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화. 사건의 시작
“아, 네. 알았어요.”
본래 계획했던 장소가 아니라 2층에 있는 내부 테라스로 바뀌다니. 뭔가 변수가 꽤 많았던 모양이다.
사이나는 흘끔 위를 보았으나 거긴 사람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다시 콘스탄틴에게 시선을 맞추며 의식적으로 더 웃는 얼굴을 했다.
바깥에서 보면 사이좋은 부부의 춤, 그 자체였다.
“싫다고요!”
그런데 그때.
홀에 흐르던 연주가 뚝 끊길 정도로 커다란 목소리가 들렸다.
“…시작이군요.”
콘스탄틴이 나직하게 사이나에게 신호를 주었다.
“안 가요! 놔주세요!”
갑작스러운 여자의 새된 목소리에 다들 영문을 모르고 소리의 진원지를 살폈다.
긴 타원형 홀의 한쪽 2층에는 초승달 모양의 내부 테라스가 있었는데, 고위 귀족 전용 공간으로 백작 이하의 귀족은 계단도 딛지 못하는 곳이었다.
그곳에서 소리가 난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들이 재빨리 시선을 모았다.
테라스 난간 끄트머리에서 한 여자가 등을 보인 채 비틀거리고 있었다.
“만지지 마! 난 헤베타도 황태자비도 관심 없- 으읍! 읍!”
여자는 크게 저항하며 몸을 틀었다. 여자의 얼굴이 보이는 것과 동시에, 비명처럼 내질러지는 외침을 누군가가 막았다.
커다란 누군가의 손이 여자의 입을 틀어막은 것이다.
하지만 각도상 누구인지는 보이지 않았다.
“…저 여자는?”
“어머! 크레이머 공작가의 일행으로 온 그 여자 아니에요?”
딱 봐도 심상치 않은 상황.
“으으읍!”
여자는 홀에 있는 참석자들을 향해 도와달라는 듯 손을 뻗으며 허우적거렸다.
“어머, 어떻게 해!”
“으으!”
그러다 갑자기 안쪽으로 끌려 들어갔다.
“꺅! 누군가 그녀를 끌고 들어갔어요!”
대체 이게 무슨 일인지 몰라 사람들이 경악했다.
정확히 무슨 상황인지는 몰라도 한 여자가 강제로 끌려 들어간 것만은 다들 눈으로 보았다.
“누군가 도와주세요!”
하지만 돕고 싶어도 장소의 특성상 아무나 발을 디딜 수도 없는 곳이었다.
고위 귀족만이 들어갈 수 있는 곳.
사람들은 고위 귀족을 찾아 두리번거리다가 사이나 부부와 눈이 마주쳤다.
“…각하! 공작부인! 혹시 저쪽에……”
하지만 도움을 다 청하기도 전에.
파앗-!
2층 난간을 따라 일정 간격으로 있던 기둥에 예쁘게 매였던 커튼들이 일제히 풀리며 바깥쪽으로 펄럭였다.
안쪽에서 커다란 힘이 터져 나오며 커튼까지 휩쓸린 것처럼 보였다.
“놔- 아악!”
커다란 비명과 함께 펄럭이는 드레스 자락이 공중으로 떠올랐다. 힘에 떠밀려 난간 바깥으로 밀려난 것으로 보이는 사람은 아마도 아까 그 여성.
수호령의 힘이 강하게 터트려지며 그 힘에 휘말린 것 같은 모양새였다.
“어, 어-!”
“꺅! 어떻게 해!”
사람들이 곧 따라올 끔찍한 장면을 예상하며 비명을 질렀다.
공중에 떴던 여성은 떨어지며 두 덩이로 분리되었다. 드레스 자락에 가려 안 보였던 모양인지, 분리된 것은 남자의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아악! 세상에!”
두 사람이 순식간에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딱딱하기 그지없는 대리석에 인체가 곤두박질치기 직전, 여자의 아래쪽에서 은빛의 광채가 터져 나왔다.
사방을 메우는 강렬한 빛에 사람들은 반사적으로 눈을 질끈 감았다.
“…….”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 생각지도 못한 장면이 펼쳐져 있었다.
