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화. 꽤 괜찮은 계책
와장창-!
방 안은 난장판이었다. 멀쩡한 물품을 찾기가 더 힘들 정도로 온통 박살이 나 있었다.
“으아아- 빌어먹을!”
몸과 함께 고고한 자존심이 한껏 바닥에 처박히고 만 황자였다.
“황태자가 아니십니다? 황태자가 아니십니다아?! 하!”
곱씹고 곱씹을수록 화가 더 솟구쳤다.
“감히! 감히!”
자신은 이 나라의 ‘유일한’ 황자다. 굳이 황태자와 구분 지을 필요조차 없었다. 당연히 황태자의 권리는 자신의 권리였다.
‘그 자식은 무얼 믿고 항상 이리 방약무인한 거지?!’
쾅-!
황자는 더 이상 깨부술 것이 없어지자 방의 문이라도 부수려는 듯 난폭하게 열었다. 그러고는 씩씩거리며 복도를 걸었다.
길리언은 몇 년째 도무지 기약이 없는 계승의 증거 때문에 말 그대로 미치기 일보 직전이었다.
빌어먹을 계승의 증거. 태생 자체가 황족임을 증명하는데 대체 왜 자신이 그까짓 것에 발목이 잡혀야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왜 임신을 못 한단 말인가! 대체 왜!’
있는 자궁에 주는 씨를 받아서 틔우기만 하면 되는 간단한 일을 못 해서 자신을 이렇게 힘들게 하다니.
그간 자신을 스쳐 간 여자들의 면면을 떠올리며 길리언은 욕설을 내뱉었다.
자신이 뭐 큰 걸 요구했던가. 황실에서 내탕금 줘, 먹여줘, 재워줘, 다 해주는데. 다리 좀 벌리고 있다가 씨를 받아 임신하는 거, 그게 뭐가 어렵다고!
“쓸모없는 년들 같으니!”
“죄, 죄송합니다!”
갑자기 들려온 허둥대는 목소리가 그를 멈춰 세웠다.
고개를 돌리자 복도 끝 모퉁이에서 한 여자가 황급히 허리를 숙이며 고개를 조아리고 있었다.
보아하니 자신을 향해 한 말인 줄 알고 연신 사과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뭐야. 시녀냐?”
“예? 예! 저, 전하…….”
보통 이렇게 황자가 머리끝까지 화나 있을 때면 황자궁의 아랫것들은 다들 눈치껏 멀리 피해 있고는 했다. 괜히 눈에 뜨였다가는 크게 경을 치기 때문이다.
이 시녀는 황자궁에 배정받은 지 며칠 되지 않아 이러한 분위기를 잘 몰랐다. 그리하여 인생 최악의 불운의 순간을 맞이하고 말았다.
“흠. 너 잘 만났다.”
“…예?”
“할 일이 있으니 날 따라오도록.”
시녀는 뭔가 싸한 기분을 느꼈으나, 주변에 자신을 도와줄 사람도 없고, 감히 황자의 명을 어길 수도 없어 뒤를 따랐다.
“저, 전하?! 왜 이러시는지…….”
하지만 그가 그녀를 빈방에 데려가 침대 위로 이끌자 시녀는 미친 듯이 불안해졌다.
“가만히 있어! 네까짓 게 내 고뇌를 알기나 하느냐?”
“하, 하지만…….”
“네 이름이 무엇이냐.”
“로페르 자작가의…….”
가문 이름만 듣고 나머지는 흘려들었다.
시녀를 강제로 눕히는 와중에도 길리언은 이 여자의 가문이 어딘지를 체크했다. 이것 자체가 떳떳하지 않은 일이라는 반증이었으나 그는 합리화에 취해 생각했다.
황자로 태어난 자신의 숙명이 너무 무겁다고.
이렇게 힘든 와중에도 그는 계승을 위해 노력해야만 하지 않은가.
우는 여자의 목소리 따위는 이미 안중에도 없었다.
황자인 그가 안아주는데 웃지는 못할망정 울다니, 말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시녀의 울음은 그의 마음을 약하게 해서 나중에 뭔가를 요구하려는 밑밥 같은 것으로 취급했다.
“괜히 눈물 빼는 척하지 말고 영광으로 알도록 해! 하여간 여자들이란.”
한창 기분이 나쁠 때에 손에 들어온 여자에게 황자는 한껏 분을 풀었다. 한차례 땀을 빼고 나니 좀 진정이 되는 것 같다.
‘저 시녀가 계승의 증거를 가진다면 내 당장이라도 황태자비로 삼아주련만…….’
