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화. 각자의 최선, 각자의 계책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난 여자가 황녀를 보고 더 깜짝 놀랐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는지 황녀를 보았다가, 침대 옆을 보고 다른 하늘색 머리카락을 확인했다가, 다시 황녀를 보고는 벌떡 일어났다.
“화, 황녀 전하를 뵙습니다…….”
일어나고 보니 헐벗은 꼴이라 여자는 어설프게 몸을 가리며 움츠러들었다.
이쯤 되자 다른 여자들도 부스스 일어났다.
그리고는 마찬가지로 상황을 눈치채고 침대 밖으로 나와 예를 올렸다.
하나같이 부스스한 머리와 지저분한 자국이 잔뜩 남은 알몸인지라, 예는커녕 오히려 기분이 나빠지는 인사였다.
“모두 나가라.”
냉기 어린 황녀의 말에 여자들이 주춤거리며 바닥에 떨어져 있던 지난밤의 옷을 주워들고 대충 앞만 가린 채 방을 떠났다.
불똥이 튈 수도 있어 황녀는 시녀마저 내보냈다.
“오라버니.”
그러고 나서 황녀는 나직하게 황자를 불렀다.
“오라버니, 일어나십시오.”
아무리 제 오라버니라지만 별로 손을 대고 싶지는 않았던 황녀는 결국 침대 옆에 있던 협탁을 땅땅 두들겼다.
그제야 부스스 눈을 뜬 황자가 미간을 찌푸렸다.
“으, 물….”
황녀는 한쪽 탁자 위에 놓여있던 물병을 찾아 잔에 따랐다. 탁자 위에는 어제 마신 것으로 보이는 술병들과 안주, 정체를 별로 알고 싶지도 않은 약병들이 돌아다녔다.
황녀는 속으로 한숨을 삼키며 황자에게 물 잔을 건넸다.
꿀꺽꿀꺽 잔을 비운 황자가 비로소 정신이 드는 것인지 황녀를 보고 물었다.
“네가 여긴 어쩐 일이냐.”
“지금 밖에 무슨 소문이 도는지 아십니까?”
‘소문’이라는 단어만큼 요즘 그의 심기를 거슬리게 하는 것이 있던가.
“황자가 초대제의 유지를 무시하고 하렘을 차렸다고 떠들어대고 있습니다.”
맥페이든을 세운 초대제는 엄격하게 일부일처를 명시했다. 다른 나라와 달리 이 제국에는 후궁 제도 자체가 아예 없었다.
황자는 되레 화를 냈다.
“황족이 되어서는 저급한 소문이나 주워듣고 다니는 게냐!”
“소문이 아닌 것 같으니 문제 아닙니까.”
황녀는 황자궁에 오기 전에 헤베타 궁에도 미리 들른 참이다.
여자를 얼마나 들여다 놓았던지 황자의 침실에서 본 세 명의 여인은 우스울 지경이었다.
딱히 마음에 들지 않았던 헤베타 엘리자베스에게 연민이 들 정도였다.
“아바마마의 건강도 안 좋으신데-”
“그러니 내가 하루라도 더 빨리 계승을 하려고 지금 이러는 거 아니야!”
“하, 이게 맞는 방법이긴 한 겁니까?”
황녀는 황자가 아니다 보니 계승을 위한 교육을 따로 받지 못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황제가 이렇게 알려주었을 것 같지는 않아서 물었다.
“네가 뭘 안다고 나서길 나서! 여자로 태어나 편하게 산 너 따위가 계승의 고뇌가 뭔지 알기나 해?!”
황자는 들고 있던 잔을 아무렇지도 않게 황녀를 향해 집어 던졌다.
반사적으로 피하지 않았다면 얼굴에 맞았을 각도라 황녀의 안색이 단번에 변했다.
“오라버니!”
“입 닥치고 나가거라! 내 대신 일 처리를 좀 하고 있다고 네가 뭐라도 되는지 아느냐!?”
“…….”
“황녀면 얌전히 있다가 시집이나 가! 쓸데없는 소문을 주워듣고 다닐 시간에 어느 나라로 시집을 가야 제국에 도움이 되겠는지 고민이나 해라!”
어느 나라라니.
