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9화. 쓰레기들이 날뛰는 밤
“공작께서 한 영애분과…….”
애버딘 공작 쪽에도 감시의 눈은 당연히 붙어 있었다.
그런데 그쪽에서 급히 보고를 해 오길, 공작이 어떤 영애와 함께 홀을 빠져나갔고 2층 쪽으로 향하고 있다고 했다.
2층은 보통 야회에서 눈 맞은 남녀가 밤을 보내러 가는 곳인 만큼, 오늘 밤을 보낼 여성을 벌써 찾아낸 것이 분명했다.
기가 찰 일이다.
지금 공녀 쪽 무대가 막을 내리지도 않았는데 벌써 2막이 시작되어 버렸다. 2막 등장인물인 애버딘 공작의 제멋대로인 행동으로 말이다.
애초에 엘리자베스와 공작 사이에 어떤 합의가 있었던 것은 아님에도 불구하고, 직접 배역을 배정하고 또 몰입을 해서인지 그녀는 혼자서 배신감을 느끼고 있었다.
‘여성들과 잘 지낸다더니, 빠르기도 하지.’
애버딘 공작은 다수의 여성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만큼 바람기가 꽤 있는 것 같아 보였지만, 나쁜 말을 하는 여성들은 또 거의 없는 신기한 평판을 가진 자였다.
여성 편력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없는 것 같기도 하달까?
‘하…. 빌어먹을 바람둥이.’
하지만 일이 이렇게 되자 그녀는 바로 바람둥이라고 그를 규정지었다.
그렇지 않아도 잊지 못할 밤을 선사해 줄 텐데 그새를 못 참고 이따위로 행동하다니, 짜증이 치밀었다.
“어찌할까요?”
“잠깐…….”
생각 좀 하자.
플로리아 공녀 쪽도 중요하지만, 애버딘 공작 쪽도 중요했다. 아니, 엘리자베스 본신의 안위를 위해서는 후자 쪽이 훨씬 더 중요했다.
그러나 공녀 쪽도 허투루 할 수는 없었다.
일이 틀어졌을 때 황자가 뿜어낼 분노도 문제지만, 두 사건의 연계성 때문에도 공녀는 반드시 황자 앞에 바쳐져야만 했다.
‘어쩌지? 뭐부터…….’
그런데 마음이 조급해서인지 대책이 떠오르질 않았다.
‘플로리아에게 곧 반응이 나타날 텐데…….’
시간이 별로 없었다.
후, 별수 없다.
애버딘 공작이 침실에 들지 못하도록 할 방법은 없는 것 같으니까 차라리….
“별수 없네. 애버딘 공작과 그 여자를 ‘그 방’으로 안내해서 들여.”
“지금요?”
“응. 이렇게 쓰려고 한 건 아니었는데 어쩔 수 없지.”
‘그 방’은 사건이 적당히 무르익었을 때 엘리자베스 자신이 쓰려고 미리 세팅해 둔 방이다.
이미 남이 사용한 방에 들어가고 싶지는 않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감안해야만 할 것 같다.
방 안에 세팅된 여러 물품들 역시, 그들이 먼저 사용하게 되겠지만 공작을 놓치는 것보다야 나았다.
자신 덕분에 애버딘 공작과 이름 모를 영애는 아주 정신 나간 밤을 보내게 될 것이다.
“그 옆방은? 별일 없지?”
“예. 별일 없고 조용합니다.”
사실 ‘그 방’은 쌍둥이 방의 하나이고, 좌측 방이었다.
두 방은 똑같은 구조가 대칭으로 이루어져 있고 그 사이에 연결문이 있었다.
그리고 시종들은 모르지만 우측 방은 황녀를 위한 방이었다.
황녀 쪽은 자신이 어떻게 할 수 없어 황자가 직접 호출해서 처리하기로 되어 있었다.
황자가 황녀를 재워서 우측 방에 들여놓기로 했는데 지금 시간이 계획한 것보다 일러서 완료가 되었는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본래 계획은 이보다는 시간이 좀 흐른 후에(황녀를 먼저 처리하고 나서) 좌측방으로 애버딘 공작을 끌어들이는 것이었다.
이미 취한 공작이 연결문을 통해 우측 방으로 들어갔다가 치미는 욕구를 제어하지 못하고 자고 있던 황녀에게 몹쓸 짓을 하게 된다는 설정이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좀 다른 양상으로 전개될 것이다.
