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8화. 희극과 비극의 관점
‘가면무도회 따윈 다시는 참석하지 않으리라 했었는데…….’
이런 것도 감회라고 표현해야 하나?
사이나가 느끼는 것은 그런 복잡함이었다.
그게 얼굴에 드러났나 보다. 콘스탄틴이 깊어진 눈매로 그녀를 살피고 있었다.
사이나는 저도 모르게 굳히고 있었던 얼굴을 풀며 슬그머니 웃었다.
“조금 긴장했나 봐요. 괜찮아요.”
괜찮다는 말에도 그는 여전히 사이나를 묵직하게 들여다보았다.
어째선지 그 역시 복잡해져버린 낯을 하고 있었다.
“걱정 않으셔도 돼요. 이래봬도 저 역시 맹약자 아닌가요.”
그 낯이 복잡한 이유가 자신을 걱정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 사이나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가끔….”
하지만 무게감 있는 표정은 풀리지 않았다.
“그대가 내게 오롯하게 기대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그는 천천히 손을 뻗어 그녀의 턱을 슬쩍 쥐었다.
“반면….”
그 손가락은 느릿하게 턱을 쓸며 올라가 볼의 동그란 부위를 누르듯 감돌고 나서 다시 귓가로 이동했다.
“그대의 안위를 위해서는… 다행이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귓바퀴를 따라 손가락이 곡선을 그리는 동안, 그의 입술이 천천히 귓가로 다가왔다.
“이 모든 일이 끝나면…….”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한숨처럼 그녀에게 뿌려졌다.
“외부의 어떤 것도 신경 쓰지 않고 둘만, 있어야겠습니다.”
그의 입술이 말을 할 때마다 귓바퀴에 닿았다 떨어지며 예민한 부위를 자극했다.
“그대의 눈 안에… 다른 어떤 걱정이나 생각보다, 나만이 담기도록, 오래도록 그렇게 말입니다.”
“읏….”
“침실에서 내보내지 않을 겁니다.”
또다시 상황을 잊고 사이나는 그의 목소리와 눈빛에 빠져드는 기분이었다.
“그러겠다고 해줘요.”
마차가 멈추는 느낌이 났다.
“흣, 네…….”
사이나는 점차 감각이 이성을 잠식하는 기분이 들어 얼른 대답했다.
“분명 그러겠다고 대답한 겁니다.”
확실한 약속을 받아낸 그가 나른하고 길게 웃었다.
“맞지요?”
덕분이랄까. 좀처럼 빠지지 않던 몸의 긴장감이 느슨해졌다.
설마 처음부터 이를 노리고 그런 것일까?
고맙기는 한데…….
사이나는 그를 갸름한 눈으로 응시했다.
“사야? 내려야지요?”
고마우면서도 왜 새침한 기분이 드는 것일까.
사이나는 일어나려다 말고 털썩, 그의 무릎에 앉아버렸다.
“…사야?”
“얼마나요?”
“……예?”
그녀는 가느다란 두 팔을 느릿느릿 그의 목 뒤로 감으며 속삭이듯 말했다.
“얼마나, 침실에서 안 내보낼 건데요?”
“…….”
“이틀?”
그 목소리는 마치, 그날을 기대한다는 것처럼 아주 달콤하게 마차 안을 울렸다.
“아님 사흘?”
그녀의 도발에 인내심이 끊겨 나가는 것 같은 한숨 소리가 그에게서 새어 나오더니.
“하.”
순식간에 그가 그녀를 당겨 입술을 붙여왔다.
진득하게 붙어오는 입술에서 뭉근한 소유욕이 묻어났다.
“일부러, 하아, 이러는 겁니까?”
“으응.”
“꼭 이런 날에 날 자극하지 않습니까.”
매번 의도한 건 아니다.
그저 그에게 발끈하게 되는 순간이 몇 번 있었을 뿐.
그는 당장 마차를 돌려 저택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표정이었으나, 가까스로 참아냈다.
그럴 만한 때도 장소도 아니니 별수 없었다.
“사흘론 턱도 없습니다.”
“……네?”
“최소 일주일은 필요할 것 같군요.”
대신 엄청난(?) 약속의 말을 남기고 나서야 그는 몸을 일으켰다.
“각오하도록 해요, 사야.”
“…….”
둘은 차림새를 정돈하고 마차에서 내렸다.