낙상의 여파로 피가 낭자하거나 신체가 뒤틀리는 등의 끔찍한 장면이 아니라, 탄성을 내지르게 하는 장면이었다.
“저건…!”
“수호령!”
새로운 형태의 수호령이었다.
늑대의 형태로 보이는 수호령은 두 날개 사이로 떨어지는 여자를 받아내었는지, 조용하게 서 있었다.
그러나 정신적 충격으로 기절한 모양인지, 축 처진 몸은 반응이 없었다.
힘없이 늘어져 있던 여자의 손에서 무언가가 툭 떨어졌다. 반짝이는 금속성의 뭔가가 바닥에 소리를 내며 구르다가 멈췄다.
“저 여자가 맹약자인가 봐요.”
“기절하기 직전에 수호령의 힘을 펼친 모양이네요.”
“그럼 다른 남자는…….”
사람들이 시선을 틀자 또 다른 수호령이 보였다.
“모레프 아녜요?”
“어머, 정말이네?”
4년에 한 번씩 순서가 돌아오기는 해도 매년 있는 퍼레이드에서 4대 수호령을 못 본 귀족은 없기에 바로 알 수 있었다.
크레이머 공작이 남자를 구했다는 것을.
모레프 역시 날개 사이로 남자를 받아냈는지 천천히 바닥을 딛더니, 몸을 휙 젖혀서 등에 있던 남자를 바닥에 떨궜다.
퍽, 소리와 함께 떨어진 남자를 두고 이내 사라져버렸다.
“화, 황자 전하!”
볼품없이 바닥에 널브러진 사람은 황가의 의장을 갖춘 하늘색 머리카락의 남자로, 자세히 볼 것도 없이 황자였다.
“여봐라! 얼른 황자를 모셔라! 의원을 부르고!”
크레이머 공작이 서둘러 외치자, 어디선가 황실의 시종들이 나타나 다급하게 황자를 들것에 싣고 사라졌다.
“길리언!”
오늘따라 꽤 오래 머무르고 있었던 황후 역시 이 소동에 꽤나 놀란 모양이다. 그녀는 단에서 내려와 황자의 이름을 다급히 부르며 따라가다 말고 황녀를 불렀다.
“황녀! 이 사건을 지휘하도록 해요. 누군가 황자에게 해를 끼쳤다면 반드시 잡아들이도록 하세요! 엄벌에 처할 것입니다!”
“…예. 어마마마.”
황후는 황자가 걱정인지 안절부절못한 얼굴을 하고는 이내 사라졌다.
황녀는 잠깐 서서 주변을 살폈다. 제일 먼저 2층 내부 테라스 위를 올려다보며 뭔가를 가늠하는 듯하더니 다시 바닥을 훑었다.
“크레이머 공작.”
그리고는 콘스탄틴을 호명했다.
“예, 황녀 전하.”
“먼저 감사를 표하오. 황자를 구해주어 고맙소.”
“별말씀을요.”
“이쪽 영애는 괜찮은 것인가?”
“그렇지 않아도 당장 진료가 필요할 듯합니다. 데려가도 괜찮겠습니까?”
“이게 무슨 일인지 혹 아는 바가 있소?”
“글쎄요. 저는 사람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 반사적으로 받아내었을 뿐이니, 자세한 것은 조사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그 모습을 보며 연회 참석자들은 서로 수군거리며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대체 왜 떨어진 거죠?”
“뭔가 위에서 실랑이가 있었던 것 같아요.”
“떨어질 때 헤베타가 어쩌고 했던 거 같은데…….”
사람들은 문득 여자의 입을 막고 안쪽으로 끌고 들어갔던 장면이 떠올라 순간 움찔했다.
“흠. 진료는 황실 의원을 통해 보는 것이 좋겠소. 그 영애는 중요한 참고인이니, 황성 바깥으로 내보낼 수는 없을 것 같소.”
“하지만 전하.”
콘스탄틴은 조용히 서서 시선을 어딘가로 내렸다.
황녀는 그를 따라 시선을 내렸다가 무언가를 보게 되었다.
바닥에서 반짝이고 있는 금속성의 무엇.
