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2화. 작정을 했구나
감시의 눈?
“…벌써?”
사이나는 놀라 반문했다.
“응?”
카이언이 자신에게 하는 말인 줄 알고 되물었다.
그제야 아차 한 사이나가 허둥지둥 말을 돌렸다.
“어, 음. 벌써, 저쪽에 뭐가 보인다고. 거의 다 온 것 같네.”
“그러네.”
은근히 불편하구나, 이거.
다른 맹약자들은 제 수호령과 어떤 식으로 대화를 하는 거지?
문득 궁금해졌다.
-한둘이 아닌데? 아까 내렸을 때보다 더 많아진 듯.
자꾸만 무심코 대답을 해버릴 것 같지 않은가.
사이나는 입술을 꾸욱 말아 무는 것으로 말을 제어하기 위해 애썼다.
‘감시자 여럿이라…….’
엘리자베스는 테라스를 통해 빠져나간 플로리아가 마차 대기소 쪽으로 향했을 확률이 크다고 본 모양이다.
그러니 이렇게 빠르게 사람을 보내 대처했겠지.
확실히 정확한 판단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지레 겁먹고 물러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카이언. 플로리아인 티가 나지 않게 너희 가문 마차를 이용해줘.”
이미 옷을 갈아입은 데다, 그가 다른 사람인 척 데리고 나가줄 테니.
이리 보니 카이언과 만난 것이 참 다행이었다.
“알았어.”
그는 유리로부터 플로리아를 건네받아 안았다. 그리고 풀숲에서 빠져나가 잘 포장된 황성의 이동로로 올라섰다.
천천히 걸어 마차 대기소에 이른 카이언을 시종이 맞았다.
“애크로이드가의 마차를 불러주게.”
“애크로이드요!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마차를 기다리는 동안, 사이나와 유리는 멀찍이 숨어 동태를 살폈다.
시종이 품 안의 플로리아를 흘끔거리는 것이 보였다. 몰래 살피는 눈초리가 은근히 집요했다.
“아, 누나. 술 좀 작작 먹지. 무거워 죽겠네.”
그때 카이언이 투덜거리듯 말했다. 마치 품 안의 여자가 키얼스틴인 것처럼.
적절한 조치였던지 시종의 눈이 스윽 떨어져 나가고 금세 마차가 도착했다.
“조심히 들어가십시오! 소후작님과 영애님!”
“그래.”
문을 잘 닫아준 시종이 공손하게 인사를 하고, 마차가 이내 멀어졌다.
플로리아가 무사히 황성을 떠나는 것을 보니 안도의 한숨이 커다랗게 새어 나왔다.
엘리자베스의 타깃을 빼돌린 것만으로도 부담이 상당히 가셨다. 훨씬 홀가분한 기분으로 움직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타깃은 이제 자신의 역할이 되었다.
잡힐 것인가. 잡힌 척할 것인가. 쳐들어갈 것인가.
사이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아마 엘리자베스 쪽에서는 그녀의 반대편에서 움직이는 자가 있다는 것을 모를 것이다.
그것은 이쪽의 가장 큰 이점 중 하나이기도 하니, 가능한한 최대한 오래 이 장점을 유지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럼 멀리 갈 것도 없겠네.’
사이나는 유리의 실체화를 거둬들였다.
-뭐야. 여기서 바로?
‘응.’
실체화가 아닐 땐 생각만으로 의사 소통이 가능했다.
사이나는 몸에 힘을 빼서 추욱 늘어뜨렸다. 어차피 가면을 써서 안색까지는 확인할 수 없으니 다행이었다.
사이나는 뒤에서 누가 쫓기라도 하는 사람처럼 급하게 숲에서 빠져나갔다.
부러 학학, 거리는 숨소리를 내며 마차 대기소로 향했다. 누군가 보면 매우 조급하게 보일 것이다.
그녀와 맞닥뜨린 시종의 눈초리가 그 지위나 역할에 맞지 않게 날카로워졌다.
“…영애님?”
“헉…. 마차…….”
“마차를 불러드릴까요?”
“애버딘가의 마차를…….”
말을 채 끝마치지도 못하고 여체가 바닥으로 무너졌다.
반사 신경이 좋은 것인지, 예상을 한 것인지는 몰라도 시종이 곧바로 그녀의 몸을 받쳤다.
