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화. 수상하다?
“……유, 리??”
유리다. 유리야. 분명… 유리…!
“너- 사람 형태로도 실체화를 할 수 있는 거였어?!”
-뭐, 예외적이긴 경우이긴 한데. 나는 가능해.
“그, 근데 왜 여태…….”
-어쨌든 지금 난 수호령이니까, 인간형보다야 짐승인 게 더 적합하지 않겠어?
사이나는 생각지도 못한 모습에 눈을 번뜩이며 그를 살폈다. 놀라움과 반가움이 교차되어 되레 말문이 막혔으나 눈은 끊임없이 그를 관찰했다.
유리의 모습과 같지만 묘하게 좀 달랐다.
우선 전체적으로 색소가 약간 흐렸다. 그녀와 본래 같은 색이었던 흑발이 사이나의 것처럼 짙지 않고 재색에 가까웠다.
그리고 분위기. 말 그대로 뭐랄까, 미묘하게 인간 같지 않은 분위기를 풍겼다.
-이제 널 업어줄 수 있지. 자, 업혀.
“…….”
이렇게 인간형으로 나타나도 아빠와 세이지는 못 알아보겠지?
새삼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내가 이럴 정도면 유리는 배로 슬플지도 몰라.’
마음을 추스르며 사이나는 천천히 유리의 등에 업혔다.
곧 유리가 몸을 일으켰다.
수호령이라 그런지 닿은 곳에서 체온이 넘어오는 느낌이 없었다. 그것은 실제하되, 육신과는 다르다는 것이 실감되는 느낌이라 확실히 위화감이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사이나는 감격스러웠다.
욜리가 유리라는 것을 알지만, 욜리의 형태로만 볼 때는 못 느꼈던 감정들이 인형(人形)의 상태로 맞닥뜨리자 넘치도록 차올랐다.
예전에 둘이 함께하던 시절의 언어들이 돌아왔으며, 당시의 습관들이 다시 찾아와 몸에 엉겨 붙는 것 같은 기분이다.
사이나는 업히자마자 다리를 달랑거리며 그의 어깨에 볼을 붙였다. 그리고 힘을 쭉 빼고 아주 편안하게 기댔다.
“너 밤 외출 한참 다니던 때 말이야…….”
-응.
“한번은 나도 그 나무를 타고 내려가려다가…….”
-응.
“……그래서 거기에 내가…….”
-응.
조곤조곤 이어지는 대화에 마치 과거로 돌아간 기분이 든다.
그러한 안정감 때문일까. 사이나의 눈이 스르르 감겼다.
체온은 달랐으나, 그가 주는 편안함은 여전했다. 콘스탄틴이 주는 편안함과는 비슷하면서도 좀 달랐다.
후자의 것이 그의 강함을 믿는 것에서 오는 편안함 같은 거라면, 전자는 자궁을 공유하고 태어나 성장의 시간들을 함께한 핏줄이 주는 자연스러운 편안함이었다.
믿을 수 있는 사람에게 업혀, 부드럽게 흔들리는 박자는 자연스럽게 그녀를 수면의 세계로 이끌었다.
어느새 작게 숨소리만이 남았다.
유리는 그 상태 그대로 조심히 저택에 스며들었다.
사이나의 방에 인기척이 없는 것을 확인한 뒤 들어가 그녀를 침대에 뉘였다.
이불을 꼼꼼히 덮어주고 손가락으로 콧등을 작게 톡톡 두들기며 속삭였다.
-잘 자.
그리고 방을 나서는데, 때마침 시선이 느껴졌다.
‘사야. 네 집요한 남편이 돌아온 모양이야.’
그의 등 뒤로 꽂히는 시선은 꽤나 성가신 종류의 것이었으나, 유리는 굳이 돌아보지 않았다.
뭔가 수상함을 느꼈는지 그가 뒤를 쫓는 것이 느껴졌다.
유리는 걸음을 빨리하여 모퉁이를 돌자마자 실체화를 풀어 몸을 숨겼다.
몸을 숨기기 무섭게 콘스탄틴이 덩달아 모퉁이를 돌았다가 굳은 표정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것을 엿보며 유리는 속으로 웃었다.
‘네 남편 약 좀 오를 거다.’
흐릿한 기운이 킬킬대며 점차 사라졌다.
