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화. 과격한 손님맞이
하지만 콘스탄틴은 황실 근위대라고해서 다를 것이 없는지, 정신없는 현장 한복판으로 들어서자마자 바로 힘을 일으켰다. 난장판처럼 얽혀있던 인형들이 우수수 밀려 떨어졌다.
콘스탄틴 단 한 명의 개입으로, 순식간에 상황이 역전되는 것이 보였다.
“으악!”
때마침 저 멀리 그의 힘에 튕겨져 나가 둔탁한 충격음을 내며 떨어지는 한 인영이 보였다.
하늘색의 머리카락.
역시나, 이런 일을 할 주동자라면.
길리언 황자였다.
“-공작!”
제 힘이 파훼된 것도 모자라 볼품없게 바닥을 뒹굴고 만 황자가 비척거리며 일어났다. 그리고는 분노에 차서 외쳤다.
“감히 날 공격하다니! 제정신인가!”
“황자 전하셨군요. 대체 왜 제 기사들을 공격하셨습니까.”
콘스탄틴은 힘을 죽이기는커녕 더 기세를 일으켰다. 그의 망토가 풍압에 휘날리며 살기가 주변을 내리찍었다.
“크… 으윽, 다, 당장 힘을 거두지 못해!?”
“심지어 무기도 없는 상태인데, 말입니다.”
황자를 보자마자 살짝 굳어 있던 사이나에게 누군가 다가왔다.
“마님.”
속삭이는 것 같은 목소리였다.
“…다리엘? 왜 근위대가 공격을 한 거야?”
“황자 전하께서 절 끌고 가시려고 했어요.”
“뭐?”
다리엘은 무서워서 사이나의 뒤에 숨는 척을 하며 작은 목소리로 상황을 설명했다.
다리엘은 지원자였다.
콘스탄틴이 맹약자를 에스코트해서 황도로 가야 하는 상황 속, 그는 동행자를 늘리기로 결정했다.
사이나가 맹약자인 것을 곧바로 들키지 않을 수 있게 혼란을 주고자 한 것이다.
여러 가지 환경에서 입이 무거운 자들을 골라 추리던 중, 다리엘은 자신도 함께 가겠다고 지원했다.
위험한 일이 있을 수 있다고 경고했음에도 다리엘의 의지는 끊어지지 않았다.
‘마님이 위험하신 것보단 제가 위험한 게 낫죠!’
결국 콘스탄틴의 허락을 받은 다리엘은 함께 간 김에 시녀로서의 임무도 할 수 있어서 좋고 황도 구경도 할 수 있겠다며 전혀 개의치 않는 모습을 보였다.
그렇게 다리엘을 포함한 일행은 먼저 워프 게이트를 통과해 황도에 도착했다. 한데 지하 공간이 모두 대기하기에는 넓지 않아 지상에서 대기하기 위해 올라왔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황자와 근위대가 나타났다고 했다.
아무래도 미리 건물 입구를 감시 중이었던 것 같았다고 설명했다.
‘크레이머 공작은 어디 있지?’
‘곧 올라오실 겁니다.’
뭔가 좀 이상하기는 했으나 설마 자신들을 공격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은 웨슬리 단장은 조심스럽게 황자를 대했다.
‘보아하니 공작이 내 지시를 잘 이행한 듯하다. 수고했다고 전해라. 자, 이제 맹약자여, 이쪽으로 오시오.’
‘…….’
‘왜 대답이 없어? 누가 맹약자지?’
‘저… 전하. 왜 그러시는지?’
‘당연히 맹약자를 모시기 위해서지. 누가 이 제국의 새로운 기둥이 될 맹약자신가? 황성에 궁을 따로 준비해 두었소. 극빈으로 대우하며 작위를 받을 때까지 최상으로 황가에서 당신을 살필 것이오. 이쪽으로 얼른 오시오.’
‘…….’
이쪽에서 반응이 없자 황자는 이내 인상을 쓰고는 웨슬리에게 말했다.