낯선 시종의 품에 몸을 내맡긴 상황이 썩 달갑지는 않았으나 별수 없었다. 사이나는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 몸을 더 추욱 늘어뜨렸다. 정말 정신을 잃은 사람처럼 말이다.
“…영애님? 괜찮으십니까? 영애님?”
시종이 별로 다급하지 않은 말투로 물었다. 별로 놀란 것 같지도 않은 목소리라 참으로 성의 없는 물음으로 느껴졌으나 티 낼 수는 없었다.
확실하게 의식을 잃었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시종이 말했다.
“이제야 약 기운이 제대로 돌았나 보네. 공녀를 찾았다고 알려라.”
“알겠습니다.”
시종 외의 누군가가 대답하는 소리가 들리고 그녀는 누군가의 등에 업혀졌다.
그 위로 커다란 후드가 씌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분명 애버딘가의 마차를 불러 달라고 했건만, 무시하고 그녀를 어딘가로 데리고 가고 있었다.
감시자를 깔아둔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과연 어디로 데려가려는 걸까.’
4대 공작가의 공녀이자, 맹약자의 하나뿐인 여동생임을 알면서도 이렇게 대담한 수작이라니.
엘리자베스는 어디까지 제정신이 아닌 것일까.
직접 몸으로 확인을 당하면서도 어이가 없어 그 의도를 다시금 의심하게 만들 정도였다.
아무리 헤베타라고 해도 뒷감당을 어찌하려고 이런 짓을 벌이는 것인지, 당최 이해가 가질 않았기 때문이다.
의식을 잃은 상태로(가짜지만) 한참을 이동한 사이나는 실외에서 실내로 이동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발걸음의 소리가 달라졌다.
그러고도 한참을 더 옮겨진 그녀에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공녀야?”
“예.”
후드를 들추는 느낌에 순간 놀랐으나 몸을 움찔하지 않는 데에 성공했다.
그녀의 외양을 설핏 확인한 손길이 후드를 놓았다.
“하, 애먹이네. 진짜.”
“…….”
“그 오라비나 동생이나 둘 다…….”
짜증이 잔뜩 묻어 있는 목소리를 들으며 사이나는 의문을 가졌다.
‘오라비? 애버딘 공작?’
애버딘 공작의 얘긴 왜 나오는 걸까. 그도 참석을 한 걸까? 아니, 참석이야 충분히 할 수 있지. 혹 둘이 무슨 일이 있었나?
이런저런 생각이 머릿속을 열심히 스쳐 지나갔다.
“여기에 눕히렴.”
“예.”
사이나는 몸이 눕혀지며 풀썩 넘어갔다. 등 뒤에 닿는 느낌으로 보아 침대 위에 눕혀진 듯했다.
사이나는 물끄러미 그녀를 내려다보는 시선을 느꼈다.
아마도 엘리자베스의 것일 시선이 침묵과 함께 그녀의 몸 위로 내려앉는 것이 느껴졌다.
‘혹시 가면을 벗기면 어쩌지.’
그런 걱정이 자연스럽게 따랐다.
“이 모습 그대로 두자. 이렇게 정체성이 확실한 차림새를 더 좋아할 것 같으니까.”
하지만 다행히 그럴 생각은 없는 듯 보였다.
“예.”
“자, 그럼 넌 이제 그분을 불러오렴. 난 다음 일을 처리하러 가야겠다.”
“알겠습니다.”
뚜벅거리는 발소리가 멀어졌다.
‘그분?’
-쟤가 그 ‘분’이라는 존칭을 쓸 사람이면 뻔하지 않나?
‘황자란 말이야?’
-그 외엔 없잖아?
사이나도 그런 추측을 하기는 했으나, 그래도 되묻게 되는 것은 뭔가 이상했기 때문이다.
황자라니. 대체 왜? 황자의 짝인 헤베타가 황자에게 다른 여자를 품으라고 가져다 바친다고? 게다가 제국의 공녀를?
이건 대체 무슨 상황으로 이해해야 하나.
‘아무리 간덩이가 부었다고 해도, 이건… 좀 아니지 않아?’
-미친 연놈들 생각을 어찌 이해하냐. 그것들의 머릿속을 이해해 보려는 노력 자체가 바보짓이라는 걸 깨달은 지 오래다.
유리는 시니컬하게 덧붙였다.