내리기 전에 가면을 쓰고 커다란 후드를 걸쳐 입었다. 안쪽의 옷차림을 숨기기 위해 미리 챙겨온 전신 후드였다.
‘……음?’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시선이 들러붙는 것이 느껴졌다.
사실 이럴까 봐 일반 마차 대기 줄로 몰래 들어올까 하는 생각도 해 보았으나, 따져보니 그쪽은 정문에서 보안 체크를 거쳐야 해서 결국 매한가지였다.
어떻게 왔더라도 감시자를 피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느니 편하게 입성한 이후, 내부에서 시선을 따돌리는 편이 낫다고 판단했고, 예상이 맞아 떨어졌다.
“어느 상황에서도, 안전이 최우선입니다. 무리하지 말아요.”
“네. 당신도요.”
작은 목소리로 서로에게 당부의 말을 남기고 사이나와 콘스탄틴은 갈라졌다.
각자의 역할을 위하여.
“-유리.”
콘스탄틴과 찢어지기가 무섭게 사이나는 유리의 이름을 불렀다.
욜리가 아닌, 인간형 유리.
-사야.
마차에서 내린 무리 여럿이 인파를 이루고 있었는데, 그 사이를 파고들며 사이나는 유리를 불러내었다.
덕분에 얼핏 보면 인파 중 누군가가 사이나에게 따라붙은 것처럼 보일 것이다.
유리는 그녀의 곁에서 파트너인 척도 하고, 쓸데없이 달라붙을 수 있는 남자들을 차단하는 동시에 그녀의 조언자 역할을 함께할 예정이었다.
-그래서 이제 뭘 하면 되는 거야?
“우선은…….”
사이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움직여야지.”
들러붙은 눈을 떼어내려면 좀 움직일 필요가 있었다.
몇몇 인파를 비집고 지나가며 눈 몇 개를 떼어낸 사이나는 외곽으로 빠졌다.
연회가 열리는 건물 벽을 따라 걷다가 모퉁이를 돌자마자 공중으로 몸을 띄웠다. 물론 유리의 힘이었다.
2층 테라스를 통해 내부로 들어서자 초반에 달라붙었던 눈은 모조리 떨어져 나갔다.
테라스 아래에서 갑자기 사라진 그녀를 찾아 우왕좌왕하는 인기척을 느낄 수 있었다.
“자, 들어왔네. 이제 약속한 사람을 만날 시간이야.”
사이나는 조용히, 눈에 띄지 않게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 * *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엘리자베스는 손가락 사이에 끼운 샴페인 잔을 나긋하게 흔들며 미소 지었다.
계획대로 일들이 잘 풀려가고 있는 모습을 보니 당장에라도 이 잔을 들이켜며 축배를 들고 싶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아직은…….’
그러나 아직은 아니다. 때가 되지 않았다.
그게 아니더라도 야회에서 대책 없이 술을 마시는 건 바보들이나 하는 짓이다.
엘리자베스, 그녀부터 벌써 술에다 수작을 부릴 생각이 아니던가.
그녀는 다른 손에 들고 있던 손바닥 안의 작은 물약 병을 슬쩍 들여다보며 더 깊게 웃었다.
‘이걸로… 애버딘 공작을…….’
고귀한 공작가의 남매가 황가의 수중에 떨어지는 날이다.
그 상상을 하니 짜릿해지는 기분이라, 엘리자베스는 너무 티 나게 웃지 않으려고 표정을 관리해야 했다.
‘오, 좋아.’
보고받은 대로 주인공이 나타났다.
저 너머에서 분홍색 머리카락이 살랑거리는 것을 보니 다시금 기분이 좋아지는 기분이었다.
오늘 밤엔 엘리자베스, 자신이 주인공이 아니어도 전혀 불만이 없었다.
그 주인공은 자신이 설계한 무대 위의 등장인물일 뿐이니까.
‘역할을 잘 감당해주렴.’
오늘 무대의 대본은 이러했다.
플로리아는 가면무도회에 참석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다가 술에 취한다.
잠시 쉬기 위하여 그녀는 휴게실을 찾는데, 어지러웠던 탓인지 방을 잘못 찾고 만다.
하필 황자가 쉬고 있던 방에 찾아들고 말았던 것!
