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화. 델본에서 할 일
“감히 황제 폐하의 명을 어기겠다는 건가!”
“제가요?”
“폐하의 인장이 찍힌 소환령의 명을 지금 무시하는 처사가 아닌가!”
“글쎄요. 전 그 명에 따라 기한 안에 황도에 도착했습니다만.”
“소환령의 내용은 황실에 맹약자를 인계하는 것도 포함이다!”
“인계가 아니라 안내라고 적혀 있었습니다만. 설마, 맹약자를 추포라도 하길 원하신 겁니까?”
“…….”
“아니면 지금 황자 전하께서는 본인의 명이 황명과 동일하다고 말씀하고 싶으신 겁니까?”
“…….”
“황제 폐하께서 엄연히 계시는데 말입니다.”
“…….”
“아직 전하께선 황태자가 아니십니다.”
콘스탄틴은 그저 사실을 이야기했을 뿐인데 황자는 마치 모욕이라도 들은 것처럼 선득한 표정으로 콘스탄틴을 노려보았다.
“맹약자는 본인의 자유 의지에 따라 자신의 거취를 정할 권리가 있습니다. 저는 그 대리인으로서 의견을 전해드리는 것뿐. 이것이 만약 거짓이라면 후에 제가 벌을 받겠습니다.”
황자는 이를 갈면서도 더는 반박하지 못했다. 당장에라도 찢어 죽이고 싶다는 표정이기는 했지만.
“맹약자는 지고한 존재.”
콘스탄틴은 모레프의 몸집을 다시금 줄이며 느릿하게 말을 이었다.
“맹약자는 제게 황성에 머무르고 싶지 않다고 미리 전했고, 그렇다면 황자 전하라 하실지라도 그 신변을 강제할 수는 없습니다.”
악귀 같은 황자의 시선을 대수롭지 않게 넘기며 콘스탄틴은 주변을 정리시켰다.
크레이머가의 일행이 모조리 빠져나가는 동안, 황자와 황실 근위대는 멀거니 그것을 쳐다보아야만 했다.
* * *
대다수의 사람들은 워프 게이트의 존재를 모르기에 황성보다 크레이머가의 타운 하우스를 주시 중이었다.
그런데 그 타운 하우스로 십 수 명의 기사와 마차 여러 대가 들어갔다.
곳곳에서 그 행렬을 본 자들이 소식을 알리기 위해 흩어졌다.
주변 분위기가 평소 같지 않게 어수선했으나, 더 정신없는 상황에서 빠져나온 사이나는 크레이머가의 타운 하우스 정문을 넘어서자 안도의 숨이 새어 나왔다.
“혹시, 무서웠습니까?”
그런 그녀를 보고는 콘스탄틴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약간 긴장을 하기는 했는데 괜찮아요.”
“황자가 이 정도로 적나라하게 나설 거라고는 예상 못 했습니다. 내 불찰입니다.”
“아니에요. 좀 놀라기는 했지만, 당신이 있어서 큰 걱정은 하지 않았는걸요.”
좀 경각심이 더 들기는 하네요. 사이나는 덧붙였다.
“그래요. 어떤 상황에서도 절대 혼자 다니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군요. 황도에서 그대의 호위는 최고 등급으로 돌아갈 겁니다. 답답하더라도, 좀 참아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네, 이해해요.”
“그렇다고 너무 불안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콘스탄틴은 단호한 표정으로 그녀의 눈을 직시하며 말했다.
“손끝 하나 다치지 않도록 내 모든 수단을 동원할 겁니다.”
신기하다.
“그러니, 걱정 말아요.”
그의 단단한 눈을 바라보고 있으니 진하진 않아도 분명 존재했던 잔걱정마저 스르르 사라지는 기분이 들었다.
“네.”
사이나는 대답과 동시에 그의 품에 폭 안겨들었다. 그러자 그가 그녀를 견고하게 감아왔다.
단단하다 못해 완고하기까지 한 그의 품은 매번 그녀에게 안전하다는 느낌을 주며 감싸오고는 했다.
지금처럼.
한참을 그리 붙어있던 둘은 마차가 멈추는 느낌이 나고 나서야 떨어졌다. 마차가 포치에 도착한 모양이다.