외양이나 몸매가 꽤 나쁘지 않았던 방금 전의 시녀를 떠올리며 그가 생각했다. 하지만 그럴 확률이 거의 없다는 것은 그도 이미 알고 있었다.
‘정령력이 더 좋은 여자가 필요해.’
여태 그가 부당하게 받아야만 했던 울분을 해소하려면 얼른 황제가 되는 수밖에 없었다.
‘내가 황제만 되면…….’
자신을 모욕한 자들을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제 치세는 그야말로 황권이 살아나고, 황가의 위엄이 바로 서는 새 시대가 열릴 것이다.
‘새 맹약자… 여자였지.’
크레이머 기사단의 단장인 웨슬리 경이 보호하고 있던 사람.
후드를 쓰고 있어 얼굴을 볼 수는 없었지만, 옷 태나 윤곽만 봐도 여성이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게다가 놀라서 내질렀던 비명을 들었을 때 ‘젊은’ 여성이 분명했다.
‘북부 촌구석에서 온 여자면… 분명 어리바리할 텐데.’
그 가진 힘에 비해 분명 요리하기가 쉬울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놓치기 아까웠다.
‘게다가 맹약자가 내 후사를 이으면…….’
혹시 아는가? 엄청난 능력을 가진 자식이 태어날지도 모른다. 그러면 그는 후세에 대단한 명황(明皇)으로 이름이 길이길이 남을 테지.
그의 눈에 탐욕이 차올랐다.
‘어마마마를 설득하자.’
크레이머 공작이 무언가 사특한 수를 써서 맹약자를 제 곁에 붙여놓은 것 같기는 하지만, 곧 있을 증명식과 연회에서까지 붙어있지는 못할 터.
연회 이후에 궁에 머물러 달라고 황후가 직접 청하면 맹약자라도 차마 거절하지 못할 것이다.
‘우선 궁에만 머무르게 할 수 있다면, 다음 일은 일사천리야.’
꽤 괜찮은 계책이 아닌가.
그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약간 묻어났다.
황후궁 쪽으로 방향을 틀어 걸어가는 황자의 그림자가 길게 이어지다가 사라졌다.
* * *
다음 날, 아침이 밝았다.
루퍼트는 델본에 오자마자 찾은 제 무기(본래 자신이 쓰던)를 다시금 손에 쥐며 휘둘러보았다.
“크, 손에 착 달라붙네.”
크레이머가에서 준 검은 분명 최고급이었으나 오랫동안 손에 익은 것만 못했다.
검을 다시 검집에 넣어 허리에 차고는 루퍼트는 방을 나섰다.
그렇게 본관으로 향하는데 한 시종이 말을 걸어왔다.
“기사님. 소가주께서 부르십니다.”
“도련님이?”
“예.”
루퍼트는 세이지의 갑작스런 호출이 의아했으나 눈썹을 한 번 으쓱하고는 집무실로 향했다.
사이나의 방 앞으로 복귀해 호위를 할 시간이지만 아직 크레이머 공작과 같이 있을 시간이니 괜찮을 것이다. 솔직히 공작과 있을 동안은 자신의 호위를 받는 것보다 더 안전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니까.
틱틱. 건성으로 두드리는 노크 소리에 들어오라는 소리가 들렸다.
안쪽으로 들어가자 어째서인지 제 머리를 쥐어뜯고 있던 세이지와 눈이 마주쳤다.
“저 사이나님 호위하러 가야 합니다. 얼른 본론만 말씀하시죠.”
“이봐, 캐롯 경. 진짜일까?”
진짜냐니, 뭐가? 본론만 말하라고는 했지만 알아듣게는 해야 할 것 아닌가.
“도련님, 저 캐롯 경 아닌데요.”
“지금 그게 중요해? 이 상황이 진짜냐고!”
그러니까 뭘… 아, 욜리를 보았나 보군.
루퍼트도 델본에 오기 직전에야 알았다. 당시 어찌나 놀랐던가.
“보셨으면서도 그러십니까? 그럼 그 수호령이 가짜 같습니까?”
“…우리 사야가…… 왜 그딴 골치 아픈 짐승을 만나서…….”
제 여동생이 그저 평온하고 행복하게만 살기를 원했다.
그래서인지 세이지는 그녀가 이렇게 복잡한 상황에 말려들게 된 것이 다 욜리 놈을 만나서인 것 같았다.
어떤 의미로는 날카로운 인지력이라고 할 수 있었으나, 그 진실을 밝혀줄 자가 없었다.
