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화. 시기의 문제
사이나는 지난밤을 떠올리고는 저도 모르게 얼굴을 붉혔다.
“앗?!”
그 순간, 순식간에 허리가 잡혀 그에게 끌려갔다.
어느새 잠에서 깬 그가 그녀를 내려다보며 느른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내 부인께서 왜, 이리 얼굴을 붉히고 계실까.”
그의 손이 그녀의 종아리를 잡더니 곡선을 따라 타고 올랐다.
“지난밤이, 부족했던 걸까요?”
“…에, 아, 아뇨!”
매번 과하면 과했지 부족할 리가 없었다.
“분명 야한 생각을 한 얼굴입니다만.”
틀린 말은 아닌데 맞다고 하기엔 또 이상하다.
“그게 아니라 어제 당신이 너무 격하게 군 것이 생각나서…….”
“그래서, 별로였습니까?”
“그건 아닌데….”
“그럼 괜찮았던 거군요?”
뭉근하게 붙어오는 단단한 몸을 그냥 두었다가는 보나 마나 또 침대에서 나가지 못할 것이 틀림없었다.
근래 사이나가 꽤 저돌적으로 변하기는 했으나, 그래도 침대에서 남편과 중천까지 뒹굴다가 가족의 얼굴을 보는 것은 좀 민망했다.
“여기선… 안 돼요. 아침인걸요.”
“조금만 더요…….”
“나중에 우리 집에 가서요, 응?”
사이나는 깊이 파고들려는 그를 붙잡으며 다급하게 속삭였다.
그러자 그가 일순 몸을 굳히더니, 갑자기 제 얼굴을 큰 손바닥으로 가렸다.
“우리…, 하아…….”
또 이상한 포인트에서 꽂혔는지 그의 몸이 매우 흥분하는 것이 느껴졌으나, 다행히 계속 진행(?)할 생각은 없는 듯했다.
“그래요. 나머지는 ‘우리 집’에서 하는 겁니다. 배로 받아낼 테니 각오하십시오.”
“…뭘 하고 싶으신 건데요?”
콘스탄틴은 그저 의뭉스럽게 웃기만 했다.
마침내 침대에서 벗어나 씻고 옷을 갈아입은 둘은 각자의 스케줄을 위해 흩어졌다.
콘스탄틴은 세이지를 만나 델본의 기사단과 병력, 수비 체제를 점검하고 영지의 주요 길목을 함께 살펴본다고 했다.
상대적으로 외출 준비가 자유로운 그가 먼저 나간 사이, 사이나는 단장을 위해 하녀들을 불러들였다.
“드레스는 이것으로 하시나요?”
“그럼 장신구는…….”
“머리 장식은 이것으로…….”
분주하게 움직이며 사이나를 꾸며주는 데에 힘쓰는 하녀들의 얼굴에 즐거움이 떠올라 있었다.
사이나가 결혼을 해버리자 여성 직계가 없어 꾸밀 사람이 없었을 것이다. 간만에 다시 꾸밀 사람이 생겨 하녀들도 즐거워 보였다.
단 한 사람만 빼고.
“너, 이름이 뭐니?”
“에, 에이미입니다.”
“에이미라…. 맞네, 너구나?”
“…예?”
“전에 매번 내 머리 손질을 해주던 아이 아니니?”
“아… 예. 맞습니다. 부인.”
아까부터 다른 하녀와 달리 그녀를 흘끔거리며 살피는 눈빛 때문에 바로 눈에 띄었다.
그렇지 않아도 불러다가 한번 보려고 했는데 딱 눈앞에 나타났다.
“혹시 너 날 따라 크레이머 공작저로 일터를 옮길 생각이 있을까?”
“……예에?”
“머리 손질을 참 잘하는 것 같아서 그래. 북동령을 말하는 건 아니고 타운 하우스를 말하는 거란다. 내가 황도에 있는 동안에만 일을 하면 되니까 어렵지는 않을 거야.”
“저, 정말요?”
“응. 아마 공작가라 월급도 더 높을 거고, 옮기는 것 관련해서는 내가 집 사장에게 말을 해둘 테니 부담 느끼지 않아도 된단다. 어떠니?”
“가, 감사합니다!”
하녀의 승낙에 사이나는 작게 미소 지었다.
에이미라는 하녀는 제게 닥친 이 행운이 믿기지 않는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연신 감탄의 말을 내뱉었고, 다른 하녀들은 부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내심 자신에게도 권해주길 바라는 눈빛이었다.
