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화. 분통 터질 만한 일
“음?”
-황자는 계승에 성공 못 해.
“…뭐?”
-내가 중년이 될 때까지도, 그는 맹약자가 되지 못했어. 그러니 애초에 포기하는 게 나을걸?
“…….”
어느 정도 짐작을 했음에도 욜리가 저렇게 말을 하자, 사이나는 멍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어, 아니, 그럼 제국은 어떻게 되는 거야? 당시 제국은 어떻게 되었는데?”
-뭐, 착실하게 망해갔지.
“…….”
어처구니가 없다 못해 허탈하기까지 했다.
“어쩌면 이번에 발견한 정보가 차라리 다행일지도 모르겠네.”
이게 맞게 가는 걸까, 하는 아주 약간의 불안감이 있었는데, 욜리의 말을 듣고 나자 그마저도 싹 사라졌다.
사이나는 후다닥 황성을 빠져나와 타운 하우스로 향했다.
그리고 콘스탄틴의 집무실을 찾아, 그간 알아낸 바와 새로운 제국의 가능성에 대해 설명했다.
“…그런.”
콘스탄틴 또한 꽤 논란 기색이었다.
“누구라도 길리언 황자보다는 나은 선택지죠. 근데 황녀 전하께선 이미 훌륭하시니.”
“맞아요. 전하께선 잘하실 거예요.”
그들은 황녀가 새로운 황제 후보가 될 수 있으리라 보았다.
물론 황녀 전하께서 원치 않는다면 아무 소용이 없지만, 그녀도 뭔가 생각이 있으니 사이나에게 가언을 문의한 게 아닐까?
사이나는 황녀와 있었던 일에 대해서도 콘스탄틴에게 공유했다.
“흠, 그렇다면 황자에 대한 발표는 잠시 보류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사실 황족이라는 신분상 어차피 엄청나게 큰 벌은 줄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렇다면 몰아서 아예 존재의 의미 자체를 사라져버리게 하는 것이 더 확실한 방법일 것.
발표가 보류되면 황자가 제 지위에 대해 더 확신하여 지금보다 훨씬 더 의기양양하게 굴 테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그냥 넘어가기엔 아쉽지.’
황자가 분통 터질 만한 일을 하나쯤은 선물해줘야 하지 않겠는가.
콘스탄틴은 약간 비릿하게 웃었다.
* * *
현재 황자궁은 개판 오 분 전이었다.
황자는 헤베타 궁에다 거의 하렘을 차렸다.
그 와중에도 황자궁에다 그러면 욕을 먹을 것 같았는지 여자들을 잔뜩 데려다 헤베타 궁에다 밀어 넣었다.
졸지에 엘리자베스는 시장 바닥처럼 여자들이 우글거리는 곳에서 살게 되었다.
“하…!”
분통이 터졌다.
온 황도에 소문이 가득했다.
황자가 계승을 못 해서 발악 중이라고.
길리언 황자는 그간 꽤 오래 자질 논란에 시달리고 있었다.
황제 대리자 자격으로 참석한 국무 회의에서 보여준 오성의 부족과, 잦은 헤베타 교체에 따른 계승의 불투명함, 황자궁 내 시녀와 하녀를 자주 건드린다는 소문 등.
거기다 이제는 하렘까지.
그러다 보니 자질 논란을 넘어 자격 논란의 경지까지 이른 것이다.
황제는 하늘색 머리카락에 은안이었다.
황가의 혈통은 대대로 하늘색 머리카락과 은안을 가진 황자를 통해 계승되었다.
그런데 길리언 황자는 눈동자가 은색이 아니라 재색이었다.
하지만 황자가 한 명뿐이라 다들 쉬쉬하며 가능성을 본 것인데, 역시나 황자가 그 결과를 내보이지 못하고 있으니 점차 그 의문이 커지고 있던 상황.
거기에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지난 연회에서 많은 귀족들이(다르게 말하면 거의 모든 황도 귀족이) 황자와 다리엘의 사건을 목격했다.
공식적인 발표는 나오지 않았지만, 당시 다리엘이 내지른 비명을 통해 상황을 추측하는 것은 전혀 어렵지 않았다.
제국에서 맹약자의 위치는 지고하다.
그런 맹약자까지 건드리려고 했다는 것에 물밑이기는 하나 황자에 대한 여론이 상당히 안 좋게 들끓는 상태였다.