* * *
사이나는 불현듯 정신이 들었다.
어딘가 짓눌리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압박감에 크게 숨을 들이켜며 깨어났다.
그런데 자신을 품에 싸다시피 안고 잠든 콘스탄틴을 보자 왜 그랬는지 알 것 같았다.
사이나는 길게 심호흡을 몇 번 하고는 슬금슬금 몸을 비틀었다.
어찌나 얽어 안았는지 누가 보면 자는 동안 자신이 도망이라도 갈 거라고 생각한 사람 같았다.
‘언제 잠들었더라.’
마지막 기억을 더듬던 사이나의 눈이 커졌다.
‘맞아, 유리…!’
그의 등에 업혀서 떠들다가 언젠지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
갑자기 유리를 당장 불러 다시 확인하고 싶다는 충동이 들었으나 참았다.
‘분명, 꿈은 아니니까.’
날이 밝고 확인을 해도 충분할 것이다.
다만, 금세 다시 잠으로 복귀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살짝 목이 마르기도 해서, 우선은 침대에서 벗어나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사이나는 그가 깨지 않도록 조금씩 몸을 움직여 결국 침대에서 벗어나는 것에 성공했다.
침대 옆 테이블에 놓인 물병에서 물을 따라 마시고, 컵을 내려놓으려다가 무심코 바닥을 보는데 오늘따라 묘하게 자신의 발에서 이어지는 그림자가 거슬렸다.
‘…뭔가가 좀…….’
달빛이 꽤 밝다고는 하지만 희미하게 윤곽을 드러내야 할 그림자가 유독 짙은 것같이 느껴진다면 착각일까.
게다가 묘하게 익숙하면서도 낯선 기운이 느껴져 사이나는 본능적으로 수호령의 힘을 일으켜 자신의 주변에 휘돌렸다.
파앗-
‘엇?!’
뭔가가… 튕겨져 나갔다?
자신의 그림자에서.
‘…착각이 아니지?’
아니다. 뭔가가 분명 튕겨져 나갔다.
자신이 하고도 놀라 굳어 있는데 갑자기 콘스탄틴이 벌떡 일어났다.
“사야!”
“…네?”
“무슨, 무슨 일입니까?”
그는 화들짝 놀란 기색을 하고 다가와서는 그녀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다급하게 훑었다.
마치 어딘가 다치지 않았냐는 것처럼.
“혹시 누군가 또 침입했습니까?
“…네? ‘또’요?”
“어떤 놈이 혹시 놀라게 한 거면…….”
부부끼리 자는 침실에 이 야밤에 누가 오겠어요.
“아니면 됐습니다. 그나저나…….”
콘스탄틴은 여전히 어딘가 굳은 표정이었다.
“이 밤에 왜 깨어 있습니까.”
“목이 말라서요.”
사이나는 답답해서 일어났다는 말 대신 그렇게 말했다.
그는 사이나의 손에 들린 컵을 보더니 자신도 목이 말랐는지 가져갔다. 사이나가 마시고 남은 물을 기울였다.
“그러다가 제 그림자에 이상한 것이 있어서…….”
“풉.”
갑자기 그가 물 뿜는 소리를 냈다. 그리곤 제 얼굴을 가리며 고개를 얼른 돌렸다.
그러고 보니 그 기운이 콘스탄틴의 것과 좀 비슷했던 것 같은데?
사이나는 물끄러미 그를 올려다보았다.
“당신이 그랬어요?”
“…콜록. 크흠. 안전을 위해서…… 그대의…….”
갑자기 매우 멋쩍은 표정을 짓던 그는 이내 장황한 변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흐응. 정말요?”
“그렇습니다. 정말 다른 의도가 아니라…….”
“절 감시하려고 하신 게 아니라는 거죠?”
“절대 아닙니다. 다만… 그대의 근처에 사건 사고가 많아서 알림용으로…….”
사이나는 기억을 더듬었다.
그러고 보면 그녀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신기할 정도로 그가 적시에 나타나고는 했지.
그땐 매번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느라 의문을 가질 겨를도 없었고, 막연하게 뭔가 수호령의 능력이 있으니까 그랬겠지 했는데(결과적으로 맞기는 한 가정이었다.), 이런 방법이었을 줄이야.
