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7화. 대환장 파티를 향하여
“아직, 도착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 말을 들은 황자가 끼어들며 윽박지르듯 물었다.
“아직도? 네가 한눈팔다가 놓친 것은 아니겠지?”
“…고위 귀족 전용 라인에는 아무런 마차도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시종은 식은땀을 흘리며 대답했다.
엘리자베스는 오늘 연회 시작 전부터 일찌감치 곳곳에 감시의 눈을 심어두었다.
그것은 참석자가 입성하여 마차에서 하차하는 영역부터 이미 시작이었다.
애버딘 공녀와 공작의 움직임을 처음부터 발견하고 제어하기 위해서다.
“일반 마차 쪽은?”
“…예? 그쪽은…….”
“양쪽 다 살펴야 할 거 아니야! 멍청한 것. 일일이 다 지시를 해주어야 하느냐!”
황자는 버럭 화를 냈다.
공작가가 일반 마차 라인으로 들어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화를 내는 것은 아니었다.
고위 귀족이 자신의 특권을 포기하고 굳이 줄을 서고 기다려서 입성하는 것은 황자의 개념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혹시 모를 경우의 수로 인함이다.
저번 연회 때 보았던 새 맹약자가 크레이머가의 마차를 타고 올 수도 있지만, 계속 제 정체를 숨기려 한 것을 보면 일반 마차를 타고 들어올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선택지는 많을수록 좋은 것이다. 미리미리 준비해 두어서 나쁠 것은 없었다.
참석 자체를 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역시나 하지 않았는데, 마찬가지로 황자의 개념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 그랬다.
황가에서 여는 파티에 초대장이 없어서 못 올 수는 있어도, 있는데 안 오는 사람이 있을 거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하는 까닭이었다.
“다, 당장 지시하도록 하겠습니다.”
“벌써 들어왔으면 어쩔 거야! 엉?!”
황자는 화가 나서 시종을 걷어차며 윽박질렀다.
“크헉, 이미 들어온 사람들 쪽도 다 살피라고 하겠습니다!”
“하아. 이 멍청한 것들을 데리고 무슨 일을 할까. 당장 나가봐! 비슷한 사람이라도 발견하거든 당장 꼬리를 붙이고 내게 알리도록 해! 알겠나?!”
“예, 예!”
사실 애버딘 공녀가 어떤 복장을 하고 올지, 미리 정보를 입수할 수 있었다면 가장 좋았겠지만, 실패했다. 이번엔 평소에 맞추던 의상실이 아니라 다른 곳을 이용했는지 알아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렇게 일일이 살피는 수밖에 없었다.
이쪽에서 움직이기 편하도록 여러 연회 중에 가면무도회를 열기로 결정은 했으나, 가면을 쓰고 컨셉 복장을 착용하면 알아보기가 힘들다는 단점이 있었다.
그리하여 이들은 황제궁과 헤베타궁의 인력 대부분을 있는 대로 동원하여 처처에 깔아둔 상태였다.
“흐응. 좀 늦네요. 근데 고위 귀족들일수록 보통 입장이 늦는 편이니 약간만 더 기다리면 나타나지 않을까 싶어요.”
“긴장을 놓지 말고 잘 살펴보도록 해. 특히 여성 휴게실이나 레이디스룸은 아무래도 살펴보기 어려운 곳이니 그 전에 잘 제어를 하고. 오늘 네 역할이 중요하다.”
“네. 밑 준비는 제가 잘하고 있어요. 이 무도회 전반을 계획한 것도 제가 아닌가요. 너무 걱정 마세요.”
엘리자베스는 오늘 봄의 여신으로 분한 상태였다.
하늘하늘한 드레스는 여리여리한 체형을 강조하면서도, 손짓 한 번에 사르르 벗겨질 것 같은 통직물 디자인이라 해사하면서도 야릇한 반전미를 풍겼다.
거기에 라임 블론드, 머리 위에 얹은 화관, 나비 형태의 반가면이 아주 잘 어울렸다.
게다가 상냥하게 미소까지 짓고 있으니, 외모만 보아서는 누구에게 어떤 해도 끼치지 않을 사람처럼 그렇게 화사하고 부드럽게만 보였다.