사람들은 그게 아까 여자의 손에서 떨어진 것이라는 걸 금세 알아챘다.
“…저건, 어깨 장식이 아닌가요?”
황가의 문양이 떡하니 장식된 어깨 장식.
황자의 어깨 장식이 어째서 여자의 손에 있게 된 것일까.
자연스럽게 사람들의 머릿속에 여자가 저항을 하다가 무언가를 쥐었고, 그런 실랑이 속에서 어깨 장식이 떨어져 나가는 장면이 그려졌다.
“설마 강제로…….”
“쉿!”
다들 비슷한 장면을 떠올리고 안색이 창백해졌으나, 지금 그들이 있는 장소가 어디인지 잊지는 않았는지 금세 누군가가 저지했다.
“저 영애는 제 책임하에 있는 사람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황실에 신변을 맡기기엔, 좀 불안 요소가 많다고 생각되지 않으십니까?”
시니컬하기까지 한 콘스탄틴의 말에 황녀는 대답하지 못했다.
어느새 음악이 멈춘 거대한 연회홀에 더 거대한 침묵이 내려앉기 시작했다.
* * *
연회는 싸한 분위기 속에서 파했고, 황도가 들썩였다.
“황실 연회에서 사람이 죽었다면서요?”
“그게 아니라 황자 전하께서 위독하시다고…….”
“제가 듣기론 황자 전하께서 새 맹약자를 강제로…….”
그리고 온갖 추측과 소문이 난무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하나의 소문으로 굳어지기 시작했다.
[황자가 황태자가 되고자 하는 초조함을 못 이기고 맹약자를 강제로 임신시키려고 욕보이려 했다!]
그리고 이 소문은 이내 황자의 자질 논란으로 이어져, 사람들의 분노를 불러일으킴은 물론 제국의 미래를 걱정하는 한숨이 곳곳에서 새어 나오도록 만들었다.
“선대 때만 해도 꼼짝도 못 하던 남부 연합국 놈들이 깔짝대지 않소? 우리 제국이 만만해진 게지!”
“그것뿐인가? 근래 들어 유독 마수가 들끓지 않아?”
“날씨도 괴상하기 짝이 없어. 기상 이변이 너무 잦고… 불길하기 짝이 없다고.”
“이러다 북쪽 야만족들까지 쳐들어오는 거 아녀?”
제국민들은 점점 불안에 떨기 시작했다.
그리고 말이 씨가 되었는지, 정말로 야만족이 쳐들어왔다.
서쪽의 사막을 통해 경계를 침입해 들어왔다는 소식에 애버딘 공작이 다급하게 서북령으로 돌아갔다.
나라가 안팎으로 난리도 아니었다.
이런 어수선한 상황 속에서 사이나와 콘스탄틴은 현재 황성으로 향하고 있었다.
뒤쪽 마차에 다리엘도 함께였다.
결국 다리엘은 황성에 머무르지 않았다. 사건의 참고인으로 조사가 필요할 때마다 함께 입궁해서 조사를 받게 했다.
겉으로 드러난 상황이 있어 황녀도 결국 끝까지 요구하지는 못한 것이다.
“황자는 괜찮대요?”
“그땐 잠깐 기절한 것뿐. 아무런 이상이 없습니다.”
좋아해야 할지, 싫어해야 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매우 분개하고 있겠지요.”
성격이 그다지 좋지 않은 거야 이미 알고 있으니 당연히 그럴 것 같다.
그 화풀이를 엘리자베스가 다 받고 있으려나.
지금도 사이나는 엘리자베스가 대체 왜 헤베타가 된 건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무리 삼녀라지만 발데즈가도 중앙 귀족가인데, 어째서…….’
발데즈 백작 역시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헤베타는요?”
그리고 그 몰이해를 넘어 그녀를 더 끔찍하게 하는 것은 길리언 황자와 엘리자베스의 조합이었다.
“연회 때, 헤베타는 별다른 움직임이 없었나요?”
“예. 헤베타는 당시 사건 동선에 겹친 곳이 없었습니다.”
홀에서도 못 본 것 같은데? 그 주목받기 좋아하는 아이가 일찍이 떠났다고? 어떤 의미로는 그게 더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