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화. 미끼
‘그렇다는 건….’
플로리아를 이렇게 만든 자일 확률이 높겠지. 그리고 그것은 높을 확률로 엘리자베스이거나 그녀의 수족일 것이다.
아까 그 황실 시종처럼.
덜컹, 덜컹-
문이 또다시 덜컥거렸다. 이번엔 여러 번.
“…….”
그리고는 잠잠해졌다.
-테라스를 통해 나가자. 이곳은 안전하지 않아.
유리가 플로리아를 안아 들었다.
사이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아까 벗긴 플로리아의 가면을 챙겨 들고 테라스 쪽으로 향했다.
“잠깐.”
아래로 뛰어내리려던 사이나는 잠시 멈춰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는 가면에 달려있던 뿔 부분을 손으로 부러뜨려 테라스에 떨궜다.
“아래 말고 옆으로 이동하자.”
-저쪽으로?
“응.”
이쪽 테라스에서 저쪽 테라스, 또 더 멀리 있는 테라스로 건너건너 이동하는 것은 보통 사람이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사이 간격이 상당히 멀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수호령의 힘이 있다면 어렵지 않은 일이다. 유리가 있다는 것만으로 상대방의 허를 찌를 동선이 쉽게 가능했다.
때마침 테라스로 나오는 사람과 마주치기라도 한다면 좀 곤란하겠지만, 그마저도 내부 인기척을 감지할 수 있으니 피할 수 있었다.
게다가 지금은 밤인지라 내부에 누군가 있어도 그들의 움직임을 눈치채지 못했다.
셋은 수월하게 가장 끝 테라스까지 이동할 수 있었다. 때마침 안쪽도 비어 있었다.
테라스 난간에서 내려와 바닥을 딛고 문을 열기가 무섭게, 원래 그들이 있던 휴게실의 테라스로 누군가가 나오는 것이 보였다.
사이나는 얼른 안쪽으로 들어서며 몸을 숨겼다.
그리고 쪼그려 앉아 한쪽 얼굴만 조심스레 내밀고 저쪽을 보았다. 기사들처럼 밤눈이 좋은 게 아닌지라 대강의 실루엣밖에 안 보였다.
눈을 찌푸리는 사이나를 보며, 플로리아를 안쪽에 눕혀두고 돌아온 유리가 말했다.
-…역시나 엘리자베스네.
결국…….
얼핏 드레스의 실루엣이 보이기에 그럴 것 같다는 생각은 했으나, 대놓고 확인을 받으니 한숨이 새어 나왔다.
-아무래도 마스터키를 가지고 있나 본데.
“하긴 황성이니.”
문을 부숴서 들어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끌어서는 안 되니까.
-네가 아까 떨어뜨렸던 뿔 조각을 발견했어.
유리는 시력도 남다른지 저쪽 상황을 자세하게 말해주기 시작했다.
-‘하, 대체 여길 어떻게 뛰어내렸지?’
“응?”
-‘멀리는 못 갔을 거야. 얼른 저쪽을 뒤져. 아, 마차 대기소 쪽으로 갔을지도 모르겠네. 찾아내서 내게 데려와.’라고 말했어.
다행히 그녀가 의도한 대로 아래 테라스 아래로 도망쳤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유리.”
-음?
“너 잠깐 사라져 있어.”
-왜?
“플로리아와 옷을 바꿔 입을 거야.”
-뭐? 네가 미끼가 될 생각이야?
“사자를 잡으려면 사자 굴로 들어가야 하는 법이지.”
-위험해. 난 반대다.
가면무도회의 악몽은 사이나에게만 남은 게 아니다. 유리에게도 이번 일은 심리적으로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때의 나와 지금은 달라. 유리, 네가 있잖아. 여차하면 콘스탄틴도 있고.”
-하, 그래도…….
“이게 가장 효과적이야. 내 말이 틀려?”
지금 기회를 놓치면 언제 또 빌미를 잡게 될지 알 수 없다.
‘이후로는 내가 아는 게 별로 없어.’
그런 이유도 있었다.
원래도 사교계 정보라든지 흐름에 그다지 밝지는 않았지만, ‘그 사건’이 벌어진 후 사이나는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세상에서 격리되다시피 했으니까.
“자, 저쪽에서 눈 감고 있어. 잠시 사라져 있든지.”
-…….
