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화. 황실 역사에서 사라진 것은
‘그래, 이름이…….’
그리고 다섯 권과 여섯 권이 넘어가면서 사이나는 책을 덮었다. 이후는 볼 필요가 없었다.
‘뭔가 더 자세하게 확인할 방법이 없을까.’
사이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다시 타운 하우스로 돌아갔다.
“콘스탄틴.”
그녀는 남편의 집무실을 찾았다.
“서탑을 좀 가봐도 될까요?”
서탑은 북동령에 있어서 워프 게이트를 타야 하기에 그에게 협조를 구해야 했다. 그 안에 있는 내용물들이 워낙에 예민한 것들이라 더 그러했다.
의외의 부탁에 콘스탄틴은 눈썹을 치켜떴다.
사이나 혼자서도 워프 게이트를 탈 수 있기는 하지만, 현재 그녀는 맹약자임을 숨기고 있는 상태였고, 콘스탄틴이 혼자 이동하는 것을 허락하지도 않을 것 같아 부탁한 것이다.
“무엇 때문에 그러는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음, 제국 초기 황제의 정보에 대해 알고 싶은 게 있어요. 정확하게는 초반 400여 년이요.”
“지금, 꼭 해야 하는 겁니까?”
“네. 제 생각엔 그래요.”
뜬금없이 초기 황제의 정보를 알아야 한다는 말에 콘스탄틴은 지금 꼭 필요한 거냐 물었고 그렇다고 하자 가타부타 더 묻지 않았다.
둘은 최대한 조용히 황성으로 가서 워프 게이트를 탔고, 서탑으로 향했다.
콘스탄틴은 그녀를 어느 층인가로 데려갔다.
“나도 읽어보지는 않아 잘은 모릅니다. 그러나 대부분 시간순으로 배치되어 있으니, 아마 이쯤일 겁니다.”
“네. 고마워요.”
-서탑에 관해서라면 네 남편보다 내가 더 전문가일걸?
그 와중에 욜리가 한 소리 했다.
아, 유리는 여기에 아예 터를 잡고 연구를 했었으니, 그렇겠네.
-여기 아니야. 한 층 아래부터 뒤지는 게 나아.
“…….”
하지만 애써 그녀를 안내해준 콘스탄틴에게 ‘여기 아니래요.’라고 할 수는 없어서 사이나는 배시시 웃었다.
“바쁘실 텐데 같이 있어 주시지 않아도 돼요.”
“하지만 너무 적막하지 않습니까?”
“욜리랑 같이 있으면 되죠.”
이때다 하고 사이나는 욜리를 호출했다.
이에 콘스탄틴은 뭔가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흥이다!
그리고 욜리는 금세 그런 그의 표정을 눈치채고는 덩달아 저도 불만이라는 듯 꼬리를 틱틱거렸다.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끝나면-”
“네, 찾아보고 알려드릴게요.”
그는 내키지 않는다는 듯 서탑을 떠나갔다.
-의처증도 아니고, 질척거리긴.
구시렁거리는 욜리를 끌고 사이나는 한 층 아래로 내려갔다.
“시끄럽고, 서고 어딘지나 말해 봐.”
-정확히 뭘 찾고 싶은 건데?
“크레이머 역대 가주에 관한 기록을 보고자 하는 게 아니라, 가주들이 모셨던 황제나 황가에 관한 기록을 보고 싶어.”
-흠. 그건 가주들마다 다를걸. 꼼꼼한 성향의 가주야 분류해서 적어놨겠지만, 그냥 일기 쓰듯 끼적여 놓은 가주들도 있어서.
“하, 그냥 다 들춰 보는 수밖에 없나, 그럼?”
400여 년이면 벌써 몇 대냐. 다른 귀족가에 비해 공작가는 맹약자 때문인지 가주 교체 텀이 짧은 편이라 특히 더 많았다.
-그냥 뭘 원하는지 말해 봐. 내가 알 수도 있으니까.
“음. 사실…….”
사이나는 찾는 바에 대해 욜리에게 설명했다.
-아, 그거. 별거 아니네.
욜리는 휙 하고 유리로 변하더니, 서가를 죽 돌며 책을 턱턱 뽑아왔다. 대략 열 권 정도의 책을 뽑아 중앙 탁자에 두더니 말했다.
-이것들만 살펴봐도 충분할 거야.
