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화. 변수
그냥 이렇게 의심부터 될 만큼, 가히 최악의 조합.
만약 황제 폐하가 서거하시고 혹시라도 그 둘이 황제와 황후가 된다면…….
가슴 깊은 곳에서 한탄인지 답답함인지 알 수 없는 숨이 터져 나왔다.
‘잠깐…. 기억을 좀 더듬어보자.’
황자. 황자의 계승. 황태자 즉위. 헤베타에서 황태자비로의 승격.
‘…기억이 안 나.’
지난 생을 아무리 떠올려보아도 황자가 맹약을 계승했다는 소식을 들었던 기억이 없었다.
제 삶을 꾸리는 것도 바빠서 나라 사정에 촉각을 곤두세우며 살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저렇게 큰 사안은 모르기가 더 힘든 것이 사실이다.
‘그러고 보니 황제가 없는 섭정기가 있었지.’
황제는 이미 승하했으나, 황좌는 채워지지 못한 채 꽤 긴 시간이 흘렀던 기억이 난다.
그것은 마치 공작이 없는 공작가, 백작이 없는 백작가 같은 느낌이라 다들 안정감을 느끼지 못하고 불안해했다.
그 말은 지금으로부터 한참이 지나도 황자는 자격을 증명하지 못할 것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때 없던 엘리자베스라는 변수가 있지.’
전과 달리 그녀가 황자의 맹약을 완성시키는 변수가 될 수 있을까?
‘으음.’
사이나는 여기서 아주 큰 아이러니를 느꼈다.
엘리자베스가 성공적인 변수가 된다면 황자는 계승에 성공해 황태자가 될 것이고, 그러면 제국을 수호하는 맹약이 유효할 것이다.
근데 황자와 엘리자베스가 황제와 황후가 되면 제국의 운영이 정말 괜찮을까, 하는 걱정이 자연스럽게 따라왔다.
‘수호령의 수호가 있어도 나라가 망할 수 있나?’
이런 걱정이 될 만큼이나 둘의 조합은 참으로 끔찍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황제 폐하께서 좀 더 버텨주시면 좋으련만.’
그렇지 않으면 북방 야만족이…….
‘잠깐, 북방 야만족?’
자신의 기억이 맞는다면 황제의 승하 이후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 북방 야만족이 쳐들어왔었다.
그리고 그것을 시작으로 제국에 전쟁이 끊이지 않고 일어나기 시작했다.
당시 황제가 승하하시고 황자가 계승을 하지 못하면서 제국에 불행이 찾아오기 시작했다고, 사람들이 그렇게 떠들었었다.
‘아니, 북방이면… 설마 벌써 시작된 건가?’
그 야만족이 지금 서북령을 침입한 야만족?
하지만 아직 황제가…….
“…사이나?”
갑자기 핏기가 가신 그녀의 얼굴을 보고 콘스탄틴이 이상하다는 듯 그녀를 불렀다.
그가 그녀를 걱정하는 것도 인식하지 못하고 사이나는 생각에 빠졌다.
‘그럼… 콘스탄틴이…… 크레이머령도 전쟁에 휩싸이는 건가?’
과거의 전쟁이 어땠는지 떠올려보려 애썼으나, 도무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
그저 그런 일이 있었다더라 하는 단편적인 기억들이 다였다.
만약 엘리자베스가 임신에 성공하면 전쟁은 안 나는 건가?
혼란한 가정과 아이러니한 인과관계들이 사이나의 머릿속을 마구 어지럽히기 시작했다.
“사이나!”
“헉.”
자신도 모르게 숨까지 참고 있었던 탓에, 놀란 가슴에 숨결이 터졌다.
“왜 그럽니까.”
어느새 그가 사이나 앞, 마차 바닥에 반무릎으로 앉아 그녀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공작님? 왜…. 이, 일어나세요.”
움켜잡은 손을 통해 그의 불안감이 그녀에게도 전달되었다.
“저택으로 돌아가겠습니까?”
“…네?”
“내키지 않으면 나 혼자 가도 충분합니다.”
“아…. 그게 아니에요. 그냥, 잡다한 걱정이 들어서.”
