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화. 독대를 청합니다
“아…….”
손님의 방문 소식에 황녀가 밝은 표정을 지었다. 근래 들어 본 가장 밝은 표정이었다.
“드디어 왔구나, 얼른 이리 모셔라!”
샤피로는 직접 움직여 문을 열고는 바깥손님을 응접실 안으로 안내했다.
“전하, 강녕하셨습니까?”
“어서 오시오, 크레이머 공작부인.”
손님은 사이나 크레이머였다.
황녀는 밝은 미소를 지으며 사이나를 소파에 앉히고는 얼른 차를 들여오라 명했다.
“전처럼 이름이면 충분합니다, 전하.”
“그리해도 되겠소? 나도 그게 더 친근하게 느껴져 좋긴 하오만.”
“그럼요. 사이나라 불러주십시오.”
이내 티세트가 들어오고 둘은 차를 마시며 먼저 가벼운 근황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러나 사이나는 황녀의 얼굴에서 뭔가 조급함을 읽어낼 수 있었다.
사이나가 입을 열 때마다 미세하게 무언가를 기대했다가 실망하는 기색을 보았던 것이다.
그걸 보아, 황녀는 분명 원하는 화제가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분명,
‘전에 그 가언과 관련한 것이겠지.’
사이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들어 황녀 뒤에 시립해 있던 헤비아탄 경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사이나? 왜 그러시오?”
“흠.”
헤비아탄 경은 원채 표정의 변화가 없는 편이라 그리 티가 나지는 않았으나 빤히 보는 사이나의 시선에 약간 의아해하는 기색이었다. 황녀 역시.
“전하께서는.”
사이나의 시선이 움직여 이번에는 황녀를 직시했다.
“사랑하는 남자와 결혼하고 싶으십니까?”
황녀의 얼굴에 당황함이 떠올랐다.
“무, 무슨 소리요?”
“좋은 가문이나 혈통. 그런 조건과 상관없이 사랑하는 남자와 결혼할 수 있다면.”
“…….”
“그리하시겠습니까?”
황녀와 헤비아탄 경이 그런 사이라는 것을 사이나가 알고 있는지 몰랐을 것이다.
이번엔 헤비아탄 경조차 당황한 티가 났다.
“전하, 독대를 청합니다.”
그리고 사이나가 독대를 청하자 황녀와 샤피로의 당혹감은 더 진해졌다.
“안 됩니다.”
그리고 샤피로는 바로 반대했다.
사이나를 위험하게 여겨서라기보다는, 본래 그의 역할이 그러했다.
“전 단지 황녀 전하께 드릴 말씀이 있을 뿐이에요.”
“꼭 독대여야만 하오?”
“민감한 내용이라서요.”
황녀는 생각에 빠졌다.
“어떤 상황에서라도 혼자는 안 되십니다.”
샤피로는 다시 반대했다.
“한 마디만 들어보시고 바로 헤비아탄 경을 다시 들이셔도 됩니다. 일말의 만약을 위해서예요.”
어쨌든 이건 사이나 쪽에서도 부담을 짊어져야 하는 주제이니 말이다.
황녀는 사이나를 바라보며 잠시 고민하더니 헤비아탄 경에게 잠시 자리를 비워달라고 했다.
“하지만 전하.”
“괜찮다. 잠시만 나가 있도록 해.”
샤피로는 영 내키지 않는다는 표정이었으나 결국 문을 열고 나갔다.
문이 닫히고 둘만 남게 되자 사이나는 황녀의 귓가 쪽으로 고개를 숙이며 다가갔다.
“질문을 바꾸겠습니다.”
그리고 나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전하께서도 혹시 황태자가 되실 수 있다면, 어찌하시겠습니까.”
“……뭐라?”
황녀의 안색이 대번에 바뀌었다.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는 표정을 짓는 황녀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사이나는 다시 화제를 바꿨다.
“전하께선 초대제 바로 다음 황제의 이름을 혹시 아시나요?”
“2대 황제, 아이드라 맥페이든을 모르는 제국민이 있겠는가.”
“맞습니다. 그리고 그 황제는 초대제의…….”
사이나는 싱긋 웃으며 덧붙였다.
“딸이었죠.”
“…뭐?!”
2대 황제의 업적은 유명했다.
초대제가 혼란했던 시대를 정리하고 제국을 세우기는 했으나, 천년 제국의 기틀을 다진 것은 아이드라 황제라고 역사는 말한다.
그래서인지 초대제를 ‘건국의 아버지’, 아이드라 황제를 ‘제국의 아버지’라고 부르고는 했다.
제국의 아버지라니. 어떤 의미로는 건국의 아버지보다 더 인정해주는 표현이 아닌가.
근데 그 제국의 아버지가 실은 여성이었다니.
“…딸이라고? 여황이란 말인가?”
“네.”
황녀조차도 믿기지 않는 얼굴이었다.
“…….”
“맥페이든 력 3-400여 년까지만 해도 여황이 꽤 많았습니다. 당시만 해도 계승의 증거는… 황자뿐 아니라 황녀에게도 나타났죠.”
“…하, 정말인가?”
“네. 황실의 계보에는 황제들의 이름이 모두 기록되어 있지요. 하지만 역사에 남는 황제의 이름은 보통 승하 이후 업적에 따라 다시 지어지는 것. 여성의 이름이 아닌 황제의 시호(諡號)만이 남습니다.”
그리고 황제의 시호는 고대어인 아를어에서 그 뜻에 맞춰 지어지기에 여황이라고 해서 여성적인 느낌을 풍기지 않는다.
