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화. 양측의 방책
대체 아버지는 왜 이렇게 일찍 몸져누우셨단 말인가. 아들이 무사히 계승을 완료하고 나서 아프더라도 아팠으면 얼마나 좋았겠는가. 그럼 바로 황위를 이을 수 있었을 텐데.
상황이 이러니…… 음? 잠깐.
‘안 될 건 뭐야?’
황명이라고 하면 되잖아?
황제가 아프다는 얘기는 반대로 하면 누구도 그 진위를 알아낼 수 없다는 말도 된다.
‘그래. 아버지가 건강하셨어도 분명 그러라고 하셨을 거야.’
황자의 표정이 환해졌다.
그는 벌떡 일어나 황후궁으로 향했다.
* * *
델본에서 여러 일을 마치고 사이나와 콘스탄틴은 황도로 복귀했다.
그리고 그들이 복귀하자마자 황제의 전령이 크레이머 타운하우스의 정문을 넘었다.
황실 의전에 따라 특유의 복장과 기를 든 전령의 모습은 눈에 확 뜨이는 외양이라, 중앙 귀족가들은 금세 크레이머 공작가에 황제의 인장이 박힌 무언가가 넘어갔음을 알 수 있었다.
그들은 열심히 궁금해하며 추측했다.
새로운 맹약을 축하하는 친서일 것이다. 아니, 작위 관련한 내용일 것이다 등.
그런 와중에 황궁 연회 일정이 발표되었다.
새 소식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귀족들은 반색했다.
과감하기까지 했던 소환령에 비해 맹약자에 대한 황실의 움직임이 기이할 정도로 조용하여 촉각을 세우고 있던 그들은 드디어 때가 되었다며 기대심을 품기 시작한 것이다.
“새 맹약자는 나와서 황제의 서를 받으시오!”
전령은 크레이머 저택의 포치에서 근엄하게 외쳤다.
함께 동행한 음악대가 뿔 나팔을 불었다. 웅장한 음색에 맞춰 전령이 고급스럽게 생긴 상자를 열었다. 안에는 벨벳 천이 깔려있고 그 위에는 하늘색 고급 광택지에 황가의 수호령을 의미하는 초록색 인장이 떡하니 찍힌 서신이 올라와 있었다.
“황가의 전령을 뵙습니다.”
그러나 황제의 전령을 맞기 위해 나온 것은 크레이머 공작이었다. 매우 살벌한 표정은 추가 옵션이었다.
전령은 몸에 한기가 퍼지는 느낌에 슬쩍 몸을 떨었으나 애써 목을 가다듬었다.
“…황제 폐하의 친서인지라 수신자가 직접 수령해야 하오.”
“치인-서?”
콘스탄틴은 한쪽 눈썹을 으쓱하며 전령을 바라보았다. 정말 친서가 맞느냐는 느낌으로 말을 늘이는 것을 보면서도 불경하다 나무라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 그렇소.”
황제를 대신하여 나온 전령이니 공작일지라도 하오체를 쓰는 것이 당연한데, 전령은 쓰면서도 매우 불편하다는 생각을 했다.
“제가 수령하지요.”
친서라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공작은 개의치 않았다.
“하, 하지만 직접…….”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
“맹약자는 증명식 전에는 얼굴을 드러내고 싶지 않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양해 부탁드린다고 전해 주십시오. 서신은 제가 바로 맹약자에게 전달할 것이니 걱정 마시고요.”
“…….”
이대로 돌아가면 황자에게 경을 칠 것 같았지만 별수 없었다.
공작 앞이라고 편치는 않았기 때문이다. 스멀스멀 올라오는 한기에 곧이라도 목이 달아날 것 같은 기분이 드는지라 더 이상은 버티기가 힘들었다.
“그, 그럼 답이라도 알려주시오. 바로 답장을 받아오시길 원하셨소.”
“황제 폐하께서요?”
공작이 다시금 그를 지그시 응시하며 되물었다.
“그으-렇소이다.”
“흠… 알겠습니다.”
짜고 치는 연극이지만 그러려니 해주지, 하는 태도로 크레이머 공작이 돌아섰다.
“답신은 곧 받아오겠습니다. 차라도 한잔하며 기다려 주십시오.”
“…알겠소.”