사이나는 고개를 저으며 그를 일으켰다. 다시 그를 그녀의 옆에 앉히며 작게 숨을 내쉬었다.
‘전쟁은 안 돼…….’
제국의 군사력은 막강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전쟁은 되도록 일어나지 않는 편이 좋았다.
어차피 제국은 충분히 광대해서 타국을 탐할 필요도 없지 않은가.
“혹시 크레이머령에서도 연락이 왔나요?”
“무슨 연락 말입니까?”
“북부 야만족이 서북령을 통해 쳐들어왔다고 하니, 북동령이라고 괜찮을까 싶어서요.”
“지금 비상 감시 체제로 들어가긴 했습니다. 조그마한 기미라도 보이면 금세 연락이 올 겁니다.”
아직은 괜찮은 건가. 약간은 안심이 되었다.
“황자는 대체 왜 계승을 못 하는 걸까요?”
“흠. 글쎄요.”
“그 많은 여성들이 문제일 리는 없잖아요. 그러니 뭔가 다른 문제가 있는 걸 텐데….”
“각 가문의 수호령은 최초의 계약 당시 수호령이 원한 요구 조건이 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전에 애버딘 공작의 표현에 따라 ‘집착 요소’ 같은 건가?
“아마 그게 충족이 안 되고 있는 것이겠지요.”
“대체 그게 뭐기에…….”
“선대 황제도 꽤나 어렵게 계승을 했다고 하더군요. 근래 들어 황가의 피가 옅어지기라도 한 것인지…. 나도 뭐가 문제인지는 모르겠습니다. 그 문제를 황가에서 공유할 리는 없으니까 말입니다.”
“그런가요.”
차라리 공유를 좀 하고 자문을 구하는 게 낫지 않나?
황가의 수호령은 제국 전체를 아우르는 힘. 단순히 일족만의 문제가 아니니 말이다.
‘하긴 문제가 뭔지 알았으면 황자가 점차 뵈는 게 없이 굴지 않겠지.’
누가 봐도 그는 조급해하고 있었다.
여섯이나 되는 지난 헤베타들을 차지하더라도, 황자는 꽤 유명했다. 한 번씩 건드리고 버린 여성들이 상당하다는 소문이 있었다.
‘황녀 전하께 물어볼까?’
아냐. 같은 황족이라고 해도 황녀는 황태자 후보가 될 수 없다 보니 모를 확률이 더 높을 것 같긴 했다.
뭔지 모르게 약간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 * *
“마님!”
“다리엘, 잘 끝났어?”
“네. 오늘이 마지막이래요.”
면담 시간이 끝났는지 밝은 모습으로 다리엘이 나타났다.
사이나는 수고했다며 다리엘이 먼저 돌아갈 수 있도록 조치를 취했다.
사이나와 콘스탄틴은 남아 그 결과에 대해 황녀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조사에는 큰 반전이 없었다.
소문처럼 황자가 다리엘을 강제로 어떻게 해보려고 하다가, 그녀의 저항으로 바깥에 드러나게 된 것이다.
저항을 하며 터져 나온 힘에 노출된 충격으로 둘 다 2층 바깥으로 떠밀렸고, 둘 다 기절을 했다.
황녀는 새 맹약자가 된 다리엘이 힘 조절에 아직 미숙하여 그런 일이 벌어졌다고 보는 듯했다.
새 맹약자가 정확하게 누구라는 것은 여전히 공식적으로 알려지지 않은 상황이지만, 암묵적으로 다리엘이 맹약자라고 다들 여기고 있는지라 자연스럽게 그리 추측을 했을 것이다.
고위 귀족만 올라갈 수 있는 내부 테라스에 어떻게 다리엘이 들어가게 된 것인지도 의문이었으나, 그것은 애버딘 공작의 소행으로 밝혀졌다.
홀 밖에서 우연히 마주친 그가 한번 구경해 보겠느냐며 다리엘에게 제안했고, 다리엘이 수락을 한 것.
그리고 얼마 후 애버딘 공작이 마실 것을 좀 가져오겠다며 잠시 자리를 비웠고, 그사이 황자가 나타났다고 한다.