“무대가 완성되면 바로 연락을 드릴 테니 몸만 오시면 되어요, 전하.”
“알겠다. 너를 믿고 있으마.”
엘리자베스의 부드러운 말투와 태도 때문일까. 좀 진정을 했는지 황자가 누그러진 말투로 대답했다.
이번 헤베타는 그의 비위를 아주 잘 맞춰서 마음에 들었다.
침대 위에서도 꽤 만족스러운 편이었다. 시키는 것도 잘하거니와 안 시키는 것까지 알아서 잘하니 그냥 내치기엔 좀 아까웠다.
“이번 일이 잘되면 네 공로를 잊지 않겠다. 네가 비록 임신은 못 했으나 내가 황제가 되면 법을 뜯어고쳐서라도 황비로 들여 주도록 하마.”
저런 말에 진심으로 감사할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여태 굳건하던 엘리자베스의 미소가 살짝 삐끗했으나, 황자는 눈치채지 못했다.
“…감사해요, 전하.”
엘리자베스는 살짝 발끈하고 만 스스로를 추스르며 재차 다짐했다.
‘어떻게든 애버딘 공작을 자빠뜨려야 해.’
그래야 저 지긋지긋한 황자에게서 벗어날 수 있어.
다시금 지난날의 잘못된 선택에 고개를 저으며 엘리자베스는 마음속으로 결심했다.
같은 자리에서 각자 다른 꿍꿍이를 꾸미는 자들.
동상이몽이 따로 없었다.
* * *
한편, 마차 안에서 투덜투덜 거리는 남녀가 있었으니.
“아, 왜 이리 줄이 길어-! 지겨워 죽겠네. 오빠! 초대장을 받아온 김에 입장 혜택도 받아왔으면 좋잖아!”
“초대장만 해도 나나 되니까 받아온 줄 알아! 이번 연회가 얼마나 인기였는지 알기나 하냐!”
이들은 같은 성을 쓰는 남매였다.
조지 홀랜더와 조아나 홀렌더.
한때 사이나의 악몽과도 같았던 두 사람이 가면무도회에 입장하기 위하여 대기 중이었다.
“칫, 전 약혼자를 버리고 헤베타가 되었으면서 이 정도도 못 해준대?”
“너나 잘해, 이 멍청한 것아!”
이번 연회는 아주 좋은 기회였다.
“그냥 생각 없이 놀 생각만 하지 말고, 괜찮은 놈 있으면 낚을 생각을 해! 황궁에서 열리는 가면무도회가 어디 자주 오는 기회인 줄 아냐?”
이런 야회는 하급 귀족들이나 드글거리는 게 보통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무도회는 아주 특별했다. 야회임에도 황궁에서 열리는 바람에 고위 귀족들도 대거 참석하지 않는가.
“이 오라비가 좋은 사업 아이템이 있는데 투자금이 없어서 지금 빛을 못 보고 있는 거 몰라!? 이럴 때 네가 도움이 되는 혼처로 딱 잡아올 생각을 왜 못 해?”
“알았어. 그렇지 않아도 찜해놓은 영식이 몇 있지.”
“누군데?”
조아나는 속살거리며 몇몇 남성의 이름을 늘어놓았다.
“흠, 괜찮네.”
조지는 이름들을 곰곰이 떠올려보더니 만족한다는 듯 여동생의 어깨를 도닥였다.
“근데 자신은 있어?”
“오늘을 위해 특별히 장만한 드레스야.”
조아나는 앞섶이 깊이 파인 드레스를 자랑하며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그런 드레스는 너만 입는 줄 아냐?”
야회에서 저 정도 노출의 드레스는 흔해 빠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멍청한 여동생의 수완이 못 미더워 타박을 하던 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는 품을 뒤져 무언가를 꺼냈다.
“야, 이거….”
“응? 뭔데?”
이 물품은 그가 이 귀한 연회의 초대장을 얻을 수 있었던 이유였다.
‘조지, 네가 해 줄 일이 있어.’
‘내가? 뭘 원하는데?’
그는 얼마 전 비밀리에 만났던 엘리자베스와의 회동을 떠올렸다.
‘……가 필요해.’
