밀리지 않았다.
“이 새끼가….”
그러나 콘스탄틴의 분노한 목소리와 함께 사이나의 앞뒤를 막고 있던 존재들이 순식간에 떨어져 나갔다.
“뭐야, 크레이머 네가 뭔 상관….”
애버딘 공작은 버럭 소리를 지르려다가 뭔가를 느꼈는지 사이나를 빤히 보았다.
한쪽에서는 에렌혼도 불만스럽다는 듯 푸르륵거렸다.
“어… 플… 로리아가 아니…. 당신은 누구지? 설마?”
사이나는 천천히 가면을 벗고는 그에게 눈인사를 했다.
“플로리아가 아니에요.”
“허…. 새 맹약자가, 당신이었어요?”
“네. 그렇게 됐어요.”
“와, 크레이머 이 새끼…. 하, 이게 중요한 게 아니지. 제 동생은 어디 가고 당신이 그 복장을 하고 있습니까?
“그녀의 옷을 제가 입었습니다. 플로리아는 안전한 곳에 있을 거예요. 걱정 마세요.”
사이나는 플로리아를 보내기까지의 상황을 간략하게 설명했다.
애버딘 공작은 사이나에게 들은 상황과 쓰러진 황자, 그리고 이 별채, 사이나와 콘스탄틴의 태도 등을 찬찬히 관찰하며 고개를 갸웃했다.
“대체 이게 무슨 상황일까, 응?”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는 모르지만 중얼거리기도 했다.
“내가 오늘 황성에 들어서자마자 뭔가 이상함을 느꼈거든?”
애버딘 공작은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들러붙는 시선을 느꼈다. 그 시선은 연회장에 들어선 이후에도 그대로였다.
지금은 벗은 상태지만 초반에는 신사용 모자를 써서 머리카락 색을 가리고 가면은 당연히 썼음에도 그랬다.
파트너를 찾는 눈길이 아니라 말 그대로 감시의 눈초리였다.
맹약자의 기감에 대해 전혀 모르는 자가 감시자를 붙인 모양이다. 알았다면 절대 이렇게 허술하게 붙이지 않았을 테니.
수상하기 짝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일부러 여자를 한 명 꼬셨다. 그리고 그 여자와 함께 2층으로 향했다.
침실로 들어가서 감시의 눈을 떨궈내고 대체 이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지 알아내려는 목적이었다.
‘이쪽 방은 지금 다 찬 상태입니다. 빈방으로 안내하겠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시종이 나타나 더 수상한 짓거리를 했다.
빈방이라?
마찬가지로 맹약자가 어떤 존재인지 모르기에 할 수 있는 수작이었다. 인기척도 구분 못 하는 맹약자가 어찌 마수를 잡겠는가.
그가 감지하기에 근처에 있는 방은 대다수가 비어있는 상태였다. 아직 연회 초반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얼 하자는 건지 보자 싶어 시종을 따랐다.
‘이 방을 쓰시면 됩니다.’
복도 제일 끝 방.
루카스 애버딘은 방 너머의 기운을 살폈으나 인기척은 없었다. 분명 빈방이 맞았다.
굳이 왜 여기까지 와야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들어가 보면 알겠지.
가볍게 생각한 그가 시종에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여자를 이끌어 방에 들어섰다.
방에 들어선 그는 주변을 돌아보았다.
내부 물건, 구조…. 평범한 객실이다.
쓸데없는 가구나 짐이 없는 단순한 구조의 손님용 침실.
조금 다른 게 있다면…… 음? 방 안에 또 다른 문이 있잖아? 게다가 이 냄새는 뭐야?
뭔가 묘한 냄새가 나는데.
고개를 갸웃하고 있는데 갑자기 같이 온 여자가 제게 달려들었다.
‘흐윽-!’
‘-뭐야?’
여자가 갑자기 옷을 벗어젖히며 덤벼들기 시작한 것이다.
‘나 좀… 흐응…….’
눈빛이 흐리멍덩한 데다 몸을 배배 꼬는 것이 뭔가 이상했다.
주변을 살피자 테이블 위에 손댄 흔적이 있는 잔이 보였다.
물? 술?
뭔지는 몰라도 저걸 마신 모양인데 그 안에 이상한 것이 들어있었나 보다.
게다가 지금 이 향.
매서운 눈초리로 향의 진원지를 뒤졌다. 방 안 몇 군데에 장식처럼 놓여 있던 꽃다발이 수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순한 꽃향기가 아니라 뭔가 신경을 자극하는 냄새가 났다.
루카스는 제게 엉겨 붙는 여자를 떼어내 기절을 시키고 다시 옷을 입히고 침대에 뉘였다.
그리고는 생각했다.
왜 자신을 이 방으로 안내했을까.
단순히 광란의 밤을 보내라고?
뭔가 이상했다. 지금 가면무도회를 위시해 수상쩍은 일이 전체적으로 벌어지고 있다는 것은 알겠다.
플로리아도 참석했는데! 괜찮을까?
갑자기 제 여동생이 걱정되기 시작해서 그는 몸을 일으켰다.
