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결혼, 이번 생엔 제가 할게요-185화 (185/233)

185화. 황실의 소환령

“…….”

-내가 겪었던 그자는 냉혹하고 염세적이기 짝이 없던 인간이었어.

…콘스탄틴이?

-너한테 하는 거 보고 내가 처음에 얼마나 소름 끼쳤는데.

으으. 몸을 떨며 욜리가 고개를 저었다.

사이나야말로 그 이미지의 괴리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알 수가 없어졌다.

“그래서 어떻게 됐어?”

-뭐가.

“엘리자베스 말이야.”

-뭘 어떻게 돼. 죗값을 받았지.

“복수했어?”

-당연한 거 아니야?

“네가? 직접?”

-그건, 흠. 자세히 알 필요 없고.

“…….”

뭘 어떻게 했길래 말을 안 하는 거지?

“그럼 조지 홀랜더는?”

-그 새끼도 곱게 보내줄 수는 없었지.

“한패였던 거지?”

-한패라기보단 사실 그년의 수족 중 하나였지. 본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겠지만.

“…정말?”

-대부분의 계획은 엘리자베스가 하고 조지 홀랜더를 은근슬쩍 부추기면 넘어가는 식이었던 거 같아.

“하…….”

그랬단 말인가…. 하긴, 조지 홀랜더가 머리가 좋았다면 그렇게 사기를 여러 번 당하지도 않았겠지.

-너 죽고 나서 어디 만만한 영애한테 너 때랑 똑같은 방식으로 엮으려던 걸 잡아냈어.

“…뭐? 그럼 그때 내가…….”

그냥 술에 취한 게 아니었던 거야?

잠깐, 생각해보자.

‘가면무도회…….’

그녀의 드레스를 준비하고, 참석을 유도한 것도 엘리자베스였지.

그럼…….

-너 약에 당한 거야.

“…….”

제 잘못인 줄 알았다.

자신이 행실을 잘못해서. 자신이 해서는 안 될 행동을 해서…….

오롯하게 자신이 책임을 져야 하는 인과라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그 고난의 시간을 다 견뎠던 건데…….

“하…….”

이쯤 되자 분노를 넘어 허탈했다.

자신의 삶은 뭐였단 말인가.

처음부터 끝까지 기만과 거짓에 휘둘리다가 소모되어 사라졌다.

엘리자베스. 엘리자베스…….

널 어떻게 해야 할까.

네 악의는 지금이라 한들, 달라지지 않았겠지.

넌…….

길게 감겼던 사이나의 눈이 번쩍 뜨였다.

* * *

[황자의 자격 부족으로 맥페이든 제국의 후대 계승이 불투명한 상태다. 제국을 수호하는 힘이 점차 약해지고 있다. 제국에 위기가 찾아올 것이다.]

얼마 전부터 이 소문이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퍼지고 있었다.

황도의 어딘가에서 시작된 이 소문은 귀족과 평민 구분 없이 입에서 입으로 불 일듯이 살이 붙으며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그런 상태에서 남부연합국이 국경 지역에 군사를 모으기 시작했다는 불온한 소식이 마찬가지로 퍼지기 시작했다.

“그 소식이 참말인가? 전쟁이 날지도 모른담서?”

“그러게 말이야. 선대 때만 해도 우리나라 이름만 들어도 꼬리를 말던 것들인데 이게 무슨 일이래.”

“정말 우리 제국을 수호하는 힘이 약해져서 그런 거 아니여? 그 소문 못 들었는가? 황자가…….”

“아, 나도 들었지. 그분이 벌써 헤베타를 다섯 번이나 갈아 치웠담서? 근데도 계승을 못 하고 있다고 하대?”

“내가 듣기로는 열 번이 넘는다던데?”

“아, 그 빛기둥이 실은 이 제국의 위기를 경고하는 거였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던데?”

“뭐? 정말인가? 새로운 맹약자가 아니라?”

“정말 전쟁이 나면 어쩌지?”

“큰일이구만. 내 아들이 징집되는 건 아니겠지…….”

사람들은 소문을 진실로 믿기 시작했고, 진심으로 제국의 미래를 걱정하기 시작했다.

소문은 입을 거치며 더 부풀고 변형되어 결국 황실까지 도달했다.