황녀의 자리를 엘리자베스가 대신할 생각이었으니 말이다. 애초에 그런 목적으로 황자에게 이것을 제안한 것이기도 했고 말이다.
물론 황자에게 보고할 때는 그렇게 말하지 않을 것이다.
공작을 끌어들이는 과정까지는 성공했으나, 애버딘 공작의 약 기운이 생각보다 너무 빨리 도는 바람에 그가 미처 빠져나가지 못한 자신을 덮치고 말았다, 이런 식이 될 것이다.
황자는 황당해할 것이고 또는 분노할지도 모르겠으나 이미 사건이 그리 벌어진 것을 어쩌겠는가.
황자에게는 공녀를 덮친 잘못이 있고, 공작에게는 헤베타를 덮친 잘못이 있게 될 테니, 결국 양쪽 다 할 말이 없게 될 것이다.
그러니 자신은 반드시 피해자로 남아야 한다. 그것이 가장 중요했다.
‘그래야 안전해.’
거기다 만약 이 밤을 통해 애버딘 공작의 애라도 임신하게 되면…….
엘리자베스는 성공적으로 황자를 벗어나 공작부인이 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없는 애라도 만들어야지. 이 정도면.’
일석삼조의 계책이다.
반드시 성공시켜야만 한다.
다시금 엘리자베스는 결의를 다졌다. 하지만 지금은 당장 더 급하게 처리할 일이 있었다.
“공녀는 어느 쪽으로 갔지?”
“휴게실 쪽으로 가는 듯 보였습니다.”
1막을 먼저 끝내야 2막을 원활하게 진행할 수 있다.
오라비와 달리 공녀 쪽은 좀 속 썩이지 않고 잘 행동해주길 바라며 엘리자베스는 발걸음을 서둘렀다.
* * *
-아이고야, 벌써부터 아주 후끈하네.
황성에서 열린다고 해도 역시 야회는 야회였다.
이곳저곳을 거치며 못 볼 꼴을 벌써 몇 번이나 보게 된 유리가 혀를 찼다.
확실히 일반 연회와는 감도는 공기의 무게부터가 다른 기분이다.
어딘지 모르게 야릇하면서도 들쩍지근한 공기. 들뜬 것 같으면서도 나직한 사람들의 목소리와 눈빛.
단체로 약이라도 먹은 것처럼 고삐를 놓아버린 사람들이 많았다.
그마저도 신기하게 보였던 과거와 달리 지금은 그저 역한 마음이 들었다.
흥청망청 풀린 눈과 몸을 하고서 파티를 즐기는 것처럼 보이지만 은연중 또 누군가의 인생을 망치고 있는지 또 누가 알겠는가.
“어이, 아가씨. 같이 방에 들어갈 파트너를 찾고 있나 봐?”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놈팡이 하나가 또 꼬여 들었다.
눈에 띄지 않게 행동하느라 구석지게 이동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랬다.
일부러 외진 곳들을 찾아다니는 자들이 따로 있는 것일까?
한 놈도 아니고 벌써 두 놈째였다.
“내가 아주 끝내주는 밤을-”
-하, 그래. 끝내주마. 이 밤을.
물론 걸리기가 무섭게 유리에 의해 멱살이 잡혀 끌려 나갔지만 말이다.
“-어어억?!”
유리에 의해 치워진 자들이 어떤 결말을 맞이했는지는 모르겠다. 사이나는 어련히 알아서 잘 처리(?)했지 싶어 묻지도 않았다.
-쓰레기가 끝도 없네, 끝도 없어.
저런 자들은 이런 연회에 참석하는 것만으로 모든 것이 다 용서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희한하게도 본인이 그러니 남들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 제어력은 옅디옅어지고 죄책감은 당연하게도 존재하지 않았다.
‘이곳에서 일어난 일은 이곳에 묻고 간다.’는 암묵적인 룰을 끝내주게 잘 지키는 사람들인 것이다.
-하, 누가 또 오네. 진짜 이것들을…….
그리고 그런 자들은 끼리끼리 모이는 것인지, 누가 알려주지도 않은 음지로 잘도 알아서 모여들었다.
