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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결혼, 이번 생엔 제가 할게요-186화 (186/233)

186화. 힘의 용도

“오히려 정보를 전혀 알아내지 못했다는 반증이겠지요. 캐도 안 나오니 다급해졌을 겁니다.”

“당신이 뭔가를 하신 거군요?”

“예, 뭐…….”

콘스탄틴은 안심하라는 듯 웃으며 대답했다.

“아마 이쪽에서 뭔가를 차단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겁니다. 그렇다 보니 대놓고 이쪽으로 떠넘긴 것 같군요.”

“아…….”

“500년 만의 새로운 맹약자라는 건, 분명 엄청난 일이니까요.”

콘스탄틴은 그녀가 평민이었거나, 하급 귀족이었다면 있을 수 있었던 일들을 굳이 언급하지 않았다.

어차피 일어나지 않을 일이니.

사이나는 유리와의 재회, 그리고 콘스탄틴과의 관계 회복에 중점을 두었지 정치적, 대외적인 부분에서 제 입장을 생각하지 못했다.

“우선 밝혀지고 나면 매우 주변이 번잡해질 겁니다.”

“그렇군요…….”

듣고 보니 그랬다. 생각해보니 여태 그 생각을 못 한 것이 이상할 정도로 심각한 상황이었다.

“어차피 밝히지 않을 수는 없겠지만, 우리 쪽에도 준비는 필요하니까요.”

“준비라 하심은…….”

“말 나온 김에 그 준비를 하러 갈까요?”

콘스탄틴이 일어나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 * *

‘뭔가 내가 더 알아야 할 것이 있나 보다.’

그가 그녀를 데리고 집무실 쪽으로 향하자 사이나는 자연스럽게 그리 생각했다.

“어! 어어어-?!”

하지만 웬걸.

사이나의 눈이 점차 동그랗게 커지고, 입은 떠억 벌어지기 시작했다.

단순한 집무실이라고 생각했던 곳에 비밀 공간이 숨어 있었던 것이다.

책장 상단에 새겨진 장식 중앙에 박힌 보석에 수호령의 힘을 밀어 넣자 책장이 돌아가는 것을 보며 사이나는 신기함을 숨기지 못했다.

“세상에.”

정말 크레이머 가문에는 신기한 공간이 어찌나 많은지. 잊을만하면 이렇게 비밀이 하나씩 튀어나온다.

사이나의 눈동자가 자동으로 반짝거리며 빛나기 시작했다.

그런 그녀를 보며 그가 피식 웃더니 물었다.

“안을 보고 싶습니까?”

“그래도 된다면요!”

“이리 와요.”

사이나는 쪼르르 걸음을 옮겨 책장 뒤 공간으로 들어섰다.

“여긴 사실 별거 없습니다.”

타운 하우스에 있던 납골당 아래 비밀 창고 같은 걸 기대해서인지, 그의 말마따나 내부는 평범하게 느껴졌다.

가주만 알아야 하는 비밀 서류라든지 기록 등이 저장된 곳인 듯, 막 신기해 보이는 물품이 잔뜩 쌓여있거나 하지는 않았다.

“이건…….”

하지만 그 와중에 눈에 띄는 것이 하나 있었다.

바로 한쪽 벽에 걸린 커다란 그림이었다.

“초대 가주라고 하더군요.”

아하, 초대 가주라서 비밀 공간에 초상화를…….

그런데 초상화라고 하기에는 애매했다.

얼굴을 중심으로 그린 것이 아닌 전신화. 그것도 중앙에 선 것이 아니라 그림 한쪽에 치우쳐 서 있고 나머지 반쪽은 거멓게 칠해진 것이… 묘한 구도였다.

‘아마도 칼리고…?’

맹약의 순간을 그림에 옮긴 건가?

“근데 이분은… 흑발이시네요?”

그림 속의 남자는 콘스탄틴만큼이나 덩치가 크고 건장한 것이 비슷했고 미남형의 생김새도 비슷했으나, 머리 색이 완전히 달랐다.

크레이머 가의 맹약자는 대대로 백발인 것으로 알고 있는데 초대 가주는 흑발이라니 좀 의외였다.

“대대로 흑발입니다.”

그런데 콘스탄틴이 이상한 소리를 했다.

“저도 본래 흑발입니다.”

“…네?”

