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화. 황가의 가언
“전에 축야 때 말이야.”
“축야? 축복의 밤 때요?”
“그러하네. 그때 우리가 나누었던 이야기가 혹시 생각날는지 모르겠군.”
사이나는 기억을 더듬었다.
사실 이미 몇 달 전이라 완전 생생하지는 않았다.
“음, 윌레프 부인의 강연이랑…….”
아주 내밀한 내용의 화제들을 생생하게 다뤄주었었다.
‘그때 선물 받은 속옷 세트는 아직도 못 입어 봤는걸.’
하지만 황녀의 표정을 보니 이 화제는 아닌 것 같다.
“제가 결혼하기까지의 사정과….”
이것 역시 아니다.
“에비앙 언니가 소꿉친구와 키스한…?”
역시 아니었다.
그럼 대체 뭘까.
그날 밤을 지새우며 온갖 이야기를 나누었기에 꼽자니 너무 많았다.
“가언에 대해 이야기했던 거, 기억하는가?”
“가언요? 아…, 그랬죠. 맞아요.”
어쩌다 가언(家言) 이야기가 나왔었다.
가언은 가문의 시작과 정체성을 요약한 문장으로, 서적으로 따지자면 가장 앞 페이지에 간략하게 강조하듯 던지고 들어가는 일종의 서언(緖言) 같은 것이었다.
맥페이든은 아를-프로메사를 잇는 수호령의 제국이다.
고로 전통 있는 가문일수록 아를어 자체 형태와 발음을 가지고 가언이 전승되며, 가문의 직계일수록 그 글자와 발음과 뜻을 외워야 했다.
특히 가주와 후계자는 반드시 외워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
황가도 예외가 아니었다.
‘모든 황족은 그것을 외워야 한다네. 성인식을 할 때 그것을 증명하는 의식이 포함될 정도지.’
황녀는 발음이 너무 생소하여 어릴 때 고생했다는 경험담을 늘어놓았었다.
“그땐 별생각 없었는데 말이야….”
황녀는 말없이 손을 뻗더니 뭔가를 가리켰다.
사이나는 황녀의 손끝을 따라 그 가리키는 바로 시선을 옮겼다.
그건 아주 역사가 깊어 보이는 고풍스러운 디자인의 침대, 그것의 아치 부분이었다.
황실이 쓰는 침대답게 크기가 매우 컸고 높았으며 각 모서리마다 기둥이 있고, 또한 각 기둥마다 아치로 연결되어 아름다운 문양의 음각이 새겨져 있는, 누가 보아도 손꼽히는 장인이 오랜 시간을 투자해 만들어낸 고가의 가구가 틀림없었다.
“모든 황족의 침대에는 저게 새겨져 있다네.”
“…네?”
가구 자체에만 감탄을 했던 사이나는 그제야 눈을 갸름하게 뜨고 아치 부분에 집중했다.
아름다운 문양으로 보였던 그것은 자세히 살피니 아를어였다.
“…아를어?”
“맞아.”
황녀는 잔잔한 목소리로 그것을 찬찬히 읊었다. 보아하니, 저 구문이 황가에 내려오는 가언인 듯했다.
“어느 날 문득, 의문이 들었어. 저 가언은 모든 황족이 외워야 한다는데, 어마마마는 모르시더군.”
“…그래요?”
“응. 어마마마께선 당신께서 헤베타 의식에서 당시 황자였던 아바마마를 따라 무언가를 읊었다고 해. 내 생각엔 아마 그게 저 가언일 것 같아.”
“…….”
“그러다가 얼마 전 황가의 의전에 대해 상세하게 들여다볼 일이 있었지. 황자와 헤베타가 황태자와 황태자비로 승격하는 의식에 이 가언을 읊는 절차가 있더군. 황제의 즉위식 때도 있었어.”
사이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일반 가문에서 작위를 승계할 때도 비슷했다.
“그런데 황녀의 결혼식 때는 가언 낭송 절차가 없더군.”
“…….”
“그럼 나는 대체 왜 이것을 외워야 했던 걸까.”
이건 좀 이상하긴 하다.