황자는 바로 다리엘에게 온갖 감언이설을 하며 그녀를 꼬여내려고 했고, 계속해서 거절하던 그녀가 자리를 뜨려 하자 갑자기 완력을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후 상황은 사람들이 본 대로였다.
하지만 사이나가 들은 바, 실제로 벌어진 것은 좀 달랐다.
황자는 테라스 밖으로 떠밀리기 전에 이미 기절한 상황이었다. 그가 다리엘에게 수작을 부리고 있을 때, 웨슬리 단장이 조용히 몰래 뒤로 다가가 기절을 시켰다고 한다.
당시 다리엘의 입을 막으며 안쪽으로 끌고 들어갔던 자 역시 웨슬리 단장이었다.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둘의 합작으로 이루어진 명장면이랄까.
그러나 그 전에 다리엘을 강제로 어찌해 보려고 했던 것은 분명 실제로 있었던 일이었다.
그렇기에 전혀 미안하지 않았다. 자업자득이랄까.
애초에 황자가 아무 일도 하지 않았으면, 발효되지 않았을 계획이기도 했다.
“조사 발표는 어떻게 하실 겁니까?”
콘스탄틴이 황녀에게 물었다.
“아무리 제국의 황자라 한들, 귀족 여성을 강제로 욕보이려 했으니…….”
황녀는 말을 하다가 말고 한숨을 쉬었다.
“허나 그대로 발표했다가는 그 여파가… 걱정이기도 하오.”
황실의 권위가 추락할 것이다.
“그래도 할 건 해야겠지.”
황녀는 머리가 복잡해 보였다.
사실 황녀가 조사를 맡게 될 줄은 이쪽에서도 예상하지 못했다.
‘그 황자라면 여동생이라고 이해해 줄 것 같지 않은데…….’
저가 잘못했음에도 불구하고 두고두고 담아뒀다가 나중에 앙갚음할 것 같았다.
만약 황제의 자리에라도 오르면 지위를 이용해 괴롭히고도 남을 작자였다.
이리되고 보니 또 걱정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다리엘도 소중하지만 사이나는 황녀 역시 친우로 여기고 있기에 고민이 되는 것이다.
‘뭔가 방법이 없을까.’
콘스탄틴과 돌아가는 길에 의논을 좀 해볼 필요가 있다고 여겨졌다.
그리하여 일어나려는 차에.
“혹시 시간이 조금 더 있을까?”
황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사이나 쪽을 향한 물음이었다.
“예?”
“공작부인 말이야. 시간이 더 된다면, 잠시만 더 머물러 줄 수 있겠나?”
“무슨 일로 그러시는지 여쭤보아도 되겠습니까?”
콘스탄틴이 불안한 듯 목적을 물었다.
“내 부인의 도움을 좀 받고 싶은 것이 있네.”
황녀의 눈짓에 사이나는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아, 혹시 그때 말씀하셨던 그건가요?”
“응. 맞네.”
뭔지 몰라도 그걸 지금 보여준다고?
황녀의 성격이라면 당연히 나중에 따로 시간을 잡을 줄 알았는데. 의외였다.
“많이 바쁜 것이 아니라면 부탁하고 싶은데.”
뭔지 몰라도 꼭 확인하고 싶은 것처럼 보였다.
“알겠습니다.”
사이나는 수락했다.
생각해보니 나중에 따로 입궁하는 것보다 차라리 이게 나을 것 같았다.
그는 먼저 가지 않고 기다리겠다고 했다.
황녀도 그것까지는 막지 않았다.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야.”
“예. 여기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그를 응접실에 두고, 사이나는 황녀를 따라나섰다.
그러기를 한참.
사이나는 황녀의 곁에서 걸음을 옮기면서 속으로 의아함을 느끼고 있었다.
‘이쪽은……?’
황녀궁 내에서도 점점 안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보통 이런 구조라면…….
“내 침실일세.”
그렇다. 보통 침실이 나오기 마련이다.
침실이라니. 이렇게 내밀하고 사적인 공간을 대체 왜 보여주려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