어쩐 일로 만나자고 연락이 왔다 했더니, 의외의 물건을 구해달라고 부탁해 왔다.
부탁의 내용에 처음엔 조지 홀랜더도 놀랐으나, 이내 킬킬 웃었다.
‘또 뭔가를 꾸미는 모양이네?’
그로선 그저 환영할 일이다.
엘리자베스가 이리 뒷공작을 꾸밀 때면 항상 재미있는 일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그로서는 곁에서 구경이나 하다가 뭔가 부스러기라도 떨어지면 주워 먹으면 되는 거고, 그게 없다 해도 즐거운 구경이라도 할 테니 나쁠 게 없었다.
뭐, 이번 연회의 초대장이나, 여유로운 착수금 덕분에 자신의 몫으로도 몇 개 장만한 손안의 물품처럼, 언제나 남는 게 있다는 게 사실이기도 했지만 말이다.
“진짜 괜찮다 싶은 놈 있으면…….”
그는 여동생의 손아귀에 ‘그 물품’을 슬쩍 쥐여주었다.
“이걸 술에 타서 먹여.”
“어?”
“그리고 자빠뜨려.”
“뭐-어?”
그건 작은 물약 병이었다.
무색무취의 고급품으로 구해달라고 하여 애를 좀 써야 했다.
싸구려야 몇 번 사서 써보았지만, 이건 가격이 상당하여 그로서도 처음 써보는 것이었다.
“왜, 못 하겠어?”
이 비싼 것을 큰맘 먹고 주는 건데, 동생의 표정이 별로 좋지 않아 그는 빈정이 상했다.
“너 고만고만한 집안에 시집가서 낮은 신분에 빌빌거리며 살고 싶어?”
“아니…….”
“그럼 내 말 들어. 네가 솔직히 그 유명한 애크로이드 영애나 누구처럼 예쁜 것도 아니잖아. 그럼 다른 쪽으로 접근해야 할 거 아니야!”
“…….”
“세상은 결과가 중요한 법이야. 여차저차해서 너와 결혼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란 말이다. 고위 귀족들일수록 평판을 따지는 법이니, 우선 일이 벌어지면 뭐 어쩌겠느냐. 결혼을 할 수 밖에 없는 거지.”
제 오라비가 하는 말이 좀 이해가 좀 되기 시작한 듯, 조아나의 눈빛에 결연함이 깃들기 시작했다.
“응.”
“좋아. 잘 해봐.”
“알았어.”
“우선 이야기를 나누다가…….”
킬킬거리는 웃음소리와 함께 조지 홀랜더는 다른 집의 오라비라면 절대 여동생에게 하지 않을 것 같은 내용의 조언을 훈수처럼 늘어놓기 시작했다.
남들이 들으면 경악할 만한 내용을 조언이랍시고 여동생에게 알려주었고, 조아나는 또 그것을 아주 진지하게 새겨들었다.
기다리는 게 지겹다고 했던 것이 언제인 양, 마차 안에서의 대기 시간을 아주 알차게 보내는 남매였다.
* * *
상대적으로 조용한 다른 마차 안.
검은 흑목으로 만들어진 커다랗고 고급스러운 마차는 느지막이 황성에 다다랐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마차들을 제치고 안으로 먼저 입성했다.
공작가의 문양을 단 것만으로 내부 수색을 하지 않았고, 대기 없이 우선 입성이 가능했다.
마차에 표시된 공작가의 문양이 그것을 가능하게 했다.
제국을 위해 짊어진 의무가 많은 만큼, 이런 부분에 있어서는 확실히 혜택을 보고 있었다.
사이나와 콘스탄틴 부부였다.
“괜찮습니까?”
“네?”
“안색이 약간 창백한 듯한데.”
“…제가요?”
곧 내릴 준비를 하다가 그의 걱정 어린 질문을 받은 사이나는 잠시 스스로를 관조했다.
약간 경직된 기분이기는 했다.
폭풍우의 핵심을 향해 나아가는 것 같달까?
뭔가 묘했다. 무작정 나쁘다기보다는, 올 것이 온 것 같기도 하고, 기대가 되기도 하고, 걱정도 되고…….
딱 잘라 설명하기 힘든 그런 느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