황족이라면 가언을 외워야 하는데, 황녀는 성인식 때 한번 확인하고 끝이라는 거잖아? 근데 침대에는 왜 다 새겨둔 거지?
뭔가 이상하긴 한데, 정확히 뭐가 이상한 건지는 모르겠다.
차별인가? 황녀는 어차피 결혼해서 떠날 사람이니까? 그럼 애당초 외우게 할 필요도 없는 게 아닌가?
“모든 황족이 다 외워야 한다는 건, 무엇에 기조한 가법인가요?”
뭔가에 기반한 가법이 있으니까 그렇게 한다는 것이지 싶어서 물었다.
“초대 황제의 명이라고 들었네.”
“아…….”
초대제라. 그럼 이해가 된다.
의전의 형태야 세월이 흐르면서 변형이 되는 것이 당연하니 그때와 지금은 꽤 차이가 있을 것이다.
사이나는 방금 들었던 발음을 머릿속에서 되새기며 한 걸음 앞으로 갔다.
아치에 새겨진 문장은 덩굴무늬와 결합한 일종의 필기체 같은 형태라 한눈에 읽기가 쉽지는 않았다.
“전하, 아까 그 가언을 한 번 더 읊어주실 수 있나요?”
“물론이야.”
황녀는 자신이 외운 가언을 낭송했다. 사이나를 배려하느라 아까보다 더 느린 속도였다.
그 발음에 맞춰 사이나는 눈을 움직였다.
“혹시 그 가언의 뜻이 뭔지도 아시나요?”
“응. 물론이네.”
황녀는 제국어로 그 뜻을 읊었다.
“순혈의 유일한 자손이여, 넘치게 사랑을 품으라.
혈통의 맹세를 따라 제국을 아우를 것이다.
순혈을 지키기 위하여, 벗 된 자를 마음에 안으라.
이것이 곧 맹약자가 지킬 것이라.”
사이나의 미간이 옅게 찌푸려졌다.
뭔가 이상했다.
‘발음과 글자가 좀 안 맞는 데가 있는 것 같은데.’
당연히 뜻도 좀 애매했다.
하지만 새로 알아낸 바, 아를어는 거울 문자와 대칭 구조가 함께 쓰이면 눈으로 보았을 때와 완전히 다르게 해석되는 경우가 있었다.
당시 고대인들은 그런 구조라도 직독직해가 가능했는지 모르겠지만, 사이나는 아직 그런 경지에 오르지 못했다.
“음. 뭔가 좀 걸리네요. 혹시 저 가언을 제가 적어가도 될까요?”
“걸린다고?”
“발음과 글자가 좀 안 맞는 거 같기도 하고, 뜻도 좀……. 근데 제가 바로 읽고 번역이 가능한 수준은 아니라서 풀이가 좀 필요할 거 같거든요.”
“흠…….”
황녀는 생각에 잠긴 모습이었다.
단순하게 아를어 구문을 보여주고자 했던 것은 아닌 거 같다.
사이나는 내심 의아해졌다.
“사실… 이 가언과 황가의 계승 간에 뭔가 관계가 있지 않을까 싶어서 자네의 조언을 얻고자 했던 거네만. 뜻 자체가 다른 거 같다고?”
“…아를어는 수수께끼를 풀어가는 것 같은 문장 구조를 가지고 있는 경우가 있어서, 해독에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러한가?”
“네. 이는 저도 얼마 전에 알게 된 문법 구조라서 별로 능숙하지 않아요.”
“알겠네. 그럼…….”
황녀는 나직하게 덧붙였다.
“조용하게 번역 후 내게만 알려줄 수 있겠는가?”
황녀의 은색 눈동자가 진지하면서도 엄격한 빛을 띠고 사이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여태 사람 좋게만 보이던 황녀의 다른 일면을 보게 된 기분이었다.
“…네. 그리하겠습니다.”
* * *
사이나 부부는 크레이머 타운 하우스로 돌아왔다.
“고생했어, 다리엘.”
“잘 풀려서 다행이에요, 마님.”
꽤 고생스러웠을 텐데 다리엘은 되레 사이나를 격려했다.