“-고마워!”
사이나는 활짝 웃으며 유리를 끌어안았다.
덕분에 시간이 대폭 줄었다.
* * *
둘은 조용히 다시 황도로 돌아왔다.
서탑에서 필요한 정보를 확인한 사이나는 마지막으로 하나 더 확인할 것이 있어서 다시 황성 도서관으로 향했다.
혹시 위험할까 싶어 욜리를 데려왔다.
-뭐야, 황성 도서관?
물론 실체화를 해제하여 데리고 왔다가 방금 다시 내보냈다.
그리고 사이나는 전에 애버딘 공작이 말한 것처럼 항상 실체화를 해두는 게 더 편하다는 게 무슨 뜻인지 바로 알 수 있었다.
힘이 내부를 도는 느낌 자체를 제어하기 위해 끊임없이 신경을 써야 했고, 감각이 공유되는 것이 어색했다.
프라이버시가 사라진 것 같달까? 자신이 하는 행동 하나하나, 일거수일투족을 유리와 공유한다고 생각하면 어쩐지 상당히 불편한 기분이 드는 것이다.
특히 콘스탄틴과 있을 때나 농도 깊은 스킨십을 나눌 때에 실체화를 거두고 같이 있는다고 생각하면, 상상만으로도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그건 욜리 쪽도 마찬가지인지 우리에 갇혀 있다가 해방된 짐승처럼 기지개를 쭉 피고는 짧게 몸을 털었다.
-여긴 또 왜 온 거냐?
“응?”
-이번엔 또 뭘 찾으려고? 여황의 존재는 이미 밝혀진 거 아니었어?
그렇다. 사이나는 맥페이든의 제국사에서 여황의 존재를 알아내기 위해 여태 사료를 뒤졌다.
‘제국 초기 3-400여 년 정도까지만 해도 여황이 있었어.’
그러나 어느 순간 사라지더니, 남자 황제만이 배출되었다.
지금에 이르러서는 그것을 너무 당연하게 생각하고, 계승의 증거 자체가 황자를 가리킨다고 다들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만…….
‘만약 그게 아니었다면?’
사이나는 이번에 계보가 아니라 황실 역사서 쪽을 뒤졌다. 대충 몇 권을 뒤지자 원하는 항목을 찾아낼 수 있었다.
‘헤베타….’
드물긴 해도 이어져 오던 여황의 맥이 끊긴 시기와 헤베타라는 제도가 생긴 시기가 비슷하다는 것을 알아낼 수 있었다.
‘혹시 가언의 오역의 영향이 있을 수 있을까?’
사이나가 이 조사를 시작한 것은 가언의 오역, 특히 첫 줄의 해석 차이 때문에 현 헤베타 제도가 생긴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다.
[순혈은 곧 이것이니, 네 유일한 사랑을 넘치게 품으라.]
‘유일한’과 ‘넘치게’의 위치에 따라 뜻이 너무 크게 달라졌다.
[순혈의 유일한 자손이여, 넘치게 사랑을 품으라.]
사이나가 한 해석은 사랑 앞에 ‘유일한’이 수식되어 있었는데, 현 황가에 내려오는 뜻은 자손 앞에 ‘유일한’이 수식되어 있고 사랑을 넘치게 품으라고 되어 있었다.
이는 비슷하면서도 매우 달랐다.
어째서 이런 식으로 가언이 전달되어 왔는지는 모르겠으나 현 황가의 가언은 묘하게 사람의 마음을 방조하여, 방탕함을 조장하는 식이 아닐 수 없었다.
사랑을 기조로 하는 것은 같았으나 현 황가의 가언은 조금 가벼운 느낌이었다.
우선 육체적으로 품은 후 계승을 증명하는 현 방식이 왜 비롯되었는지 알 것 같은 뜻풀이었다.
‘벗 된 자를 안으라’라는 표현 역시 가벼운 헤베타 제도를 옹호하는 듯했다.
하지만 사이나가 한 해석이 맞다면 황가의 가언은 ‘유일한 사랑’이 핵심.
문득, 크레이머령 축제에서 본 연극이 떠올랐다.
‘아티는 맥과 그의 딸에게 사랑이라는 감정을 배웠어. 그렇기에 정령계에서 돌아왔지.’
그 연극의 내용이 진짜인지 가짜인지는 모르겠으나 황가의 가언의 핵심이 ‘사랑’이라는 것은 확실했다.