“타운 하우스로 돌아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사이나가 콘스탄틴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마차에서 내리자 로이터 집사장이 깍듯하게 인사를 해왔다.
“아, 로이터. 반가워요.”
“다시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마님.”
집사장뿐만 아니라 고용인들이 죄다 나와 마중 행렬에 합세 중으로 보였다. 과한 환영에 사이나는 약간 멋쩍음을 느끼며 안으로 들어섰다.
“사야, 먼저 올라가서 쉬고 있도록 해요. 난 기사단 일 좀 먼저 보고 가겠습니다.”
“네.”
콘스탄틴은 저택 경비와 호위 체제를 다시금 확인하고 정비하기 위해 기사들을 모았다. 그리고 크레이머 기사단은 타운 하우스에 도착하자마자 각자에게 필요한 무기를 받아 무장했다.
루퍼트 역시 제 손에 맞는 검 한 자루를 골라 허리에 차자마자 사이나의 곁으로 돌아왔다. 델본에 있는 자신의 무기를 되찾을 때까지 임시로 쓸 요량이었다.
다리엘을 포함하여 위장용으로 데려온 자들은 예기치 못한 황자의 공격에 다들 놀란 상태였다.
안전한 곳에 방을 배정하고 마찬가지로 각각 호위가 배치되었다.
“다리엘, 괜찮니?”
그 와중에도 시중을 들겠다고 본관으로 따라 들어온 다리엘을 보며 사이나가 물었다.
“좀 놀라긴 했는데 괜찮아요. 각하께서 도와주실 줄 알았어요.”
“괜히 널 데려와서 험한 꼴을 보게 하는 것 같네.”
“그런 말씀 마셔요. 모르고 온 것도 아니고. 미끼가 되겠다고 한 건 전데요.”
“그래도 놀랐을 텐데 가서 쉬렴.”
“아니에요. 마님이 황도 입성하신 거 이미 소문이 쫙 퍼졌을 텐데 미리미리 이것저것 준비를 해두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 맹약자 마님을 모실 수 있다는 게 어디 보통 특혜인가요?”
골치나 아프지 뭐가 특혜라는 것인지는 모르겠다.
워프 게이트를 통과하기가 무섭게 치러야했던 일을 생각하니 사이나는 그저 한숨만 나올 뿐이었다.
황도의 상황을 두고 나름 최악의 가정을 했음에도 현실은 언제나 예상을 뛰어넘는다.
‘당장 델본부터 가봐야 할 것 같아.’
증명식과 황실 연회가 열리기 전에 미리 상황을 공유하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사이나는 델본으로 곧 찾아가겠다고 서신을 썼다.
또한 자신의 도착을 혹시 다른 곳을 통해 전해 듣고 서운해하지 않도록 친우들에게도 미리 편지를 써서 각각 부쳤다.
* * *
몇 달 만이더라.
델본으로 향하는 길목은 여름의 초입을 앞두고 있었다.
파릇파릇한 풍경을 보니, 크레이머령에 비해 확연하게 훈훈한 날씨라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사야.”
창을 통해 마차 밖의 풍경에 한참 빠져있던 사이나는 콘스탄틴의 목소리에 정신이 들었다.
“네?”
“가족에게 그대가 맹약자인 것을 밝힐 예정입니까?”
“네. 어차피 아시게 되실 텐데요. 그게 아니라고 해도 숨길 생각은 없고요.”
이런 건 왜 묻는 것일까 싶어 바라보자 그가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백작께 한번 물어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드보프가 역시 꽤 오랫동안 아를-프로메사에 연이 닿아 있었던 가문이니 가주에게만 내려오는 관련 사료들이 있을 확률이 높습니다.”
“어, 그러려나요?”
“한때 드보프가가 가졌던 수호령과 욜리가 같은 속성일 거란 보장은 없지만, 혹시 모르는 일이니까요.”
“네. 알겠어요.”
뭔가 도움이 될 만한 정보가 있었으면 좋겠는걸?
자연스럽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마차가 델본 중앙령에 도착했다.
“사야!”
본저에 도착해 마차에서 내리기도 전에 세이지가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딸아!”
아버지도 함께였다.