그것도 모자라 그녀는 술기운 때문인지 황자를 유혹하는데, 황자 역시 꽤 마셨던 참이라 둘은 일을 치고 만다.
어찌나 몰입했던지 피임을 할 정신도 없었더라.
열정적인 밤의 결과물로 떡 하니 임신을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면 위대한 제국의 유지를 잇는 고귀한 역할을 공녀가 감당하게 될 것이다.
뭐, 그런 결말이었다.
‘해피엔딩이 되었으면 좋겠네.’
주인공들에게도, 관객들에게도 모두 좋은 일 아니겠는가.
그런 즐거운 상상을 하며 엘리자베스는 건너편을 살폈다.
‘자, 우리의 주인공은 잘하고 있나 볼까?’
때마침 보게 된 장면에 엘리자베스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오? 마셨어!’
플로리아는 마차에서 내린 직후 레이디스 룸으로 향했다고 보고를 받았다.
홀에 입장하기 전 매무새를 살피기 위해 레이디스 룸에 먼저 들르는 일은 흔한 일이었다.
플로리아 역시 그랬던 건지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자 다시 나와 연회홀에 입장을 했다. 일찌감치 엘리자베스의 무대 안으로 들어온 것이다.
보고를 받고 플로리아를 찾았는데 처음에는 좀 당황했다.
보통 많이 쓰는 눈만 가리는 반가면이 아니라, 흔하지 않게 얼굴을 죄다 가리고 입 부분만 트인 온가면을 쓰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면의 이마 쪽에 작게 뿔 하나가 달려 있고 온통 백색으로 차려입은 것을 보니, 에렌혼 복장을 구현하기 위해 특수 제작한 가면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얼굴은 가렸다고 해도 트레이드마크나 다름없는 분홍 머리카락이 더해지니, 누가 봐도 애버딘가의 영애였다.
그 컨셉을 보니, 수호령 가문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한 모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얼굴을 몰라도 뻔히 누군지 알 것 같은 복장이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고 난 뒤, 그녀는 건너편에서 서빙을 했던 서버를 불러 플로리아의 음료 취향을 알아냈다.
‘샴페인을 드셨습니다.’
‘호오, 샴페인?’
같은 샴페인이라니.
역시나 축배를 들 만한 날인가?
엘리자베스는 즐거운 징조에 미소 지으며, 조금 특별한 샴페인을 서버에게 들려 보냈다.
자연스럽게 접근한 서버에게 플로리아는 들고 있던 빈 잔을 내려놓고 새 잔을 받아 갔다.
그리고 그것을 마시는 것을 마침내 보게 된 것이다.
‘됐다, 됐어.’
무대의 성공적인 종막이 성큼 더 가까워진 느낌이었다.
엘리자베스는 곧 홀을 떠날 것이 분명한 애버딘 공녀의 뒤를 잘 밟으라고 시종들에게 명하며, 슬슬 황자에게 알려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2막이 시작할 때지.’
2막은 희극이 아니라 비극이었다.
가련한 헤베타가 황자가 아닌 다른 남자에게 몹쓸 짓을 당하고 마는 비극.
난잡한 야회에서 무얼 주워 먹은 것인지, 이날 애버딘 공작은 상태가 좋지 않았다.
그저 인사나 할까 하여 다가왔던 헤베타를 강제로 깔아 눕히며 공작은 한껏 제 욕심을 취하고 만다.
헤베타의 몸으로 황자가 아닌 남자에게 몸을 허락할 수 없어 열심히 저항해 보았으나, 성인 남성(그것도 기사)의 힘을 이길 수는 없었다.
이성을 잃은 공작과 무참한 밤을 보내는 바람에 원치 않던 임신까지 하고 만 헤베타는 슬프게 울었다.
그 결과 그녀는 헤베타의 지위에서 폐하여졌고, 배 속의 아이 때문에 그녀를 강제로 범했던 남자와 새로이 결혼할 수밖에 없다는 그런 슬픈 이야기다.
“……헤베타님!”
엘리자베스가 비극의 여운에 잠겨 있던 그 때에.
한 시종이 급한 기색을 내비치며 다가왔다.
“무슨 일이냐.”
시종은 그녀 가까이 다가오더니 속닥속닥 보고를 했다.
“뭐? 애버딘 공작이?”
순조롭게 풀려가는가 했더니, 웬걸.
예기치 못한 소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