‘꽤 오래전부터 뿅 하고 나타났던 거 같은데… 대체 언제부터야? 그리고 검은 새도 있었는데…… 그럼 이중으로 심어둔 건가?’
결혼 전에도 그런 일이 몇 번 있었고… 심지어 깊은 사이(?)가 되기 전에도 그러지 않았나?
“…….”
그녀의 갸름한 시선의 의미를 알아챘는지, 콘스탄틴은 또 식은땀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흠. 솔직히 말해 봐요.”
“…….”
“저 언제부터 좋아하셨어요?”
그의 귓가가 벌게지는 것이 보였다.
“말 안 해주시면 계속 의심할 거예요. 감시 목적으로 그러신 거라고?”
“그…….”
콘스탄틴은 눈가를 커다란 손바닥으로 재차 쓸었다.
“정확하게 깨달은 건… 잠결에 내가 사랑 고백을 했다며, 그대가 농담했을 때입니다.”
“…그, 우셨을 때요?”
“……예. 농담이 절대 진담이 될 수 없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그게 너무 아쉬운 마음이 들었고 그래서 오히려 내 마음을 알게 되었지요.”
“어….”
“하지만 곰곰이 더듬어보면, 그보다 훨씬 이전부터 그대를 좋아했습니다.”
이번엔 사이나가 눈을 가리고 싶었다.
짙게 가라앉은 눈매로 그녀를 들여다보는 파란색 눈동자가 지나치게 진지하고 깊어 보여서 약간은 압도당하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대가 날 피하려고 애쓰던 그때부터 이미…….”
느릿하게 그의 손이 다가왔으나, 붙들린 것처럼 피하지 못했다.
가볍게 닿은 것 같지만 묘하게 그녀의 턱을 고정시키며 그가 고개를 내렸다.
부드럽게 물어온 입술이 천천히 살결을 쓸다가, 점차 농밀해졌다.
“애가 닳아 죽을 지경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는 어떻게, 혹은 얼마나 애가 닳았었는지 보여주고 싶다는 것처럼 그녀를 탐해오기 시작했다.
다시, 부부의 시간이 시작되었다.
* * *
황도의 분위기가 묘했다.
새 맹약자의 존재를 앞두고 뭔가 새로운 사건이 터질 듯, 말 듯 한 날들이 지속되면서 긴장감만 고조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와중에 증명식이 무산되었다.
마음이 급해 맹약자를 황도로 끌어들이는 데에는 성공했으나, 그 이후를 생각하지 못했으니 황자의 실책이었다.
아니, 현 상황을 감안해서 어떻게 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었는데 녹록지 않았다는 표현이 더 맞겠다.
증명식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현존하는 맹약자들의 인정.
당연히 황제, 그리고 그다음이 4대 공작의 공식적 승인이었다.
황자라고 해서 그걸 몰랐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마음이 급하다 보니 우선 4대 공작의 각개 승인을 받아 약식으로 증명식을 치르고, 나중에 제가 황제가 된 이후에 정식으로 작위와 함께 증명 절차를 따로 치를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공작들을 설득하려고 했다.
하지만 웬걸.
때마침이라고 해야 할까?
남부 왕국들이 단체로 약이라도 먹은 것인지 주제도 모르고 날뛰기 시작했다.
남쪽 연합군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 보니 동남의 로즈데일과 남서의 프랜시스가 모두 황도로의 소환을 거부했다.
정확히 말하면 거부라기보다는 당장 영지를 떠날 수 없다며 사정을 알려왔으나, 황자 입장에서는 그게 그거였다.
“빌어먹을!”
도무지 제 뜻대로 되는 것이 없었다.
남은 공작 두 명으로는 무얼 어떻게 할 수가 없을뿐더러, 둘 중 한 명은 크레이머 공작이니 그를 방해하지나 않으면 다행일 것이다.
‘대체 어떻게 해야 맹약자를 만날 수 있을까.’
우선 누군지를 모르니 참석을 하게끔 유도하는 것 자체가 난제다.
참석을 한다고 쳐도 정확히 누군지를 모르니 그것도 문제고.
‘그렇다고 해도 분명 방법이 있을 거야.’
황자는 고심했다.
생각을 해, 생각을. 넌 황제가 될 사람이다. 생각을…….
황명이라고 하면 무조건 참석할 수밖에 없을 텐데 상황이 너무 아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