그가 구석에 숨어있는 동안 사이나는 제 옷을 벗었고, 플로리아의 것도 벗겼다. 그리고 제 드레스를 플로리아에게 입히고 플로리아의 것은 자신이 입었다.
플로리아의 키가 사이나보다 작아서 자신의 드레스는 그녀에게 좀 길었다.
짧은 게 더 문제라 걱정했는데 입어보니 괜찮았다.
유니콘 컨셉이라 그런지 치맛단이 약간 말총 같은 느낌으로 갈래갈래 퍼져 내려오는 데다 아래에 갈색 부츠가 꼭 보여야 하는 건지 종아리까지 오는 길이였다.
‘부츠가 말발굽 대신인가.’
잘은 몰라도 그런 듯했다.
사이나가 입으니 플로리아가 입었을 때보다 치맛단이 약간 더 올라오기는 했지만 어지간히 눈썰미가 좋은 사람이 아니라면 잘 모를 것이다.
다행히 신발 사이즈는 비슷한 듯 크게 불편하지 않았다.
‘혹시나 하고 챙겨 온 건데 진짜 쓸 줄은 몰랐네.’
사이나는 후드 안쪽에서 주머니 하나를 꺼냈다. 그 안엔 분홍색 가발이 하나 들어있었다.
거울을 보고 가발을 쓴 사이나는 플로리아의 머리 형태와 최대한 비슷하게 모양을 꾸민 다음 가면을 썼다.
아까 이게 거의 온가면에 가까운 형태의 가면인 것을 보고 해볼 만하겠다 싶어 결정한 것이었다.
‘흠. 어지간해선 구분 못 할 거야.’
플로리아의 소품까지 다 착장하고 거울 속의 자신을 들여다본 사이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면 어지간히 다 속아 넘어갈 것이다.
그녀의 기운을 구분할 수 있는 사람만 빼고 말이다.
“이제 이 애를 카이언에게 데려다줘야겠어.”
-카이언?
“응. 아까 만나기로 하기도 했고, 카이언이라면 플로리아를 안전하게 데려다줄 거야.”
지금 상황에서는 애버딘 공작을 찾는 것보다 그게 더 확실한 방법으로 보였다.
사이나는 아까 자신이 입고 온 후드까지 그녀에게 입힌 다음 플로리아의 분홍색 머리카락이 보이지 않도록 리본으로 묶어 안쪽으로 잘 갈무리했다.
후드를 깊이 씌우니 플로리아의 정체는 완전히 다 가려졌다.
-그래. 그 자식이면 믿어도 될 것 같다.
다시 다가와 플로리아를 안아 드는 유리를 보며 사이나가 문득 물었다.
“…그립지는 않아?”
카이언은 본래 유리의 친구.
아까는 경황이 없어 묻지 못했다.
그는 그저 웃었다.
-내가 서탑에 있는 동안 저 자식이랑 교류를 했겠냐?
어릴 때의 기억은 단순히 십몇 년 전이 아니다.
그의 감성은 시간을 거치며 깎일 대로 깎여 사실 사이나를 향해 가졌던 집요한 목표 외에는 남아있는 것이 거의 없었다.
그러니 그립다는 느낌도 이제는 지식처럼 남은 개념적인 무언가에 가까웠다.
그가 인간처럼 느끼는 감정은 사이나와 관련한 것 외에는 거의 남아 있지 않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래도 사이나와 대화를 계속 나누면서 조금씩 회복되어가는 것 같기는 했지만.
“난…….”
무슨 말을 해야 할까.
그는 어떻게 그럴 수가 있었을까.
지금도 사이나는 그가 어떤 결심을 거쳐, 얼마나 지난한 시간을 거쳐 왔는지 다 알지 못했다.
그는 플로리아를 안았던 손을 고쳐 들며 한 손을 사이나의 정수리에 얹었다.
툭.
접촉을 통해 넘어오는 체온은 없었으나, 그 묵직함만은 느껴졌다.
-지금 이럴 때가 아닐 텐데.
“…….”
-그리고 네가 미안해할 것도 없어. 내 선택이었을 뿐. 네가 부탁한 것도 아니잖아.
머리로 그렇다는 것은 알아도 마음이 어찌 정말 그렇게 되던가.
-밖에 지금 사람 없다.
하지만 그의 말대로 지금은 감상에 빠져 있을 때가 아니었다.
