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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결혼, 이번 생엔 제가 할게요-180화 (180/233)

180화. 만져도 괜찮아요

의식이 완전히 돌아오기 전에,

눈이 떠지기도 전에,

그가 가장 먼저 인지한 것은 몽글한 향기였다.

한때 그가 미친 듯이 탐하고, 또 갈망했던 그녀의 체향.

자연스럽게 향기의 주인이 뇌리를 일깨웠다.

“사이……!”

그 자각과 함께 의식을 잃기 전 놓쳤던 마지막 단어가 부지불식간에 그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동시에, 순식간에 의식이 수면 위로 올라왔다.

“……나?”

마지막 기억이 또다시 그녀를 손 앞에서 놓쳤던 것인 만큼, 의식이 깨어남과 동시에 그는 스스로의 무능함을 욕하며 그녀를 찾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아니, 일으키려다가 몸에 느껴지는 이상한 촉감에, 시야로 들어오는 강렬한 광경에 정지된 것처럼 멈칫하고 말았다.

“으음….”

사… 이나? 어째서 그녀가 제 품 안에서 자고 있는 거지?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별일이 없었던 건가?

여러 생각들이 스쳐 지나갔으나, 별일이 없었던 것은 아닌 것 같다.

그녀의 머리색이 다시 돌아왔기 때문이다. 그렇다는 이야기는 무슨 일이 있기는 있었다는 뜻이 분명했다.

그러나 당장 그 궁금증을 해결할 계제가 아니었다.

그녀의 수명을 깎아 먹으며 있어서는 안 될 접촉을 또다시 저지르고 있지 않은가.

제 파렴치한 무의식에 욕설을 퍼부으며 콘스탄틴은 파드득 다시 몸을 일으켰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몸에 닿아 있던 부분에서 느껴지던 말랑한 촉감이 지나치게 생생하여 아랫배가 뜨끈해지는 기분이 들었으나, 그는 이를 악물며 몸을 물렸다.

“헉.”

그런데 실패했다.

도망가려던 그를 그녀가 휘감듯 끌어 안아왔다. 허리를 휘감은 것도 모자라 가느다란 다리가 그의 다리 사이에 얽혀들었다.

절대 나갈 수 없게 옭아매기라도 하는 듯했다.

“…더 자요…….”

작게 옹알거리며 그녀가 그의 등을 토닥였다.

하아. 잇새로 절로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 작은 속삭임에, 작은 토닥임에 그는 순식간에 굴복하고 싶어졌다. 이대로 그녀의 곁에 누워, 이 감미로운 순간을 조금 더 연장할 수만 있다면 무슨 대가라도 치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안 될 말이지…….’

그에게 피해가 되는 거라면 얼마든지 감수했을 테지만, 문제는 그 반대라는 것.

벗어나야만 했다. 콘스탄틴은 다시 슬금슬금 몸을 물렸다.

그녀는 묘하게 집요한 형태로 그를 감고 있는 것으로도 모자라 몸을 밀착시킨 상태였다. 뜨끈하면서도 말랑한 촉감이 자꾸 그를 자극하고 있어 그렇지 않아도 얄팍한 그의 인내심이 실시간으로 휘발되고 있었다.

게다가 그녀의 잠옷이 얇아도 너무 얇았다. 이렇게 붙은 상태에서는 맨살끼리 닿지 않게 움직이는 것조차 비비적대는 것처럼 느껴져 고역이었다. 신종 고문처럼 느껴질 정도다.

“…사이나.”

결국, 그녀를 깨워야만 할 것 같다.

게다가 여긴 자신의 방.

그녀가 그를 여기까지 데려와 눕힌 건가?

‘…그러고 보니 어떻게?’

그는 분명 정신을 잃었다. 그런데 깨어보니 크림성 내(內) 공작의 방이라?

그녀가 자신을 이리 옮겨올 수 있을 리는 없는데?

그렇다고 누군가를 불러서 옮길 수도 없다. 서탑은 앞서 말했듯이 가주의 허가 없이는 드나들기는커녕 그 존재조차 알 수 없는 곳이므로.

“…사이나. 내가 어떻게 여기 있습니까?”

그러다 보니 당연히 이런 질문이 나왔다.

“옮겼어요…. 제가…….”

사이나는 잠에 취한 상태로 웅얼거리듯 대답했다.

“그대가요…? 그대가 어떻게 나를…….”

하나 말이 되지 않는 것은 여전하다.

“…수호령의 힘으로…….”

“…….”

아, 그렇구나.

그녀는… 정말 각성했구나.

이젠 맹약자야… 나와 같은…….

갑자기 이 사실이 너무나 신기하고 새삼스러웠다.

만남 초반부터 기이한 기운을 풍기던 그녀는, 결국 맹약자가 되고 말았다.

“…축하합니다. 사이나.”

“…….”