하지만 사이나는 에이미에게만 권하고는 단장이 끝나자 바로 하녀들을 내보냈다.
‘감사해하긴 이르지.’
부러워할 일도 아니었다.
에이미라는 하녀는 목적이 있어서 데려가는 것이었으니까.
‘얌전히 할 일만 한다면 살 것이고, 또다시 애먼 짓을 한다면…….’
그 대가를 받게 될 것이다.
사이나는 전에 읽었던 엘리자베스의 조사 결과를 떠올렸다.
그녀에 관해서는 알면 알수록 충격적이었다.
[조사자는 3년 전 드보프가의 영애에 대해 은밀하게 탐문했던 흔적이 있음. 성격, 성향, 집안 내 위치 및 인간관계 등의 자료를 수집함.]
의도적으로 접근한 건 알았지만 이렇게까지 본격적으로 작정했을 줄은 몰랐다.
[드보프 가의 하녀 한 명이 매수된 정황이 있음. 에이미라는 이름의 하녀와 조사자의 하녀가 지속적으로 만난 정황이 발견됨.]
에이미. 방금 사이나와 대화를 나눈 바로 그 하녀였다.
‘그간 돈을 받고 내 정보를 엘리자베스에게 팔아왔다는 거지?’
엘리자베스와 친해지기 전에 사이나는 외출을 할 때마다 그녀를 상점 등에서 자주 마주쳤다.
몇 안 되는 모임에 참석했을 때도 이상할 정도로 자주 마주쳐서 인연인가, 하고 생각했던 기억이 있었다.
그런데 그게 우연이 아니었다니.
그녀가 데뷔탕트 볼 준비에 심드렁해할 때나, 혼수 상태에서 깨어났을 때도 어찌 알고 항상 시기적절하게 그녀를 찾아와 마음을 바꾸고는 했었지.
그것도 우연이 아니었던 것이다.
어이가 없었다.
[황자에게도 의도적으로 접근. 일레인 반즈의 일행으로 황자에게 안면을 텄으며 일레인 반즈의 파혼 전부터 황자 궁에 드나든 정황 발견.
그리고 정령력 측정을 받고 헤베타로 입성.]
콘스탄틴이 작정하고 뒤를 팠는지, 조사 결과는 꽤 방대했다.
그 안에는 사이나와 관련한 내용 말고도 엘리자베스가 전반적으로 행한 뒤 구린 짓이 아주 많았는데, 십 대 중반만 해도 약간 어설펐던 수작이 뒤로 가면서 상당히 치밀하고 용의주도하게 바뀌었다는 분석 결과도 있었다.
다만, 흔적이 남은 것은 불행하게도 엘리자베스가 부유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발데즈가의 재산이 많지 않다 보니 삼녀인 엘리자베스의 내탕금은 보잘것없었고, 그러다 보니 자신의 장신구를 팔아야만 이런 뒷공작에 필요한 착수금이나 포섭 비용을 해결할 수 있었던 것.
또한 그 장신구 역시 이런 필요에 의해 의도적으로 남자들을 유혹하고 부추겨 받아낸 것들이 대다수였다.
현금이 아니라 보석이나 장신구를 썼기에 추적이 가능한 흔적이 상당히 많이 남은 것 같았다.
‘그저 사교성이 좋은 거라고 생각했던 게 얼마나 오산인지…….’
보아하니 엘리자베스의 뒷공작은 여전한 것 같았고, 각 가문에 심어둔 끄나풀들과의 접선도 여전한 듯했다.
얼마 전엔 꽤 유서 깊은 후작가의 영애가 엘리자베스의 시녀로 들어갔다고 해서 사교계가 꽤 들썩였는데, 보니까 이런 식으로 하녀를 매수하다가 약점을 잡은 모양이다.
후작 영애씩이나 되는 자가 왜 황태자비도 아닌 헤베타의 시녀로 들어갔는지 이해가 안 간다며 말이 많았는데 다 이유가 있었다.
어떤 의미로는 무서울 정도로 이 바닥의 생리를 잘 알고 이용을 하고 있지 않은가.
‘전에 공작부인이 거저 된 건 아니었구나.’
아무런 접점도 없었던 콘스탄틴의 사정을 어찌 알고 계약 결혼을 권할 수 있었을까 했더니, 이런 식으로 각 귀족가의 속사정을 꾸준히 수집해 온 것이라면…….
사이나의 눈빛이 서늘해졌다.