“전령을 응접실로 모셔라.”
집사장에게 지시를 남기고 공작이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공작의 불손한 태도와 달리 집사의 태도는 극진했으나, 묘하게 불편한 것은 똑같았다.
그 괴리에 대해 왜인지 잘 모르겠는 상태로 전령은 차를 마셨다.
그동안, 사이나는 콘스탄틴이 넘겨주는 서신을 편지칼로 뜯었다.
“뭐라고 합니까?”
“…황명이네요.”
“친서도 모자라서 황명, 입니까?”
“그러게요. 하지만 이리 떡하니 황제의 인장이 찍혀 있으니, 황명이라고 봐야겠죠.”
콘스탄틴은 관자놀이를 누르며 옅게 한숨을 쉬었다.
“황실 연회에 꼭 참석하라는 내용이에요.”
“증명식도 안 거치고 황실 연회라…….”
“얼굴도 모를 텐데 굳이 참석하라는 저의가 뭘까요?”
“진짜 황제 폐하라면 얼굴을 몰라도 알아낼 수 있을 겁니다.”
맹약자들끼리는 서로를 탐지할 수 있다고 하니까 그렇겠지.
“폐하시라면 그렇겠죠.”
황제 폐하는 현재 혼수상태에 가까울 텐데? 인지력을 가지고 상황을 판단해 인장을 찍을 만한 상태가 아니라는 뜻이다.
황제의 인장이 황후 폐하에게 있다는 건, 암묵적 진실이고.
그리니 이건 아마도 ‘황자’의 저의겠지.
“나름 알아낼 방책이 있으니 이렇게 구는 것이겠지요.”
그리고 콘스탄틴이 생각할 때 그 방법은 하나밖에 없었다.
‘그건…….’
“뭐든 좋은 의도는 아니라는 건 확실하네요.”
“아마도, 아니, 분명… 그럴 겁니다.”
콘스탄틴이 생각에 빠진 사이, 사이나는 간단하게 답신을 작성했다.
어쨌든 황제의 인장은 진짜였고, 그에 따라 사이나의 대답은 한 가지밖에 없었다.
알았다는 내용이 담긴 서신을 봉투에 담아 밀랍으로 봉했다. 정체를 드러낼 수 없으므로 인장은 찍지 않았다.
대책은 그다음 생각할 일이다.
콘스탄틴이 답신을 받아 응접실로 향했다.
전령은 공작을 마주하자 다시금 소름이 끼쳐서 답신을 받자마자 얼른 저택을 떠나 황성으로 돌아갔다.
* * *
황제의 친서에 대한 답장이라고 하기엔 불경할 정도로 짧은 서신.
서신 쓰는 법에 대해 교육을 제대로 못 받은 자라면 그럴 수도 있을 테지만 황자는 필체에 주목했다.
‘이런 우아한 필체가 평민일 리는 없다.’
평민인 척하기 위해 이렇게 짧게 쓴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필체부터가 틀려먹었다.
또한 필체에서 풍기는 느낌이 부드러웠다. 맹약자는 여성이라는 결론을 다시금 내주었다. 여성들이 주로 쓰는 동글동글한 서체는 아니었으나 특유의 서정적임이 있는 우아한 필체였다.
그는 단적으로 ‘맹약자는 귀족 여성’이라고 단정 지었다.
그렇게 연회날이 되었다.
황도의 귀족이란 귀족은 모두 모여든 듯 북적거리기 시작한 황궁의 대연회홀.
본래 느지막이 등장해야 정상인 황자가 일찌감치 연회장에 출입해 있었다.
눈에 띄지 않는 2층 난간 안쪽에 있기는 했지만 말이다.
“찾아내면 바로 알려주시게.”
그리고 황자는 혼자가 아니었다.
“예. 그러지요.”
눈밑에 점이 있는 눈매가 사르르 휘어지며 화사한 미소를 짓는 남자.
“아무래도 크레이머 공작이 아직 뭘 모르는 맹약자를 속여서 자신의 제어 안에 가둔 것 같단 말이지. 이런 식으로 자신의 가문의 힘을 늘리다니 그대로 두었다가는 다른 공작가도 피해를 볼 것이 분명해. 부당하기도 하고 말이야.”