그런데 그때.
방금 전까지만 해도 비어있던 옆방에 사람이 들었다.
둘? 셋? 특히 그중 한 명은 그가 무시 못 할 기운을 품고 있었다.
…맹약자?
기운으로 봐선 황가의 그것.
아니, 비슷하면서도 뭔가 이질적이었다. 그래도 굳이 따지자면 황가의 것에 제일 가까웠다.
황실에서 대체 뭘 꾸미고 있는 거지?
얼마 전부터 수상쩍은 행보를 보이던 황자를 떠올리며 그의 미간이 구겨졌다.
자신이 방에 들자마자 옆방에 사람이 들었다? 그것도 하필 연결문으로 연결된 방에?
어떻게 봐도 절대 우연은 아니었다.
루카스는 기감을 세우며 옆을 살폈다. 약간의 시간이 흐르고 몇 개이던 인기척이 하나만 남았다. 더 정확히는 맹약자의 것만 남았다.
그는 조용히 기다렸다.
이쪽에서 맹약자의 기운을 느낄 수 있다면, 저쪽에서도 마찬가지로 느낄 수 있다.
그렇기에 섣불리 움직일 수가 없었다. 자신이 뭔가 행동을 먼저 취해도 되는지 확신이 서지 않아서 그는 긴장감만 새기며 옆방을 주시했다.
하지만 한참이 지나도 저쪽에서 움직임이 느껴지지 않자 그는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연결문 쪽으로 다가가 일부러 문을 덜컥거리며 여는 시늉을 해 보았다.
그래도 저 너머는 조용했다.
약간의 고민을 더 거친 그는 문을 열기로 결심했다.
어차피 잠긴 문을 여는 것 따위는 맹약자에게 일도 아니었다.
경계 태세를 취한 채 문을 열었으나 저쪽은 여전히 고요했다.
루카스는 찬찬히 옆방으로 들어섰다.
…황녀??
그리고 그곳에서 발견한 것은 의외의 사람이었다.
바로 매디얼 황녀.
게다가 의식을 잃은 채 침대에 대충 눕혀져 있었다.
황녀 전하가 여기에 있는 것도 이상한데, 이 기운은 더 이상하다.
푸르륵.
어느새 나타난 에렌혼이 황녀의 배꼽 근처를 킁킁거리고는 머리를 들었다. 그걸 보니 뭔가 떠오르는 게 있었다.
하, 설마. 임신? 황녀가 계승의 증거를 가진 건가?
상상도 못 한 상황에 루카스가 멍해졌다.
황자가 아닌 황녀라니.
착각이라고 생각하고 싶지만, 온몸으로 느껴지는 이 기운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도대체가 산 넘어 산. 점점 더 이해하기 힘든 상황뿐이었다.
그는 이 사태를 파악하기 위해 누군가를 족칠 때가 왔음을 깨달았다.
이 새끼….
그에게 이 방을 안내한 시종이 멀지 않은 곳에 있다는 것을 그는 사실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일반인이야 그 사실을 모르겠지만, 맹약자에게는 수호령의 힘이 있다. 이 정도 파악은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자신을 안내한 이후, 이쪽으로 향하는 발걸음을 중간에서 차단할 목적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는 듯했다.
그는 방을 나서자마자 그 시종을 낚아채 돌아왔다.
‘허어어억!’
놀란 시종에게 기세를 일으키며 화사하게 웃었다. 시종에게는 그 미소가 화사하다기보다는 싸늘하기 짝이 없는 사신의 미소처럼 느껴졌지만 말이다.
‘자, 이게 무슨 상황인지 말을 좀 해줘야겠다?’
‘무, 무슨 말씀이신지!’
‘왜 저 옆방에 황녀 전하께서 계신 걸까?’
‘화, 황녀 전하요? 저, 저는 모르는…….’
‘괜히 서로 힘 뺄 일은 하지 말자, 응?’
애버딘 공작의 커다란 손바닥이 시종의 정수리를 덮었다.
‘-끄아아-으읍!’
뭔가 끔찍한 것을 본 것처럼 눈을 부릅뜨고 몸을 부들부들 떨며 비명을 지르기 시작한 시종의 입을 루카스가 가볍게 틀어막았다.
에렌혼의 능력이다. 환상과 환시를 통해 가장 끔찍한 장면을 재현해 줄 수 있다고나 할까.
‘자아- 이제 좀 털어놓고 싶은 마음이 들었을까?’
화사한 목소리로 내뱉어지는 질문이 공포스럽기 짝이 없었다.
시종이 덜덜 떨며 대답했다.
‘저, 정말 황녀 전하가 왜 저기에 계시는지 저는… 끄으으으-!’
루카스는 한숨을 쉬고는 다시 능력을 썼다. 이번엔 아예 환시 속에서 그에게 질문했다. 부작용이 꽤 심해 참으려 했건만, 생각해보니 황족 납치까지 하는 것들을 뭐 하러 봐줄까 싶었다.
시종이 몸을 부들거리며 느릿느릿 말을 늘어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