사실 황자의 분통을 위해 콘스탄틴이 몰래 더 부추기기도 했다. 평소 행실이 워낙 좋지 않아서 살짝만 손을 얹었음에도 지나치게 효과가 좋기는 했지만.
결국, 황자의 눈 색이 은안이 아닌 이유는 사실 황가의 핏줄이 아니라서 그렇다는 소문으로까지 와전되었다.
이를 듣고 분개한 황자는 입이 싼 몇몇 귀족을 잡아다 분풀이를 했으나, 소문은 꺼지는 것이 아니라 더 불붙기만 했다.
황자는 광분을 하더니 씩씩거리며 방에 틀어박혔다. 또다시 계승을 핑계로 계집질에만 몰두하기 시작한 것이다.
“멍청한…….”
덩달아 엘리자베스도 소문의 대상으로 올라섰다.
황자가 헤베타에게 질렸다더라. 아니다, 실은 헤베타가 아니라 황제에게 여자를 대주는 목적으로 들어간 것이라더라. 여자 한 명당 엄청난 돈을 받고 있다더라.
쨍강!
그녀의 분풀이에 내던져진 꽃병이 가차 없이 깨져나갔다.
사실 엘리자베스가 헤베타가 된 것은 충동적인 결과에 가까웠다.
내심 엄청나게 무시했던, 또한 내심 매우 미워했던 사이나가 공작부인이 된 것을 보고 엘리자베스는 어마어마한 충격을 받았다.
사실 중앙 귀족으로 누가 헤베타 따위가 되고 싶겠는가.
하지만 공작부인보다 더 높은 자리는 황후가 되는 것밖에 없었다.
그런 와중에 엘리자베스는 황자가 중앙 귀족 중에서 헤베타를 구할 것이라는 소문을 들었고, 한번 시도해 보기로 한 것이다.
그런데 정령력 테스트에서 생각 이상의 결과가 나왔다. 황자가 반색을 하며 기뻐하는 것을 보고, 내심 기대했다.
여태 아무도 못 해낸 것을 자신은 해낼 수 있을 것이라고 말이다.
당시에는 마치 금방 회임에 성공해서, 금방 황자비가 되고, 오늘내일하는 황제가 승하하시고 나면 또 금방 황후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지금 자신을 보라.
‘이 무능한 것. 너도 지난 그 쓸모없는 것들과 별반 다르지 않구나!’
엘리자베스는 얼마 전 들었던 밑도 끝도 없는 황자의 비난에 분통이 터졌다.
‘어머, 요즘 황자 전하께서… 계승을 위해 ‘밤낮’으로 애쓰신다지요? 헤베타님께서는 괜찮으신가요?’
그것도 모자라 어제 참석한 티파티에서는 비웃음까지 샀다.
할 수만 있다면 저 멍청한 황자를 믿고 황성에 들어온 지난날의 자신의 목을 조르고 싶을 정도였다.
‘하, 어쩌지…….’
현재 자잘한 국무에다, 황태자비의 부재로 내정 쪽까지 담당하느라 황녀는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고 들었다.
그런데 황자라는 사람은 온종일 침실에만 처박혀 있다.
그게 아니더라도 황자는 심각하게 멍청하면서 헛된 자존심만 높아서 맞서선 안 될 자에게 자꾸 제 권위를 세우고는 했다.
황자가 황가의 핏줄이 아닐 수도 있다는 소문이 어쩌면 맞을지도 모르겠다고 엘리자베스는 생각했다.
‘헤베타들이 문제가 아니었던 거야. 문제는 황자였어.’
이러다가는 본인이 일곱 번째로 폐하여지는 헤베타가 될 판이다.
이득은 하나도 없이 손해만 보고 인생을 나락으로 밀어 넣게 된 것이다.
‘뭔가 대책이 필요해.’
이 상황에서 벗어나는 것과 동시에 폐물 취급을 받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이 뭐가 있을까.
엘리자베스는 심각하게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길이 보이지 않았다.
‘하, 나도 공작부인이 되었어야 하는 건데.’
와서 보니 황자도 그렇고 황족일지라도 공작에겐 마음대로 하지 못했다. 맹약자의 지위는 생각 이상으로 견고하면서도 존귀한 존재였다.