“뭐야?! 감히 황족을 두고 더러운 입을 놀리다니! 그딴 헛소문이 이렇게 퍼질 때까지 넌 뭐 했어! 이 새끼야!”

황자가 길길이 날뛰었다.

빠각! 손에 집히는 대로 집어 던진 물건이 보좌관의 이마를 깨고는 떨어졌다.

“죄, 죄송합니다.”

“이건 반역이야! 누군가 작정하고 퍼트린 것이 분명해!”

황자는 본인의 자격이 부족하다고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당연히 누군가 악의적으로 이 소문을 만들어 퍼뜨렸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것은 반역이나 다름없었다.

“그 반역자를 당장 찾아서 내 앞으로 끌고 와!”

“이미 조사를 해보았으나…….”

“했어? 잡아왔나? 어디 있지? 지하 감옥?”

당연히 범인을 잡아왔을 것으로 예상한 황자가 대답을 재촉했다.

“그게… 못 찾았습니다.”

“뭐?”

“시작점이 빈민가라는 것까지는 찾았는데 지역 특성상 사람이 들고 나는 것이 워낙 불투명한 곳이라…….”

“그래서 못 찾았다고?!”

“…예. 죄송합니다.”

“이 무능한 새끼가 이걸 소식이라고 가지고 와?!”

“윽!”

기어이 황자가 손을 날렸다. 보좌관도 나름 귀족인지라 아무리 황자라지만 이렇게 맞을 때마다 굴욕감이 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반역자라니까 빈민가가 웬 말이냐!”

황자의 인식에 빈민은 인간이 아니라 짐승에 가까웠다. 빈민이 반역처럼 어려운 일을 해낼 수 있을 리가 없으니, 보좌관의 조사는 무조건 틀린 것이었다.

“귀족 중에 범인이 있어! 당장 찾아내. 시작점을 모르겠으면 입을 나불거린 것들을 죄다 잡아들여. 고문을 당하다 보면 일을 열겠지.”

“예? 반발이 심할 텐데요…….”

“지금 반발이 문제야? 제국의 혼란을 야기하는 반역자를 잡아내야 하는 판에?”

네가 대신 죽을 테냐? 그런 눈빛으로 바라보는 황자의 시선을 피하며 보좌관이 고개를 숙였다.

“예…….”

찢어져 피가 줄줄 흐르기 시작한 이마를 붙잡고 보좌관은 허둥지둥 황자의 방을 나섰다.

“버러지 같은 것들이 감히 이 몸의 자격을 논해!?”

황자는 가시지 않는 분을 시종에게 풀었다. 영문도 모르고 혼절할 때까지 맞은 시종이 쓰러지자 호위기사가 질질 끌고 방을 나갔다.

“난 제국의 유일한 황자라고!”

난동을 피우는 것도 꽤나 심력과 체력을 소모하는 법이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자 자연스럽게 난동의 강도가 줄어들었다.

그때 즈음에 방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전하. 베쓰입니다.”

황자는 씩씩거리기만 할 뿐 대답하지 않았다.

“문을 열고 들어가겠습니다.”

엘리자베스가 상냥한 표정을 하며 들어왔다.

“어머, 방이 난장판이네요. 이러다 귀한 발이라도 다치시면 어쩌라고 아랫것들이 이리 게으르답니까.”

그녀는 방이 어지럽혀진 이유가 황자 때문이 아니라 밑의 사람들이 잘 모시지 못해서 그렇다는 듯 말하며 황자에게 다가왔다.

“전하, 제 방으로 가시는 것이 낫겠어요. 그간 시종들 보고 전하의 방을 다시 전하께 어울리는 방으로 만들어두라고 할게요.”

엘리자베스는 황자의 팔 위로 나긋하게 손을 얹으며, 더 나긋한 목소리로 그를 을렀다.

“오늘 기분 나쁜 소식을 들으셨다지요? 저도 듣고 어찌나 속이 상하던지. 이게 다 늠름한 전하를 깎아내리기 위한 자들의 악랄한 방책이 아니겠습니까?”

“하!”