“…뭐라고요? 지금 저보고 타국인과 결혼하라는 겁니까?”
너무 어이가 없으니 화도 나지 않았다.
“그게 뭐가 나쁘더냐? 너 하나 보내서 국경 분쟁이 사라질 수 있다면 당연한 일 아니더냐? 황녀로 태어났으면 그 정도 의무는 당연한 것이야!”
“맥페이든은 제국입니다! 우리 제국이 언제부터 타국과 결혼동맹을 맺어야 할 정도로 약해졌다는 말입니까! 게다가 국경은 4대 공작이-”
“그게 문제 아니냔 말이야!”
황자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황실이 언제까지 공작 따위의 눈치를 봐야 하냔 말인가! 이 나라는 구조 자체가 잘못되었어!”
그럼 타국의 눈치를 보며 황녀까지 보내는 건 잘된 일이란 말인가?
게다가 황실은 4대 공작의 눈치를 보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제국을 위해 과도한 의무에 시달리는 자들이다. 그 정도 권리는 당연한 것이었다.
매년 공작가에서 흘리는 피가 얼마인데 그 정도 존중도 해주지 않는다면, 누가 제국을 위해 의무를 다하겠는가.
황녀는 어이가 없다는 눈으로 황자를 보았다.
“네 혼사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얌전히 신부 수업이나 받도록 해라. 감히 이 오라비의 일에 간섭할 생각 말고.”
“…….”
벽과 대화를 하는 기분에 황녀는 암담해져 왔다.
제 오라비라지만 어쩌다 저런 인식이 머릿속에 자리 잡게 된 것인지 도무지 이해가 되질 않았다.
황녀는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제국의 근본이 흔들리고 있었다.
* * *
황녀가 떠났다.
싸하게 가라앉은 표정으로 황자궁을 나서는 황녀가 멀리 떠나는 것을 보고 나서야 엘리자베스는 걸음을 움직였다.
‘지금이야.’
황자는 다수를 향한 열등감에 시달리고 있어 누군가 바른말을 할수록 더 반발을 하는 성향이 있었다.
황녀야 보나 마나 황자를 열받게 할 정도 바른말만 하고 갔을 테니, 엘리자베스에게는 지금이 최적의 타이밍이었다.
그녀는 입가를 살짝 끌어올리며 할 말을 다시 점검했다.
“전하.”
엘리자베스는 조심스럽게 황자의 침실 안으로 들어섰다.
“뭐야?”
황자는 테이블에 앉아 술을 따르다가 엘리자베스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눈을 치켜떴다.
황녀와 나눈 대화의 여파인지 얼굴에 불쾌감이 덕지덕지 남아있었다.
“어머, 전하. 여태 힘을 쓰셔서 피곤하실 텐데 빈속에 술을 드시다니요. 뭣들 하느냐! 당장 속에 편한 것들로 먹을 것을 들여라!”
엘리자베스는 바깥의 시종들을 타박하듯 외쳤다.
“후, 황자궁의 시종들은 왜 이리 전하의 심기를 못 맞추는지 모르겠어요. 딱딱 전하의 마음을 알아채고 행동할 줄 알면 얼마나 좋을까요.”
툭하면 아랫것들에게 화풀이를 하기 때문에 다들 몸을 사리느라 바쁜 것을 뻔히 알면서도 엘리자베스는 그렇게 말했다.
“흥. 멍청한 것들에게 무얼 바라겠나. 시키는 것이나 잘하면 다행이지.”
엘리자베스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입 안의 혀처럼 굴자 그래도 만족스러운지 황자의 안색이 풀어졌다.
황자는 간만에 제 헤베타를 예뻐해 줘야겠다고 생각하며 그녀의 허리를 감아 당겼다.
“어머, 전하.”
“이리 오너라. 내 바쁘긴 해도 너를 예뻐해 줄 시간은 있단다.”
“네. 감사해요. 근데 먼저 제 말을 들어주세요.”
말랑한 여체를 손에 쥐자 금세 헐떡이기 시작한 황자를 슬쩍 밀며 엘리자베스가 어르듯이 덧붙였다.
“제가 황자 전하를 위해 대책을 열심히 생각해왔단 말이에요. 네?”