이게 대체 무슨 소리람.

콘스탄틴은 머리 색뿐만 아니라 속눈썹까지 하얬다. 그런데 무슨…….

“계승의 과정을 거치면 머리 색이 변해요.”

콘스탄틴이 전에 자신의 가정사를 털어놓으며 등에 진을 새긴다는 말을 하기는 했으나 그렇게 자세히는 말하지 않았다.

실상 사이나는 그 과정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인지 유모에게 더 자세하게 들었다.

“진 새기면서 머리 색이 바랜 거예요?”

“…변한 거지요. 그대도 각성 때-”

혹시나 하고 물은 건데 그가 대답하는 타이밍을 살짝 놓친 것을 보고 확신이 들었다.

“거짓말. 바랜 거잖아요.”

“…….”

예전에 들은 적이 있다.

한 부인이 자식을 잃고 너무 괴로워하다가 머리카락이 하얗게 새어버렸다고.

콘스탄틴도 그 과정이 너무 괴롭고 아파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닐까?

새삼스럽게 가슴이 조여든다.

하. 사이나는 그의 가슴팍에 톡 이마를 기대며 그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뭐라고 말을 이어야 할지 모르겠기 때문이었다.

“……이미 지난 일입니다.”

“그렇다고 없었던 일은 아니잖아요…….”

“더 고통스러웠더라도 지금은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이해가 가지 않아 사이나가 고개를 들었다.

“그대를 지킬 수 있는 힘이 있으니.”

그녀의 턱을 살짝 잡고 그가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차분하게 내려온 그의 얼굴이 쪽 하고 입술을 찍고는 미소를 그려냈다.

매우 진심이라는 것처럼.

편안해 보이는 눈동자가 그 진심을 증명하는 듯 보였다.

“제게…… 맹약자로서의 자격이 있는지 모르겠어요.”

머리가 하얗게 셀 정도의 인고의 시간을 거쳐 맹약자가 된 사람이 있는데, 본인은 어떠한가.

스스로 한 것이 아니라 유리의 희생으로 된 것이 아닌가.

사이나는 스스로의 존재가 약간 반칙처럼 느껴져 한숨지었다.

“그런 말 말아요. 힘을 가진다는 게, 생각보다 좋기만 한 것이 아닙니다.”

“…….”

“꽤 골치 아픈 일들이 많아질 거고, 져야 할 의무 또한 많아질 겁니다.

그가 그녀의 볼 언저리를 쓸며 위로하듯 말했다.

“그러겠죠. 하지만…….”

사이나는 잠시 눈을 내리깔았다가 다시 올려 뜨며 그를 보았다.

“저 역시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선명하게 치뜬 제비꽃색 눈동자가 똑바로 그를 직시했다.

“당신을 사랑할 수 있는 여자는 나밖에 없을 테니.”

“…….”

“당신을 독점할 수 있는 거, 다 제가 맹약의 힘이 있어서잖아요.”

그녀의 볼을 쓸던 기다란 손가락이 잠깐 멈췄다.

“그러니까…… 그거 하나로 다른 것들은 충분히 감당할 수 있어요.”

그러나 이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내 부인께선…….”

귓바퀴를 따라 내려와 턱을 쥐었다. 하아, 나직한 숨이 그의 잇새를 통해 참았다 뱉어지듯 뭉근하게 풀어져 나왔다.

“참으로 사랑스럽기도 하시지.”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맞닿아온 입술이 그녀의 대답을 막았다.

길게 흡착한 입술이 새어 나오는 숨결을 죄다 뜯어먹을 것처럼 집요하게 틈새를 막는 동시에 깊이 파고들었다.

그러면서도 부드러웠다.

사이나는 밀착하여 들러붙는 그에게 밀려 벽으로 올려붙여졌다.

밀실에서의 키스는 점차 깊어져 간헐적인 탄성이 되어갔다.

* * *

역대 가주들의 비밀의 공간에서 꽤 오랜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둘은 바깥으로 다시 나왔다.

나올 때 콘스탄틴의 손에는 납작하고 넓은 상자가 하나 들려있었다.

“열어 보십시오.”

얼핏 보기에는 귀부인이나 영애들이 사용하는 보석함과 비슷한 것으로 보였다.

“…이건…….”

근데 열어보니 정말 보석함이다.