한편 루퍼트는 신기해하고 있었다.
다른 집 같으면 가문에 맹약자가 나왔다며 쌍수를 들고 환호했을 텐데, 드보프가에선 다들 인상이나 쓰고 있지 않은가. 허나 또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다.
루퍼트도 사이나를 꽤 좋아했으므로, 특별한 능력보다 본인이 원하는 대로 사는 것을 더 바랐다.
“여기서 머리나 뜯고 계시면 뭐 합니까? 차라리 대책을 세우시죠?”
“하, 대책이야 뭐…….”
세이지는 한숨을 쉬며 말을 얼버무렸다. 보아하니 뭔가 하긴 하고 있는 듯했다.
그 정도 확인했으면 충분하다고 생각한 루퍼트는 만족하고는 바로 신경을 끄기로 했다. 자신은 어디까지나 육체파지 두뇌파가 아니지 않은가.
“그것보단, 솔직히 말해 봐.”
“예?”
“크레이머 공작이 우리 사이나를 구박했다거나, 그 집안에서 누가 못되게 굴었다거나. 그런 일은 없었나? 사이나가 속상해하거나 맘 상해하는 일은 없었어? 뭐든 말이야.”
아하. 수호령보단 이게 목적이었구만. 자신을 호출한 이유.
도련님은 여전하시네.
“그런 일은 딱히 없었습니다. 잘 지내신 것으로 압니다. 각하께서야 오히려 애정이 넘쳐서 문제죠.”
중간에 좀 꺼림한 기간이 있긴 했지만, 부부라는 게 원래 좋기만 할 수는 없는 거 아니겠나.
그 부분을 말하면 아가씨가 별로 안 좋아할 것 같기도 하고, 시시콜콜 아가씨의 사생활을 일러바칠 생각은 없어서 루퍼트는 금세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
“문제? 무슨 문제였지?”
“아니, 애정이 넘치는 게 무슨 문제예요. 말을 좀 제대로 들으시죠?”
“니가 문제라고 해놓고 무슨 소리냐!”
“아, 맥락을 읽으셔야죠! 저보다 공부 많이 하신 거 맞습니까?!”
“이 당근 같은 놈이……!”
세이지가 루퍼트의 등짝을 때리려 뒤를 쫓고, 루퍼트는 도망 다니는 구도가 형성되었다. 익숙한 구도였다.
여동생 사생활이나 캐려고 절 부른 세이지에게 혀를 차고는 루퍼트는 얼른 집무실에서 도망 나왔다.
제 말에 틀린 건 없지만 그렇다고 안 맞는다는 보장은 없었으므로.
* * *
사이나는 익숙한 방에서, 그리고 익숙한 품에서 깨어났다.
하지만 그 두 개의 조합은 좀 익숙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방금 그녀가 깨어난 곳은 결혼하기 전에 그녀가 쓰던 방이었으므로.
“…….”
오랜 시간 동안 혼자 사용하는 것이 너무 당연했던 침대 위에 기다란 백발을 흐트러뜨린 채 잠에 든 건장한 남자의 육신이 낯설었다.
그러나 그다지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이래서 그가 이 방에서 자고 싶다고 한 걸까.’
부부일지라도 보통은 따로 방을 배정하는 귀족가의 특성상, 총집사장인 우즈는 당연히 콘스탄틴에게 꽤 훌륭한 방을 배정해주었다.
‘괜찮네. 난 내 부인과 같은 방에서 묵겠네.’
‘…예?’
‘사야, 그대가 본래 쓰던 방에서 함께 묵도록 합시다.’
‘네? 제 방이요?’
‘그래요. 내게 안내를 해주지 않겠습니까? 꽤 궁금합니다.’
결혼 전에 자신이 쓰던 방에서 묵고 싶다며 고집을 피우는 그를 굳이 또 안 된다고 할 것은 아니라 그러자 했다.
‘하, 그대의 향기가 곳곳에 배어 있습니다.’
딱히 신기할 것도 없는 방이다.
수호령 관련한 장식품이 꽤 많다는 점이 좀 특이할 뿐, 다른 귀족 영애들의 방에 비하면 솔직히 조금 딱딱한 느낌마저 풍기는 방이었다.
하지만 그는 눈을 빛내며 구석구석을 구경하더니, 침대에 이르러서는 얼굴을 붉히기까지 했다.
그리고 무슨 포인트인지 알 수 없는 곳에서 흥분을 해서는 밤새 그녀를 몰아붙였다.
바로 이 침대에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