‘…뭐야. 설마 맹약자를 미리 협박이라도 한 것이냐? 황도에 와서도 공작의 영향력을 벗어날 수 없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각하께서는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그런데 왜 누구도 나서질 않고 대답도 않는단 말이냐! 응당 공작가보단 황성에 머무르고 싶어 할 텐데!’
‘맹약자께서 원하지 않는다 하셨습니다.’
‘뭐?! 헛소리!’
‘맹약자께선 황성 밖에 머무르겠다고 하셨습니다.’
‘내 그 말을 믿을 줄 알고?! 공작이 맹약자의 가족이라도 억류하고 협박을 한 게 아닌가?!’
‘각하를 모욕하지 마십시오!’
‘이 무례한 것이… 감히, 황자인 나에게…!’
결국 황자는 버럭 노성을 지르며 근위대에게 명했다.
‘저 불손한 것들이 맹약자를 억류하고 있음이 틀림없다! 당장 맹약자를 구해오도록!’
‘예!’
황자의 명을 받은 근위대가 크레이머 일행을 향해 다가왔다.
‘금방 각하께서 올라오실 겁니다! 설명을 들으시고 결정하시옵소서!’
‘하. 크레이머가는 가주뿐 아니라 기사들도 건방지기 짝이 없군.’
황자는 더 열이 받는지 근위대를 재촉했다.
‘당장 맹약자를 구해오도록 해!’
‘황자 전하! 이러실 수는 없습니다! -막아!’
‘지금 감히 황족의 명을 거역하는 건가?! 이 불손한 것들을 죄다 포박해라!’
황실 근위대는 처음에 대수롭지 않게 다가왔다. 수적으로 열세인 크레이머 기사단을 상대하는 것이 뭐가 그리 어렵겠나 싶었다.
하지만 금세 당황하고 말았다.
크레이머 기사들의 저항이 생각보다 셌던 것. 비무장 상태의 기사들에게 검을 뽑을 수는 없어 어떻게든 압박을 하려 했으나 평소 마수를 상대하던 크레이머 기사단은 체술만 해도 상당하여 쉽게 제압할 수 없었다.
‘이 쓸모없는 것들!’
그 광경을 본 황자가 버럭 화를 내며 제 사령을 뽑아 든 것이다.
체술이 아무리 좋다고 한들 수호령의 힘을 상대로는 속수무책. 크레이머 기사단은 저항보다 호위 대상의 보호로 중점을 빠르게 전환한 뒤 회피를 하는 데에 힘썼다.
갑작스럽게 난전 형태가 되어버린 상황이었으나, 그래도 제 사령의 힘이라면 어렵지 않게 상황을 제압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황자는 곧 오산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후드를 쓴 자들이 다섯이나 되어 정확하게 누가 맹약자인지 구분하기가 힘든 데다가 요리조리 도망 다니는 능력이 생각보다 뛰어난 기사들의 움직임 때문에 곧 인내심을 잃고 말았다.
‘이 빌어먹을 것들이!’
당장 죄다 죽여 버리라고 명하고 싶었으나, 그렇게 하면 안 된다는 자각이 아직은 남아 있었다.
솟구치는 화를 가까스로 누르며 황자는 후드 쓴 자들을 살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리엘 쪽으로 소리쳤다.
‘저 여자다!’
길리언 황자가 맹약자였다면 기운을 확실하게 구별할 수 있었겠지만, 본인에게는 불행하게도 사령의 대여자인지라 확실한 구분이 불가했다. 하지만 어딘가 수호령의 기운이 느껴지는 데다가(콘스탄틴이 보호 차원에서 그림자에 칼리고의 힘을 심어두었다.) 크레이머 기사단의 단장인 웨슬리 경이 옆에 붙어 있는 것을 보고 다리엘이 확실하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황자가 다리엘 쪽으로 총 공격을 퍼부었다.
그리고 그 타이밍에 콘스탄틴이 도착한 것이다.
“세상에. 이쪽으로 와.”
의연한 척 사이나에게 상황을 설명하기는 했으나 손끝이 살짝 떨리는 것을 보니 다리엘도 놀라긴 한 것 같았다.
사이나는 그녀를 제 뒤쪽으로 숨기며 황자의 권역에서 최대한 멀어졌다.