내부엔 영롱한 빛을 내는 갖가지 장신구가 잔뜩 들어있었다.

보석 종류도 다양했다. 사파이어, 에메랄드, 토파즈 등. 다이아몬드도 유색부터 투명까지 종류별로 있었다.

마치 어떤 드레스에도 다양한 착용을 할 수 있게끔 세팅된 패키지처럼 보였다.

“이거랑, 이걸 착용해 보세요. 그리고 훈련을 하러 나갑시다.”

“…네?”

보석을 차고 훈련이라니 대체 무슨 소리람.

“여기 있는 것들은 그냥 일반 보석이 아닙니다. 수호령의 힘을 이용한 공격 무기죠.”

“…정말요?”

“그간 여성 맹약자가 없어 무용지물이었는데, 내 부인이 맹약자가 되었군요.”

“…….”

“욜리가 공격형 수호령이면 크게 소용이 없을지도 모릅니다만, 혹시 모르니 사용법을 익혀두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 아름다운 보석들이 무기가 될 수 있다니, 신기했다.

“아, 혹시 전에 제게 주신 팔찌도 이것들과 세트인가요?”

그가 선물로 준 백금 팔찌는 지금도 사이나의 왼쪽 팔목을 감고 있었다.

“음. 비슷하면서도 다릅니다. 그 팔찌는 칼리고의 힘만 불어넣을 수 있게끔 제작된 겁니다. 대대로 크레이머 공작부인에게 내려오는 블랙 다이아몬드 세트가 있어서….”

오? 대대로 공작이 칼리고의 주인이니까 부인을 위한 그런 보석 세트가 있나 보네.

유구한 가문의 전통치고 좀 낭만적이다라는 생각을 하던 참에, 그가 갑자기 한숨을 내쉬었다.

“근데 지금은 팔찌만 남았습니다.”

“아, 그래요…?”

하나씩 사라지고 팔찌만 남은 건가?

묘하게 아쉬운 감정이 들었다. 사이나가 공작부인이니까 꼭 갖고 싶다기보다는, 수호령 관련 물품이 사라졌다는 게 아쉬웠다. 아니, 아까운 건가?

“선대 부인께서 뭐가 그리 항상 불안하셨는지, 매일매일 끼고 사셨다고 하더군요.”

“네? 그럼…….”

불과 전대까지만 해도 존재했다는 소리잖아?

“돌아가실 때 마수 사고에 휘말리셨는데 그때 죄다 사라졌습니다.”

“…….”

“추측하기로 선대 공작께서 힘을 충전도 안 하고 주셨던 것이 아닌가 싶더군요.”

사이나의 눈이 커졌다.

“교묘한 차도살인이라고 하기에는 또 애매한 것이, 같은 날 선대 공작도 함께 변을 당하셨기 때문에…….”

그는 슬프다기보다는 이해가 가지 않는 문제점에 대해 읊조리는 것 같은 느낌으로 건조하게 중얼거렸다.

‘…정말 부모님과 사이나 나빴나 보네.’

무감하다 못해 어딘가 스산하기까지 한 느낌에 사이나는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또 들은바 선대 공작 부부가 너무 나쁜 사람들이라 동정이 가지는 않았다.

“그대의 것은 분명 충전이 된 상태니 걱정 말아요.”

저걸 농담이라고 하는 건지 그가 옅게 웃으며 말했다. 부모님께 남은 잔여 감정 때문인지 어딘가 삐딱해 보이는 미소였다.

“그런 건 걱정 안 해요.”

“…….”

“애당초 제가 죽길 원하셨으면, 제게서 떨어지려고 노력하기보다 더 찰싹 붙어 다니지 않으셨을까요?”

“…….”

부인을 죽이기 위해 과도한 애정 표현을 해야 하는 남편의 아이러니한 상황을 상상하자 어딘가 웃겼다.

푸. 묘하게 웃음이 새어 나와서 웃는데 그와 떡하니 눈이 마주쳤다.

이 타이밍에서 왜 웃는지 모르겠다는 얼굴이다. 흠, 목을 다듬으며 사이나가 입을 열었다.

“훈련하러 나가자고 하셨죠? 나가요.”

“몇 가지를 먼저 고른 후 나가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콘스탄틴은 그녀가 선택을 할 수 있도록 보석함에 있는 장신구들의 기능을 차례차례 설명해주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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