-끝이 없구만, 아주. 너 약간 더 뒤쪽으로 들어가 있어. 처리하기도 귀찮다.
이곳은 사이나가 궁극적으로 가고자 하는 아래층으로 우회하기 위해 선택한 복도다. 우회하기 위해 고른 만큼 인적이 드문 구석 복도이기도 했다.
물론 이쪽까지도 침실이 있기는 하지만 굳이 이 구석방까지 올 필요가 있는 것일까.
그냥 밤을 보내는 목적 외에도 무언가 구린 구석이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닌지, 의심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음? 심지어 이번엔 한 놈도 아니네.’
멀리서 보이는 그림자가 여럿이었다. 저들은 또 뭐람?
-뭔가 좀 이상한데?
둘도 아닌 셋.
그리고 실루엣을 보니 남자 둘이서 중간에 여자 한 명을 부축해서 이쪽으로 오고 있는 듯 보였다.
갑자기 등 뒤가 서늘해지는 이 느낌은 뭐지?
-허?
뭔가 찜찜한 기분이 든 것은 사이나뿐만이 아닌지, 유리가 그들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
-잠깐, 저 새끼?!
그리고 사이나와 유리는 동시에 그를 알아보았다.
아니, ‘그들’을…….
-하! 죽여 버린다!
갑작스럽게 맞이한 충격적인 상황, 충격적인 대면에 사이나의 심장이 떨어졌다.
동공이 확장되고, 시간마저 멈춘 듯했다.
‘…저 남자는……!’
그녀의 의식이 과거 끔찍했던 날의 아침으로 순식간에 끌려들어갔다.
사람들의 칼날 같던 목소리, 깨질 것 같던 머리, 붉은 와인, 두통, 낯선 침대.
그리고… 그녀의 양옆에 있던 두 남자.
나락을 선사했던, 두 남자의 낯설면서도 익숙한 낯짝이 시야 안에 다시 펼쳐진 것이다.
사이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지워버리고 싶었다.
망막에 맺힌 당장의 이미지를,
눈앞에 아른거리는 과거의 기억 자체를 말이다.
하지만 그들은 실체였다. 단순한 의지로는 지워버릴 수 없는 실물로 지금 현실에 존재했다.
결국 그녀는 다시 눈을 떠야 했다.
‘원래 알던 사이였구나.’
조지 홀랜더와 한 남자.
저들은 과거 악몽 같았던 아침을 선사했던 두 명과 정확하게 일치했다.
그리고 지금, 그 둘은 그때처럼 가면무도회에 참석해 어떤 여성을 데리고 침실로 향하고 있었다.
오늘의 피해자는 저 여자인가.
당혹스러움과 충격이 좀 가시자, 묵직한 분노가 서서히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
-사야, 너… 괜찮아?
“가만 놔두고 싶지 않아.”
-뭐?
“저들에게… 본때를 보여주고 싶어. 유리야.”
-당연하지.
누가 봐도 저들은 나쁜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뭔가 이상한 것을 먹인 것인지 중간의 여성은 이미 제정신이 아닌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단순히 술에 취한 여성을 도와 휴게실에 데려다주려는 것이었다면 시녀를 불렀을 것이다. 그게 아니더라도 굳이 이 구석진 곳까지 데려올 일은 없었다.
당당하게 가면까지 벗어버린 것을 보니 더 어이없었다.
-다시는 저런 짓을 못 하게 해줘야지.
사이나는 그간 열심히 연습했던 무기를 드디어 사용할 때가 왔음을 느꼈다.
손가락에 찬 반지 한 개를 천천히 쓰다듬으며 그녀는 발걸음을 디뎌 앞으로 나왔다.
멀찍이 기둥 뒤 그늘 쪽에 있던 사이나가 몇 걸음 나오자 조지 홀랜더 측에서도 그녀의 존재를 눈치챘다.
“거기 누구……. 어, 웬 여자야?”
“호오. 여기서 밤을 보낼 파트너를 찾는 중이었나 본데?”
“그런 건가? 하하, 아가씨. 잘되었네. 이쪽에 합류하면 딱이겠어.”
왼쪽 남자가 부축하고 있던 여자를 조지 홀랜더에게 넘기고 헤벌쭉 웃으며 사이나 쪽으로 왔다.
사이나는 그 꼴을 물끄러미 보다가 천천히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