시녀 하나는 참 잘 뽑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뭔가 보상을 해주고 싶은데 뭐가 좋을지 모르겠다.
다리엘이 나가고 사이나와 콘스탄틴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비밀입니까?”
“네?”
“황녀 전하께서 부탁하신 것, 말입니다.”
“아, 비밀이라기보단…….”
조용하게 번역 후 자신에게만 알려달라고 하긴 했으나, 나중에 황녀는 남편에겐 말해도 된다며 농담처럼 덧붙였다.
그러니 그 말은 다른 황족이나 바깥에 알려지지 않게 해달라는 뜻이다. 그 내용을 가장 먼저 알고 싶다는 뜻도 포함일 것이다.
“황가의 가언을 보여주셨는데, 음, 번역 후에 알려드릴게요. 좀 이상한 것이 있어서.”
“그렇습니까?”
“네.”
그리고 사이나는 아까 걱정스러웠던 점에 대해서도 말했다.
“어떻게 황녀 전하께 피해가 덜 가는 방법으로 발표를 하는 방법은 없을까요?”
황후께서는 왜 하필 황녀 전하께 조사를 맡기셔서…….
물론 황녀를 믿기에 그런 것이겠지만, 오라비라는 작자의 속이 워낙 좁으니 걱정스럽지 않을 수가 없었다.
“흠. 그건…… 방법을 찾아보겠습니다.”
“알았어요. 고마워요.”
적당히 주변이 정리되었을 때 사이나는 서재를 찾았다.
그리고 황녀궁의 침대 아치에서 받아 적어온 아를어를 해석하기 시작했다.
“이건 대칭구인거 같고…… 얜 다음(多音) 문자니까…….”
거울을 이용해 미러링 레터까지 다 확인 마쳤다.
그렇게 얼마간의 시간을 들여 완성된 해석구는 황녀가 알려준 것과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순혈은 곧 이것이니, 네 유일한 사랑을 넘치게 품으라.
순혈은 맹세니, 제국을 아우를 것이다.
순혈은 곧 잊지 않음이니, 벗 된 자여 네 마음을 지키라.
이것을 지킴으로 맹약은 계속될 것이니라.]
바른 해석은 이러했다.
‘순혈은 무엇이니’ 하는 대칭구가 숨겨진 짝을 이루며 반복되고 있어서 이런 식으로 해석이 나왔다.
또한 미러링 레터에 따라서 뒤집어 해석을 하다 보니 뜻도 미묘하게 달라졌다.
[순혈의 유일한 자손이여, 넘치게 사랑을 품으라.
혈통의 맹세를 따라 제국을 아우를 것이다.
순혈을 지키기 위하여, 벗 된 자를 마음에 안으라.
이것이 곧 맹약자가 지킬 것이라.]
황녀가 일러준 뜻과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해석의 차이점을 두고, 사이나는 뭔가가 걸리는 것을 발견했다.
이것은 일종의 직감이기도 했는데 제대로 확인할 필요성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다음 날.
사이나는 황성 도서관으로 향했다.
전생 덕분이랄까. 사이나가 황성 내에서 가장 구조를 잘 아는 곳이라고 하면 바로 이곳이었다.
황성 도서관은 황성 내부에 있기는 해도 거의 외곽 쪽에 있는 데다, 공부에 열렬했던 열다섯에 이미 출입증을 받아 놓은 것이 있어서 조용히 드나들 수 있었다.
조심히 내부로 들어간 그녀는 바로 황실의 역사 코너 쪽으로 향했다.
황실의 계보나 황실의 역사 등은 곧 제국의 역사와 다름없기에 전집으로 편찬되어 잘 관리되고 있었고, 황족이 아니어도 읽는 것이 가능했다.
일반 가문들도 그렇듯이 아마 민감한 내용은 비밀 서고에 따로 보관되고 있을 것이다.
사이나는 십 수 권이 넘는 황실의 계보 서적 중에서 앞쪽의 몇 권을 빼내어 확인용 탁자에 두고는 빠른 속도로 살피기 시작했다.
‘…음. 애매하네.’
사이나는 계속 뒤졌다.
좀 더 자세히 계보를 뒤지자, 그녀는 뭔가를 발견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