“대책? 뭘 말이지?”
“전하께서는 정령력이 높은 여자가 필요하신 거잖아요.”
“그렇지.”
“저도 정령력 수치가 꽤 높았기에 충분히 전하의 기대에 부응할 수 있으리라 믿었지만, 애석하게도…….”
엘리자베스는 정말 슬프고 아쉽다는 얼굴을 하며 눈썹을 늘어뜨렸다.
“그러게 말이다. 내 너에게 거는 기대가 컸건만. 쯧.”
황자의 눈에 다시금 무능한 것을 볼 때의 경멸이 떠올라 엘리자베스는 속으로 살짝 발끈했으나 심기를 가라앉히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제가 생각해 봤어요. 이 나라에서 정령력이 높은 여성이 누굴까 하고요.”
황자는 말을 계속해 보라는 듯 뚱한 표정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맹약자의 직계 가족쯤 되면 보나 마나 정령력이 매우 높지 않을까요?”
황자의 표정이 더 일그러졌다.
황자도 이미 다 생각해보았던 문제다. 그래서 그가 새로운 맹약자를 그리 주시했던 게 아닌가. 새 맹약자가 여성이면 맹약자 본인을, 남성이면 직계 가족을 그의 곁으로 데려오려 했었다.
빌어먹을 크레이머 공작 때문에 일이 안 풀려서 그렇지.
“그걸 누가 몰라서-”
“애버딘 공녀요!”
그걸 누가 모르냐며 화를 내려는 황자의 말을 끊으며 엘리자베스가 다급하게 외쳤다.
“…뭐?”
“플로리아 애버딘 공녀 말입니다, 전하. 미혼에 얼굴도 예쁘고, 몸매도 훌륭하지 않습니까. 오라비가 맹약자니 정령력이야 볼 것도 없겠죠.”
“하지만 공녀지 않나!”
4대 공작가는 황자에게도 금역이었다.
당연히 공녀는 생각조차 해본 적 없었다.
“애버딘 공작이 어찌 나올지 몰라서 그래?”
그걸 계책이라고 가져왔냐는 듯, 황자는 한심하다는 표정을 짓기 시작했다.
크레이머 공작 하나와 대적하는 것도 이리 골치 아픈데 만약 둘이 동시에 그러기라도 해보라.
황자는 그런 상황을 그저 가정만 해도 울분이 치솟았다.
“그러니까…….”
하지만 엘리자베스는 묘한 표정을 하며 미소 지었다.
“그 공작이 항의를 못 할 상황을 만들면 되지 않을까요?”
“…뭐? 어떻게 말이냐.”
“공작도 같은 상황에 처하게 된다면, 무슨 낯짝으로 전하께 항의를 하겠어요.”
“…….”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은 황자가 잠시 멍해졌다.
“공작에게 여동생이 있듯이.”
엘리자베스는 슬쩍 눈치를 보기는 했으나 말을 멈추진 않았다.
“전하께도 여동생이 있지 않으십니까.”
속삭이며 새어 나온 목소리는 은방울처럼 낭랑했으나, 뱀의 속삭임 같았다.
“하-”
황자는 탄성처럼 한마디를 내뱉었다.
“하, 하.”
그리고 그 탄성은 이내 호탕한 웃음소리가 되었다.
“하하하하하!”
청순한 얼굴로 미소 짓고 있는 제 헤베타가 매우 마음에 들어 황자는 그녀의 어깨를 끌어안으며 킥킥 웃었다.
“아주 마음에 들어, 마음에 들고말고!”
황자궁에는 한참 동안 황자의 기꺼운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 * *
황녀는 근래 생각에 잠기는 때가 많았다.
표정이 심각하여 매번 무언가를 심각하게 고심하는 것 같았으나, 물으면 그저 웃기만 할 뿐이라 샤피로 헤비아탄은 속이 쓰렸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몸 쓰는 것뿐이니 듣는다고 해도 큰 도움이 되지는 않겠지만, 사랑하는 여자의 고뇌를 덜어줄 수 없다는 것이 상당히 슬프다고 그는 생각했다.
“전하.”
“…음?”
하지만 그는 그 씁쓸한 표정을 갈무리하며 입을 열었다.
“손님이 오셨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