‘이번엔… 네 뜻대로만은 되지 않을 거야.’
뿌린 대로 곧 거두게 될 것이다.
* * *
하녀 에이미에게 눈을 하나 붙여두고, 사이나는 아버지를 찾았다.
둘은 꽤 오래 둘이서만 대화를 나누었다.
드보프가의 수호령에 관해(지금은 맹약이 끊겼지만) 말이다.
전에 콘스탄틴과 대화했던 대로 가주만 아는 내용이 있을까 하여 찾은 것인데, 정말로 그런 내용이 있었던 것.
가주만 알아야 하는 내용이니 원칙대로라면 사이나가 상관할 화제가 아니겠으나 지금은 특수 상황. 맹약자가 된 사이나의 입장을 고려하여 드보프 백작은 자신이 아는 것을 공유했다.
“드보프가의 수호령은 ‘길잡이’ 혹은 ‘갈림길의 안내자’라고 불렸다고 하더구나.”
반딧불처럼 작게 빛을 내는 수호령으로 잘 모르는 사람이 보면 빛의 수호령의 일종이라고 생각하기 쉬웠다고 했다.
“실상은 달랐다더군.”
어떤 물리적 능력보다는, 살면서 커다란 기로에 놓였을 때 옳은 길을 제시해주는 수호령이었다고 한다. 백작은 드보프가가 오랫동안 몰락하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였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그러나 몇 대 전 가주가 사랑해서는 안 될 사람을 사랑하게 되었고, 옳은 것이 아님을 알면서도 그 길을 고집했다가 거의 멸문 직전까지 가게 되었다고 한다.
엄청난 분쟁에 휩싸이며 남성 쪽 직계가 거의 다 죽고 먼 곳으로 시집을 갔던 딸의 후손을 통해 겨우 가문을 이었지만 이 시기를 통해 수호령을 잃어버렸다고 한다.
사이나는 족보의 기록이 어그러졌고 초상화가 몇몇 비던 그 시기를 말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욜리랑은…….’
연관이 있는 듯도 하고, 전혀 상관없는 내용처럼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가문의 역사와 수호령의 특성에 대해 조금 더 깊게 이해하게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나쁘지 않았다.
뭐든 알아두면 나쁠 것은 없기도 하고.
* * *
아버지와 긴 대화를 나누고 함께 저녁 식사를 할 때까지 콘스탄틴과 세이지는 돌아오지 않았다.
꽤 멀리까지 간 모양이다.
무작정 그를 기다리기보다는 할 일이 있었다.
델본에 왔으니 꼭 들를 곳이 있지 않은가. 사이나는 씩씩한 걸음을 하고 후원으로 향했다.
“와, 엄청 커졌네?”
사이나는 몇 달 만에 찾은 후원에서 유리 나무 자리의 싹이 얼마나 자랐는지 보러 왔다가 깜짝 놀라는 중이었다.
본래 싹이었던 그것은 생각 이상으로 많이 자라서 이미 작은 묘목의 형태를 갖추고 있었다.
-흐음.
욜리는 묘한 반응이었다.
일부러 같이 오려고 한 것은 아니지만, 같이 왔다.
“여기서 널 얻었는데, 기억 안 나?”
-기억나.
“근데 반응이 왜 그래?”
-새삼 자리를 잡아가는 것들이 신기해서.
“너도 신기한 게 있어?”
-뭐 당연한 소릴.
그리고는 덧붙였다.
-사이나, 네가 이렇게 내 옆에 있는 게 제일 신기해.
“…….”
그건 내가 할 말 같은데.
-네게 해를 끼치려 하는 것들을 맹세코 가만히 두지 않을 거야. 넌 절대, 사라지지 마.
유리가 겪어야 했던 시간의 무게가 느껴지는 말이다.
사이나는 마음이 묵직해지는 기분이 들었지만, 그렇다고 그에게 그런 기색을 보여주고 싶지는 않았다.
“아주, 듬직하네! 내 오라버니!”
비록 30분 오빠이기는 하지만! 사이나는 나름 발랄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지금 분위기면 네가 자주 하던 ‘오빠한테 업혀!’ 딱 그 타이밍인데!”
오빠 행세를 할 때마다 유리가 자주 하던 말이다.
-지금도 업어줄 수 있는데, 업힐래?
“욜리 등에 타기는 싫은걸.”
그는 씩 웃더니 갑자기 사라졌다.
“……?”
그리고는 이내 그녀의 등 뒤에서 인기척을 내며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