“전하께서 이 맥페이든 제국의 유일한 황자시며 후대 계승자가 되실 분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다고요. 그들은 그저 전하의 심기를 어지러뜨리고 싶은 것뿐일 거예요.”

다시 생각해도 기분이 나쁜 듯 황자의 미간이 파였다.

“게다가 전하껜 이 모든 소문을 한 번에 잠재우실 능력이 있으시지 않습니까.”

엘리자베스는 녹아내릴 듯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뭐?”

“제게 전하의 씨를 주시어요. 그 강건하신 몸으로 제게 싹을 틔워 주시어요.”

황자의 가슴팍을 농밀하게 더듬으며 엘리자베스가 미소 지었다.

“그렇지. 계승의 증거만 나타난다면 바로 입 닥칠 것들이지!”

“그럼요. 이 나라의 주인이 되실 분은 전하밖에 없으세요.”

“내 심기를 알아주는 것은 너밖에 없구나.”

“호호. 전 전하의 반려 아닌가요. 당연하지요.”

엘리자베스는 황자를 제 방으로 이끌었다.

“내 씨를 받아 얼른 임신하도록 하거라.”

“아아- 전하!”

또다시 대낮부터 향락에 빠진 헤베타의 궁.

‘이번 헤베타도 계승의 증거를 못 가지면 어떻게 하지? 불안해. 빨리 그 맹약자든 맹약자의 직계 여성을 황성으로 불러들여야겠어. 그런 다음…….’

‘만약 내가 임신을 못 하면 어떻게 되는 거지?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보험이 필요한데, 뭐가 좋을까…….’

그러나 몸과 별개로 머릿속은 각자의 이해관계를 따지며 다른 생각을 하는 중이었다.

* * *

황실로부터 소환령이 떨어졌다.

황제의 인장이 찍힌 그것은 포고령이 되어 전국에 고시되기 시작했다.

[맥페이든력 985년.

새로운 맹약을 뜻하는 상서로운 빛이 북동부의 하늘을 빛냈으니……

…중략…

맹약자는 하루 속히 황성에 입성하여 작위를 받고 그 힘을 제국을 위하여 사용할 것임을 맹세하도록 하라.

또한 북동령의 주인인 크레이머 공작은 귀한 맹약자를 황실까지 안전하게 안내할 것을 명한다.

공작의 안내하에 맹약자는 내달 말까지 황성에 입성하라.

황실에서는 제국의 밝은 미래에 동참할 새로운 맹약자의 탄생을 축하하기 위한 장대한 연회를 준비할 것이다.

…후략….]

그리고 그 포고령은 사이나와 콘스탄틴이 머무르는 크림성에도 내려왔다.

“내달 말이면…….”

사이나는 그것을 읽으며 미미하게 미간을 찌푸렸다.

“2주 정도 남았지요.”

그가 말을 받았다.

“2주 안에 북동령에서 페이즐까지 어떻게 가라고요?”

제국답게 그 영토는 광대했다.

그런데 북동부 끝자락에 위치한 크레이머령에서 황도인 페이즐까지 2주 안에 오라고?

“맹약자를 찾는 즉시 워프 게이트를 타고 오란 뜻이겠지요.”

그렇다. 그건 크레이머 공작더러 워프 게이트를 열고 직접 데리고 오라는 뜻밖에 되지 않았다.

보아하니 맹약자를 찾는 것도, 안전하게 황실까지 데려가는 것도 모두 콘스탄틴에게 떠넘긴 형태였다.

“황자겠네요.”

“아마도.”

소환령에는 황제의 인장이 버젓하니 찍혀 있었지만, 황제가 직접 찍은 건 아닐 것이다. 보나 마나 황자가 황후를 설득하였을 테지.

“제가 맹약자라는 걸 아는 걸까요?”

“그렇지는 않을 겁니다.”

“근데 왜…….”

“그간 유수의 세력들이 맹약자의 정체를 먼저 알아내기 위해 엄청나게 물밑 작업을 해왔습니다.”

“…그랬어요?”

“예. 하지만 아직까지는 아무도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근데 어찌 이렇게 급하게 소환령이 내려왔을까요?”

작정하고 콘스탄틴을 노리고 쓴 것 같은 내용이 아닌가. 그렇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런 의문과 함께 걱정스러운 마음이 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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