사이나는 반박할 수 없었다. 정말 그러했으니.
‘하아……. 사람 없지, 방에?’
-응.
사이나는 감고 있던 눈을 뜨며 몸을 일으켰다.
여긴 어딜까. 침대가 있는 것에서 당연히 방일 것이라고는 생각했으나 어느 궁에 있는 방인지까지는 알 수 없었다.
유심히 방 안을 살폈다. 보통 내부만 봐도 대충의 용도가 보이기 때문이다.
‘…2층은 아닌 거 같네.’
연회홀에 딸린 손님용 객실보다는 좋아 보이는 방이었다.
게다가 뭔가 분위기가 특이했다. 일반 손님용 방은 아닌 것 같은 그런 분위기.
사이나는 창가로 다가가 밖을 살폈다.
“어……. 별채잖아?”
아니, 별궁이라고 해야 맞으려나. 궁이라고 하기에는 좀 작은 규모인 것 같기는 하지만 말이다.
-작정을 했네, 이것들이.
여기라면 아무리 비명을 질러도 아무도 못 들을 것 같기는 하다. 그런 용도로 고른 건가?
콘스탄틴이 이런 곳에 그녀가 있는 걸 알게 되면 상당히 심기 불편해할 것 같은데.
벌써부터 그 장면이 그려져서 입매가 다물렸다.
“아니, 이 정도면 감금에 범죄 아닌가?”
일을 치는 건 그렇다 치고 대체 수습은 어찌하려고? 애버딘 공작가가 그렇게 만만한 가문이었어?
-뭔가 대책이 있으니까 이러는 거겠지.
사이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그 대책이 어떻게 가능할지 생각해 낼 수 없었다.
-왔다. 다시 누워.
유리의 말에 사이나는 몸을 다시 침대 위로 던지다시피 털썩 쓰러지며 눈을 감았다.
“-하하하.”
거북할 정도로 호탕한 척 웃는 목소리가 공간을 울렸다.
“정말 공녀네? 하하하하.”
정말 황자네? 이쪽에서도 놀랍기는 매한가지다.
황자일 거라고 거의 확신하기는 했지만 정말 등장하자, 새삼 짜증이 솟구쳤다.
아무리 자진해서 의도한 것이라지만 가장 대면하기 싫은 작자 중 하나 앞에서 무기력하게 누워 있어야 하는 지금 상황이 어찌 마음에 들겠는가.
하지만 사이나는 애써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녀는 더 이상 나약하지 않다.
원한다면 언제든 도망을 칠 수도, 그를 공격할 수도, 방어할 수도 있었다. 심지어 그녀가 당장 정신을 잃더라도 유리가 그녀를 지켜줄 것이다.
그런 생각이 들자 들끓던 마음이 침착하게 가라앉았다. 그와 반대로 감각은 날카롭게 벼려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어디 보자……. 역시 직계라 그런지 정령력이 막 느껴지는 것 같네.”
킬킬거리는 목소리와 함께 몸에 손이 닿았다.
순간 그 손을 뿌리치며 벌떡 일어날 뻔했으나, 사이나는 참았다.
그가 발치 쪽에 있어 그녀가 손을 뻗어도 닿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좀 더 확실한 기회가 필요했다.
그녀는 입 안쪽 살을 씹으며 몸을 더듬어 올라오는 촉감을 조금 더 참아야 했다. 모양과 기능을 품평하는 것 같은 손길이 역하기 짝이 없었다.
이윽고 상체를 타고 손이 올라왔을 때에야 사이나는 덥썩 그의 팔을 잡았다.
“뭐- 억…!”
기절 반지의 힘이 붙잡은 손아귀를 타고 그를 관통했다.
끄윽, 소리와 함께 쓰러진 몸뚱이가 그녀의 위로 털썩 쓰러졌다.
“으…….”
쓰러져도 하필 제 팔을 가두며 쓰러지는 바람에 팔의 각도가 이상해서 밀어낼 수가 없었다.
게다가 고개를 그녀의 목덜미로 처박은 상태라 거지같은 숨결이 고스란히 느껴져서 더 짜증 났다.
‘비켜, 이 자식아-’
몸을 여러 번 비틀다가 팔이 더 꺾이는 기분에 포기하고 유리를 불러내려고 하기 직전, 황자의 몸이 훅 들려 떨어져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