황자는 상대가 동조해 주지 않을 리가 없다고 생각하며 말을 이었다.
“흠. 그러게요. 그리 싸고도는 이유가 뭘까요?”
여전히 미소를 그리는 입매는 남자의 외양을 매우 화사하게 어필했다.
부드러운 핑크색 머리카락의 남자, 루카스 애버딘 공작이었다.
계승자가 아닌 황자가 맹약자의 정체를 알아내는 방법. 그것은 바로 이미 계승자인 누군가와 공조하는 것뿐이었다.
황자는 그 대상을 애버딘 공작으로 고른 듯 보였다.
“뻔한 것 아니겠나? 힘을 독점하려는 게지.”
황자는 절대로 그것을 좌시하지 않겠다는 태도로 단호한 표정을 지었다.
“크레이머가요? 독점이요?”
가진 힘도 지긋지긋해하는 그 새끼가 뭘 더 독점하려고 하는 게 전혀 상상이 가지 않아서 루카스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자는 예전부터 오만하기 짝이 없었어! 그러니 힘을 독점하려는 것도 당연하지 않은가!”
하지만 황자는 뭐 당연한 소리를 하냐는 듯 분개했다.
“번번이 황실의 권위에 도전하고는 했으니, 흥. 모르지. 맹약자가 둘이나 있는 가문이 된 김에 제가 왕이 되고자 하는 불순한 마음을 품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 아니겠나?”
맹약자의 직계 자손이 어찌 이렇게 맹약자에 대한 이해도가 낮은 것인지 참으로 이해가 가지는 않았으나, 상냥해 보이는 애버딘 공작이라고 해도 관심 없는 영역에 대해서는 어떤 관여도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사실 콘스탄틴과 다르지 않았다.
아니, 이건 4대 공작들이 다들 비슷하리라.
대놓고 차갑게 무관심하냐, 상냥해 보이지만 무관심하냐의 차이일 뿐.
그리고 루카스는 후자였다.
황자는 전혀 모르는 것 같았지만 말이다.
‘역시 이해도가 참으로 낮아. 이러기도 쉽지 않은데 말이지.’
외부 가문에서 자란 것도 아니고, 떡하니 차기 계승자 후보로 자라났고, 대놓고 사령의 대여자이기도 한데 이렇게 이해도가 낮기도 힘들 것이다.
하지만 어차피 황가의 수호령이란, 말 그대로 ‘존재’하기만 하면 되는 종류의 것이다. 당연히 숨겨진 속성들이 있기야 할 테지만, 제국의 수호라는 속성 외에는 루카스는 딱히 관심이 없었다.
마음과 시간을 들여 황자에게 뭘 알려주거나 어울리고 싶은 생각은 더더욱 없었다.
“그러니 맹약자를 찾아내자마자 내게 알려주게.”
“예, 뭐.”
“바로 알려주어야 하네, 알겠는가?”
루카스는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입구 쪽으로 시선을 고정했다.
500여 년 만의 새 맹약자의 정체는 그 역시도 궁금했으므로.
콘스탄틴이 그리 꼭꼭 숨기는 사람이라 더 궁금하기도 했고 말이다.
* * *
황도에 복귀 후 사이나는 나름 바쁜 시간을 보냈다.
연회 참석 전에 할 일이 꽤 많았기 때문이다.
그 일 중에는 촉박한 시간 안에 새 의상을 맞추는 것도 있었다.
사이나 부부 외에 연회에 참석할 사람은 루퍼트와 웨슬리, 그리고 맹약자를 행세할 여성 두 명. 그중 한 명은 다리엘이었다.
사실 행세까지는 아니고, 시선을 분산시키려는 목적에 더 가깝기는 했다.
둘 다 여성인 것은 황자가 다리엘을 보고 확신하는 것처럼 굴었기 때문에 이쪽이 혼란을 주기에 더 좋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연회까지 남은 시간이 너무 짧아 걱정했으나, 사이나는 전에 썼던 방법을 또 사용했다.
바로 10배수의 힘이다. 역시 불가능을 가능케 해주었다.
마담 샤를리즈에게서 매달 고정으로 새 드레스를 받고 있어서 사이나까지는 새로 맞추지 않아도 되니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렇게 연회날이 되어 그들은 황성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