“아빠, 오라버니.”
살면서 최장 기간 동안 얼굴을 보지 못한 딸을 품에 안으며 드보프 백작이 감격한 얼굴을 했다.
“건강히 잘 지내셨죠?”
“그래, 너는 혼자 타지에서 어찌 지냈어. 혹여 서운한 일은 없었더냐?”
“아뇨. 그저 잘 지냈어요.”
지난 몇 달간 꽤 많은 일들이 있긴 했지만 일일이 말해서 걱정을 유발할 필요는 없다.
그렇다고 해도 말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야 있었지만.
사이나는 응접실에 앉자마자 주변을 물리도록 한 후 바로 욜리를 소환했다.
“…아니 이 짐승이 왜 이렇게 커진 거야? 대체 뭘 먹고?”
사이나가 불러들인 욜리의 모습을 보고, 세이지는 입을 떡 벌렸다.
“……그게 문제가 아닌 거 같은데……. 세이지, 이 문양과 날개는… 그거 아니냐?”
“…수, 수호령??!”
백작과 세이지, 둘은 믿을 수 없는 것이 눈앞에 나타난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그 표정은 놀라움을 넘어 경악에 가까웠다.
유리가 완전히 각성한 이후, 온 가족의 첫 대면이다.
사이나는 아빠와 오라버니의 얼굴에 놀라움 외의 다른 어떤 감정이 섞여 있을까 싶어 세심하게 관찰했다.
그러나 아버지도, 오라버니도 유리를 알아보는 것 같은 기색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이 사실이 혹시 섭섭하지는 않을까.
이번엔 욜리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살피게 되었다.
하지만 잘 모르겠다. 짐승의 상태라 그런지 표정을 완전히 들여다보기가 쉽지 않았다.
-내 걱정은 말라니까.
그런 그녀의 태도를 눈치챘는지 욜리가 어슬렁거리는 태도로 걸어오며 사이나에게 말했다.
-형 면상을 보니까 좀 짜증이 나기는 하지만.
녀석은 물끄러미 세이지를 바라보다가 꼬리를 휙 쳐올려 툭 쳤다.
걱정 말라고는 했지만 완전히 아무렇지도 않은 것은 아닌가 보다.
아무것도 모르는 세이지가 꼬리에 맞고 움찔하는 것을 보니 어쩐지 좀 웃겼다.
전과 달리 엄청나게 덩치가 커진 데다가 아무리 봐도 심상치 않은 외양과 분위기를 풍기는 욜리를 보며 세이지는 아무런 말도 못 하고 그저 녀석과 사이나를 번갈아 보았다.
“아니… 그 요즘, 난리인 새 맹약자가 설마…….”
“응, 맞아. 나야.”
“허어……!”
“말도 안 돼!”
경악을 넘어 뒤로 넘어가게 생긴 드보프 백작을 사이나가 붙잡으며 말했다.
“아빠. 하지만 사실이에요.”
“하지만 얘야, 지금 탐욕스러운 자들이 얼마나…….”
백작은 무슨 말인가를 하려다가 입을 다물더니 한숨을 폭 쉬어댔다.
다른 가족들 같으면 경사가 났다며 좋아했을 것 같은데 이러는 것을 보니, 사이나는 새삼 가족의 사랑을 실감할 수 있었다.
“저 크레이머 공작부인이잖아요. 걱정하실 일은 없을 거예요.”
사이나는 그들이 안심할 수 있도록 최대한 안정적인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콘스탄틴도 잘 지켜주고 있고, 욜리도 당연히 절 지켜줄 거고요.”
그녀의 말이 맞다는 듯, 욜리가 후욱 제 몸집을 키우며 고개를 끄덕였다.
“헉!”
의도치 않게 위협처럼 느낀 드보프 백작의 들숨에 금세 다시 줄어들기는 했지만.
어쨌든 가족들은 수호령의 힘을 다루는 맹약자가 되었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새삼 알게 된 표정으로 사이나를 보며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후 그들은 그간의 사정과 현재 상황에 관해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나누고 공유했다.
만찬장에서의 식사를 취소하고 응접실로 간단한 음식들을 수시로 들여야 했을 정도로 오랜 시간 동안 대화를 나누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