‘멀쩡한 미혼 공작이 있는데 대체 내가 왜 황자에게 접근했을까.’
진짜 후회가 막심이었다.
크레이머 공작 말고도 미혼 공작이 한 명 더 남아있지 않았느냔 말이지.
전심을 다해 유혹했으면 분명히 꼬실 수 있었을 텐데.
애버딘 공작은 여자를 좋아하니 그렇게 어렵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순진해 보이는 미소와 애교로 살살 녹였다가, 줄 듯 말 듯 하게 애태우면 남자들은 하나같이 애가 닳아서 넘어오곤 했다.
애버딘 공작이라고 뭐 크게 다르겠냐 싶었다.
헤베타에서 먼저 물러난 다음에 시도해 봐?
‘아냐, 변수가 너무 커.’
그냥 약혼녀도 아니고 헤베타다. 헤베타면 황자와 동침하는 게 기본이라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다.
자고로 남자들이란 딴 남자의 손이 탄 여자를 제 부인으로 들이는 것은 싫어하지 않은가.
손이 탔어도 그것을 남들이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은 천지 차이였다.
그러니 공식적으로 남의 손이 탄 여자를 공작부인으로 들일 것 같지는 않았다.
자기네야 온갖 짓을 다 하고 다녀도 부인을 들일 때는 그런 것을 따지는 것이 남자라는 족속이었다.
초조함으로 손톱을 물어뜯기 시작한 손끝에서 피가 배어 나왔다.
‘그렇다면…….’
엘리자베스의 눈이 번뜩였다.
* * *
‘황자가 하렘을 차렸다.’
황녀 매디얼 역시 결국 그 소식을 들었다.
너무 어이가 없고 믿을 수도 없어 그녀는 확인차 황자궁을 방문했다.
“황자 전하께서는 아직 기상하지 않으셨습니다.”
“지금이 몇 신데 아직도 기상 전이라고?”
“…계승에 힘쓰시느라 피곤하시어서……. 황녀 전하께서 방문하셨다고 말씀 전해 드리겠습니다.”
“아니, 문을 열어라.”
“하지만 전하께서 화를 내실 텐데요.”
“내가 책임지지. 문을 열도록 하게.”
“…예.”
시종이 황자의 침실 문을 열었다.
“윽.”
열자마자 불쾌한 냄새가 훅 끼쳐 들었다.
축축하고 질척한 밤의 냄새와 야릇한 느낌을 불러일으키는 향의 잔재가 뒤섞여 옅은 구역감을 불러일으켰다.
“…그댄 여기 있도록 해.”
황녀는 자연스럽게 따라 들어오려던 헤비아탄 경을 물렸다.
꿈틀대는 눈썹에서 그 결정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기색을 비쳤으나, 황녀는 말을 물리지 않았다.
보아하니 황자 외에 여자들도 있는 모양이라 샤피로를 데리고 들어갔다가 괜한 빌미를 잡힐 수 있었다.
“너, 따라오너라.”
대신 황녀는 한쪽에 있던 황자궁의 시녀 한 명을 지목하여 같이 들어갔다.
황자의 침대는 매우 넓었다.
장정 다섯도 충분히 잘 수 있는 너른 침상 위에 헐벗은 남녀가 엉켜 있었다.
황자 한 명에 여자가 셋.
굉장한 밤을 보낸 모양이다. 누가 들어왔어도 모르는 것이 뭔가에 잔뜩 취했거나 지나치게 진을 빼서 지친 상태로 보였다.
계승의 확률이라는 게 정사의 횟수나 여자의 수와 비례하는 것이 아닐 텐데?
황녀는 생리적 거부감이 치밀어 당장 방을 나가고 싶었으나, 애써 참았다.
“여자들을 깨워라.”
황녀는 시녀에게 명령했다.
시녀는 상당히 불안해 보이는 얼굴이었으나 결국 여자들을 흔들어 깨웠다.
“일어나십시오.”
게슴츠레하게 눈을 떴다가 하늘색 머리카락을 본 한 여자가 앙탈하듯 중얼거렸다.
“으응, 저언하. 조금만 더…….”
황녀는 그 꼴을 보다가 시녀에게 말했다.
“확실히 정신이 들도록 뺨을 쳐라.”
그 명령에 시녀가 울상을 지었다. 하지만 결국 찰싹, 소리가 나게 여자의 뺨을 쳤다.
“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