‘사랑하는 자에게만 계승되는 거야…!’
여태 왜 황자에게 계승의 증거가 나타나지 않는지 알 수 있었다.
그가 지나간 헤베타나 어떤 여자라도 딱히 사랑하는 마음을 가졌을 것 같지는 않으니 말이다.
‘특별히 성별에 대한 말은 없는데…….’
결론적으로는 벗 된 자를 안으라는 잘못된 해석과 여성을 황제의 지위에서 배제시키기 위한 방식으로 변화되면서 헤베타라는 제도를 만든 것 같았다.
하지만 황가의 맹약의 본질은 ‘사랑’.
그나마 그간 계승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잘은 몰라도 몸정이 맘정이 되어 서로 애정이 생겼기 때문이지, 본래 아켈리온이 원하던 바는 아닌 것 같았다.
타인을 사랑하지 못하는 자는, 수호의 힘을 계승할 자격이 없다는 반증과도 같았다.
‘…그럼 굳이 황자가 아니어도 되는 거 아닌가?’
헤베타를 들이는 의식에서 가언을 읊는다고 했지. 하지만 황녀가 결혼할 땐 이런 절차가 없다고 했어.
‘거기서 차이가 발생한 거라면?’
사이나는 가능성을 보았다.
이 가능성의 싹이 터서 자라날 수 있을지는 조금 더 두고 보아야 겠지만, 해결책이 없던 문제의 답을 끄트머리나마 보게 된 기분이었다.
* * *
-앞에 누가 있는데?
“뭐?”
-음, 기운이 옅은게 맹약자는 아니고 대여자인 거 같은데, 황자인가?
“엑?”
방금 황성 도서관에서 나온 참이다.
사이나는 황급히 주변을 둘러보고는 건물 뒤로 돌아가 옆길로 스며들었다.
귀족이라면 절대 다니지 않을 그런 틈새 같은 길이었다.
-뭐야, 왜 그래?
“쉿.”
사이나는 그 틈새에 몸을 숙이고는 도서관 쪽을 살폈다.
기사와 시종들을 잔뜩 끌고 온 황자가 기사 한 명을 입구에 세워두고는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누가 봐도 입구를 막은 채 수색을 하러 들어간 것 같은 느낌이었다.
설마 자신을 찾으러 온 건가?
아니, 아무리 발표 전이라지만 조금은 자중하고 있을 줄 알았더니 저렇게 앞뒤 없이 행동할 줄이야.
‘날 찾아서 뭐 하게?’
정말 구제 불능이다 싶었다.
-뭐냐니까? 야, 설마 저거 널 찾으려고 저러는 거야?
사이나는 대답 없이 몸을 천천히 물렸다. 그리고는 인적없는 곳에 이르자 욜리에게 마차 있는 곳으로 데려다 달라고 했다.
-대체 이게 뭔 짓거린데? 다리엘도 아니고 네가 왜 숨어?
그러고 보니 욜리는… 황자의 이상 행동을 본 적이 없다.
그녀가 황자를 만날 땐 매번 욜리를 데려올 수 없는 상황이었으니까.
사이나는 적당히 상황을 설명했다.
“전에 내게도 공작과 결혼을 취소하고 자신에게 오라고 했었거든.”
-뭐? 그 X 같은 XXX 할 새끼가 뭐가 어쩌고 어째?
갑자기 빡치는지 욕을 하며 기세를 끌어올리는 모습에 사이나는 당황했지만 이내 욜리의 목소리는 자신밖에 알아듣지 못한다는 것이 생각났다.
없는 데서는 나라님 욕도 한다는데 황자쯤이야.
“근데 이번엔 다리엘에게 그러는 것을 보니까… 음, 본인이 계승을 못 하고 있는 것이 여자 쪽 문제라고 생각해서 더 정령력이 강한 여자를 찾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런 추측이 들어.”
정확한 추측이었다.
그리고 그 말을 들은 욜리는 코웃음을 쳤다.
-지랄도 풍년이라더니! 저거 완전히 모지리 아냐?
점차 황족 모욕이 거세지고 있었으나 역시나 남들은 들을 수 없으므로 굳이 말리지 않았다.
-그거 알아?
욜리가 꼬리를 탁탁 치며 잠시 말을 멈췄다. 회상에 잠긴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