슬그머니 문을 열고 밖을 내다본 둘은 얼른 나와 계단으로 향했다. 끝 테라스로 온 이유가 바로 복도 끝에 밖으로 향하는 출입구가 있다는 것을 알아서이다.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고 밖으로 나가는 것에 성공한 사이나와 유리는 아까 엘리자베스의 수족들이 갔을 방향과 반대쪽으로 향했다.
인기척이 없는 곳을 골라 돌아가느라 꽤나 지체되었다.
밀회를 하러 나온 것인지 후원에도 여기저기 숨어있는 남녀들이 상당했기 때문이다.
카이언과 만나기로 한 분수대 근처에 거의 다 온 사이나는 곧바로 나서지 않고 근처에 숨었다.
“주변에 사람 없지?”
-응.
사이나는 바닥에서 작은 돌을 몇 개 들어 카이언 쪽으로 던졌다.
토도독. 발밑으로 굴러와 신발을 두들기는 느낌에 카이언이 뒤로 돌았다.
“…플로……!”
“쉿.”
사이나는 입가로 검지를 가져다 세우며 그의 입을 막았다.
옷을 갈아입은 덕분에 카이언은 그녀를 플로리아라고 여기는 듯했다.
사이나는 다른 손을 까닥거림으로 그를 이쪽으로 오라고 표현했다.
카이언은 영문도 모르면서 괜히 주변을 두리번거리고는 천천히 다가왔다.
그녀는 그를 풀숲의 사각지대로 이끌었다. 신중해서 나쁠 것은 없으니.
“……?!”
거기엔 유리가 플로리아를 안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카이언이 멈칫했다.
“…무슨 상황이지?”
사이나는 가면을 벗었다.
“……사이나?”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 고스란히 얼굴 위로 떠오르는 것을 보며 사이나가 입을 열었다.
“저 애가 플로리아야. 연회에서 뭔가 질 나쁜 것을 먹은 것 같아.”
그녀는 유리 품 안의 실루엣을 가리켰다.
카이언은 유리 쪽으로 다가가 후드를 슬쩍 들춰 얼굴을 확인하고는 안도했다.
“아, 다행히 찾았구나.”
그는 열심히 찾아 헤맸던 건지, 이마가 살짝 젖어 있었다.
“네가 이 애를 안전하게 좀 데려다줄 수 있을까?”
“…그건 문제가 아닌데.”
카이언은 의구심 어린 표정으로 물었다.
“옷을 왜 바꿔 입은 거야?”
당연한 질문이었다.
그리고 사이나는 그 대답을 미리 생각해 두었다.
“아무래도 플로리아에게 나쁜 것을 일부러 먹인 사람이 있는 것 같아서.”
“뭐?! 그럼 너도…….”
“난 괜찮아.”
카이언은 말도 안 된다는 듯 그녀의 팔을 잡았다.
“위험을 무릅쓰지 마.”
“무작정 객기부리는 거 아니야. 호위도 있는걸.”
사이나는 유리를 가리켰다.
“그래도…….”
“무조건 잡고 말겠다, 이런 건 아니고. 혹시나 하고 그런 거니까 걱정 마. 난 아무것도 안 마실 거니까.”
카이언은 여전히 내키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나보단 플로리아가 급해. 괜히 깨어나기라도 하면 범인을 잡고 말겠다며 날뛸지도 몰라.”
플로리아의 성격이라면 충분히 그럴 것이다.
그러면 성과도 없고, 진범도 못 잡고, 그냥 끝나버리겠지.
“후, 알았어.”
“네가 상황을 잘 설명해줘. 집까지 잘 데려다주고. 혹시 깨어나더라도 다시 돌아오게 해선 안 돼.”
“…….”
카이언은 머뭇거리는 눈으로 사이나를 보았다.
여전히 그녀를 두고 가기엔 찝찝하다는 표정이었다.
“혹시 연회를 더 즐기고 싶어서 그런 건 아니지? 실은 누구와 약속이 있었다거나.”
그래서 사이나는 괜히 장난스럽게 말했다.
“아, 아니야!”
과한 부정에 오히려 더 의심스러워졌지만…….
“아니라고!”
사이나는 피식 웃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그럼 부탁할게.”
그들은 마찬가지로 유리의 안내를 따라 사람이 없는 길을 걸어 마차 대기소 쪽으로 향했다.
거의 다 도착했을 때 유리가 말했다.
-감시의 눈이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