그렇기에 역대 황제의 이름만 보고 남녀를 구분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하지만 계보엔 황제뿐 아니라 반려의 이름도 함께 적히기 마련이죠. 혈통을 구분하기 위한 거니까요. 황후 쪽 이름을 보니 오히려 티가 나더군요. 제국 초기엔 누가 봐도 남자 이름인 경우가 꽤 있었습니다. 이 경우엔 국서라고 해야 맞는 말이겠지만요.”
서탑에 간 것은 이를 확실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맥페이든 제국의 초기에 해당하는 공작들의 비망록.
공작들은 개인의 승계사 외에도 당시 제국의 정세나 기록할 만한 가치가 있는 사건들(예를 들어 국혼이라든가 즉위식, 황족의 출산, 특정 가문의 흥망성쇠 등)에 대해 적어둔 경우가 많았다.
그런 기록을 통해 몇 대 황제가 여황이었는지 확실하게 구분할 수 있었다.
크레이머 역대 공작들의 비망록을 증거로 보일 수는 없으나, 거짓은 아니니 황녀가 원한다면 분명 알아볼 방도가 있으리라.
“제 생각이지만 황족만이 볼 수 있는 황실 족보가 따로 있을 것 같아요. 황실 비망록이라든가, 제국 실록 같은 것이 분명 있을 겁니다.”
크레이머가에 그런 것이 있다면 황가에도 있을 것이 분명했다.
또한 황성 도서관에 모든 책이 다 있지 않을 것이라는 건 누가 추측해도 뻔한 것이었다. 어딘가 비고가 따로 있을 것이다.
“흠.”
사이나의 말에 생각나는 것이 있는지 황녀가 뭔가를 떠올리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게 사실이라고 한들, 역사적 사실만으로 내가 계승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 않나.”
제국의 황태자의 조건은 명확했다.
‘계승의 증거’를 보이는 자.
그런 자만이 황태자가 될 수 있고, 또한 황태자만이 황제가 될 자격이 있었다.
외부에는 회임 자체가 ‘계승의 증거’라고 알려져 있지만 이리되고 보니 아닐 수도 있겠다 싶었다. 실제로 그 증거가 무엇인지는 황족만 아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크게 상관은 없을 것이다.
사이나는 그저 생각했다. 황녀는 해낼 수 있을 것이라고.
왜냐면 그녀에겐 사랑하는 남자가 있으니까.
“초대제가 황후 한 명으로 제도를 고정해버린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시나요.”
“죽은 부인을 지극히 사랑했다더군.”
“그렇죠. 그건 매우 널리 알려진 사실입니다.”
초대제에 관한 역사, 이야기는 너무 흔해서 오히려 사람들이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누구도 그것을 계승의 조건과 이어 생각하지는 않고 있지요.”
“…무슨 뜻이지?”
사이나는 황가의 가언에 대해 알아낸 것을 설명했다.
“사랑이에요, 전하.”
유일하고 지극한 사랑.
“황가의 수호의 힘이 점점 약해지는 이유는, 황가의 가언이 오역되었고, 또한 계승의 방식이 변질되었기 때문입니다.”
맥페이든 제국의 초중반과 달리 다들 수호의 힘이 약해졌다고 말한다.
마수의 범람이 점차 잦아지고 있었고, 국경 분쟁도 잦았다.
덕분에 4대 공작이 피를 흘려야 하는 경우가 더 많아진 것이다.
“아켈리온은 인간에게 감정을 배웠어요. 그리고 그것을 위해 기꺼이 수호령이 되어 주었죠.”
실제로 제국은 황제와 황후의 부부 사이가 좋았을수록 태평성대를 기록했다.
그 누구도 그 연관 관계에 대해 신경 쓰지 않았으나, 찾아서 연계해 보면 실제로 그러했다.
“나머지는….”
“…….”
“헤베타 의식. 거기에 방법이 있을 겁니다.”
헤베타 의식은 공개 의식이 아니다. 그렇기에 어떤 과정이 승계와 연동되는 절차인지는 모른다.
전에는 헤베타가 된다고 해서 무조건 황족이 되는 것은 아니기에 외부에 공개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실은 다른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차이점 역시 있을 것이다.
황녀는 하지 않고 황자는 하는 무언가.
거기서 갈래가 발생했다.
“그걸 찾아서, 행하세요. 그리고 계승의 증거를 가지십시오.”
“…….”
“저 역시 제국민. 저는… 이 나라의 수호가 지속되길 원합니다. 평온하길 원합니다.”
“…….”
“전쟁은 원하지 않습니다. 부모를 잃어버리고 우는 아이들이 없었으면 좋겠고, 늘어나는 마수들에게 피해를 받는 사람들이 더 많아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자라나는 동안 황녀는 자연스럽게 황제위의 자격에서 배재되었다. 아니, 배제라는 개념조차 없이 당연히 그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국무를 배워 할 줄 알았고, 제국을 위해 애써 일했다.
황녀가 부족한 것은 단지 ‘그녀에게도 자격이 있다.’는 그 자각, 하나뿐.
그리고 그것은 실제로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 지금, 끝이 났다.
실제로 황녀에게는 자격이 차고 넘쳤으므로.
최소한 황자에 비하면 더욱더 그러했다.
“그러니, 전하. 옳은 결정을 내려주시기 바랍니다.”
황자는 황제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 말은 차마 할 수 없었으나, 황녀 역시 알고 있을 것이다.
황녀가 황제위에 관심이 없다고 한들, 황자가 황제가 된 이후 딱히 그녀에게 후히 대해줄 것 같지는 않으니 말이다.
그는 철저하게 이기적인 성향의 사람이므로.
황녀에게 더 깊은 고뇌를 남긴 채, 독대는 끝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