“부당하게 맹약자의 신변을 억류하고 있는 것을 자유롭게 해주려 한 것이다! 공작! 더는 맹약자를 구속하지 말고 놓아주도록 해!”
“억류라니, 대체 무슨 소리를 하시는 겁니까.”
“뻔하지 않나! 맹약자의 약점을 잡아 협박한 것이 아니라면, 왜 입을 꾹 다물고 있지? 황성의 귀빈으로 대우받고 싶지 않다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아무리 황성이라도 본인이 싫으면 그럴 수도 있지요. 맹약자는 본인이 황성 밖에 있고 싶다고 제게 미리 말을 전했습니다.”
“웃기는 소리! 내 직접 맹약자로부터 대답을 듣겠다.”
“맹약자는 정식으로 소개되는 날 전까지는 정체를 밝히고 싶지 않다고 했습니다. 그건 황자 전하께도 예외가 아닙니다.”
“자꾸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할 텐가! 아, 설마 맹약자를 안내해 오라는 황명을 어긴 것은 아니겠지?”
이렇게 상황을 회피하는 것이 실은 아직 명령을 이행하지 못해서 이러는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황자의 눈이 희번덕거렸다.
“하, 정말 그런 건가?!”
콘스탄틴은 나직하게 한숨을 쉬고는 대답했다.
“그런 걱정은 마시지요. 황명은 모두 이행되었습니다.”
“그런데 왜 맹약자를 억류하는 것이지?”
“억류는 지금 전하께서 하려는 것이 억류고요.”
“뭐라?! 감히 누굴 모함하는 것이냐!”
“어차피 증명식 때 증명이 될 거고, 정식 연회 때 소개가 될 것인데 굳이 이리 황성에 머무르게 하려 애쓰시는 이유를 모르겠군요.”
“…….”
“혹시 다른 이유가 있으십니까?”
“…모함을 하다못해 이젠 말도 안 되는 누명을 씌우려 하는 군, 공작.”
“아니라면 길을 여십시오. 맹약자는 정식 과정을 거쳐 밝혀질 것입니다.”
높낮이 없는 어조로 콘스탄틴이 황자에게 의견을 표했다.
“아니! 난 공작을 믿을 수가 없다. 맹약자를 강제하고 있음이 분명해!”
하지만 황자는 물러설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강경하다 못해 공격적으로 소리쳤다.
“500년 만의 새 맹약자다. 당연히 황실에서 보호해야 마땅하다. 이를 거부한다면 황명을 거역하는 것이다!”
황자는 이를 으득 갈며 콘스탄틴을 노려보았다.
“근위대! 황명을 거역하는 공작을 막고 저 맹약자를 당장 내 곁으로 데려오라!”
창- 창-! 황실 근위대는 약간 망설이는 듯했지만, 결국 검을 빼어 들었다.
‘…콘스탄틴!’
수십 명의 기사가 콘스탄틴 한 명을 둘러싼 모습이 매우 험악하게 보여 사이나가 숨을 들이켰다.
“…….”
하지만 그는 별다른 대꾸도 없이 냉랭한 태도로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시선을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근위대의 기사들은 움찔했다.
그리고 움직이던 그의 시선이 멈추자마자 공작의 등 뒤로 너울거리는 형체가 선명해지기 시작했다.
모레프가 소환된 것이다.
“가, 감히 황명을 어긴 것도 모자라 수호령까지 꺼내 들어?!”
콘스탄틴은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모레프의 몸집이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천천히, 끝도 없이.
마차만큼, 저택만큼, 황성의 탑만큼이나 높이.
거대한 검은 사자의 형상이 갈기를 휘날리며 기사들을 내려다보는 장면은… 말로 설명하기 힘든 분위기를 자아냈다.
“흐윽-!”
그저 멀찍이 구경을 하는 자라면 장엄하다는 느낌을 받을지 모르겠으나, 그 시선을 바로 아래서 받아내고 있는 근위대는 당장에라도 제 몸이 한숨에 으깨어질 것 같은 압박감을 고스란히 받았다.
“길을 여십시오.”
낮게 나온 목소리가 싸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