“이런 기적 같은 일이…….”

몇 개의 기적인가.

여태껏 살아오며 상상조차 한 적 없던 일들이 벌써 몇 개나 벌어지고 있는 것인지…….

수백 년째 대대로 내려오던 블랙 다이아몬드가 해석되었다.(이건 좋은 일이라고 볼 수만은 없지만.)

결혼은커녕 여자를 만날 일도 없다고 생각했던 그에게 사랑하는 여인이 생겼다.

맥이 끊긴 각성자를, 500여 년 만의 맹약자를 직접 보았다.

심지어 그 맹약자는 제가 사랑하는 여자다.

그렇지 않아도 소중했던 존재가, 이제는 더 그가 붙잡아서는 안 될 정도로 존귀한 존재가 되어버렸다.

‘…이런 일이 일어날 수가 있나?’

참으로 현실 같지 않은 일들의 나열이다. 도통 믿기 어려울 정도로 말이다.

그런데… 더 현실 같지 않은 일이 일어났다.

부스스 눈을 뜬 그녀가 그를 올려다보더니 갑작스레 그의 손을 붙들었다. 그의 손바닥 안으로 제 볼을 비비며 지독히도 예쁘게 굴었다.

흠칫 놀랐으나 차마 손을 빼내지 못할 정도로 귀한 광경이었다.

기껍고 귀엽고 사랑스러웠으나, 어떤 꿈같은 광경도 기적도, 그가 그녀와 닿을 수 있는 이유가 되지는 못한다.

“…이러면 안 됩니다.”

그는 어떻게든 손을 빼내려 했으나 의외로 그녀의 힘이 셌다.

물론 강하게 힘을 주면 뺄 수야 있겠지만, 그녀를 뿌리쳐야 할 것이다. 그러다 그녀가 나동그라질지도 몰랐다. 그가 그렇게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손을… 사이나……. 이러면 안 돼요. 알지 않습니까…….”

닿아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시시각각 그녀의 생명력을 갉아먹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초조해졌다.

그런 그의 심정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는 더 볼을 깊게 묻으며 가르릉거리는 고양이처럼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 간극이 너무 괴로워 미칠 지경이었다.

“괜찮아요.”

“아니요, 제발…. 그대에게 해를 끼칠 수는 없습니다.”

“정말 괜찮다고요.”

“무슨…….”

“제겐 해가 되지 않아요.”

그녀가 그를 올려다보며 싱긋 웃었다.

“칼리고의 기운은 절 침범하지 못해요.”

그녀가 유리에게 꼭 알고 싶다고 했던 질문이 바로 이거였다.

그는 정말 대답해주기 싫다는 표정으로 투덜거리며 대답해주었다.

이 문제로 둘이 매우 괴로워하는 걸 알고 있었으면서 여태 모른척한 것이 꽤 괘씸했으나 유리를 다시 만났고, 그와 닿아도 괜찮다는 확언을 듣고 나니 다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래부터 그랬어요. 전 당신에게 한기를 느낀 적이 없다고 전부터 말했잖아요.”

이게… 이게 무슨 뜻이지…….

혼란에 빠진 그를 더 혼란하게 하려는 듯, 그녀가 벌떡 일어나더니 그의 어깨를 밀었다.

그다지 센 힘이 아님에도 풀썩, 뒤로 넘어간 그의 몸을 타고 그녀가 위로 올라왔다.

“칼리고는 어둠. 제 수호령은 빛.”

“……아.”

“빛은 어둠을 살라 먹는 법이죠. 그러니…….”

그녀의 손길이 그의 이마를 쓸고 머리카락을 넘기더니 볼을 감쌌다.

그사이 그녀의 얼굴이 아까보다 가까워졌다.

‘뭐라고? 그럼…….’

괜찮다고? 정말? 그녀와 닿아도… 상관없다고?

꼭 맞춘 것처럼 그에게 유리한 행운이라 좀처럼 믿기가 힘들었다.

칼리고는 수호령 중에서도 상당히 강한 축에 속했으므로.

싸워본 적은 없으나 황가의 아켈리온에게도 지지 않을 것으로 그는 예상했다.

“어둠이… 빛을 잠식하기도 합니다…….”

그러니 장담하기 힘든 것 아닌가?

그녀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힘의 강도로 인해 어둠이 빛을 잠식한다면…? 그러면 어떻게 한단 말인가.

“진짜라니까요? 설마 제가 제 목숨을 가지고 거짓말을 할까 봐요?”

“…그대라면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콘스탄틴, 당신을 사랑하지만 그런 짓은 안 해요. 당신이 마음 아파할 텐데.”

“…뭐…… 예에?”

그는 순간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사, 사랑? 지금 사랑이라고 했나?

그 전까지 무슨 대화를 했는지도 순간 잊었다.

그런데 그녀가 웃었다.

나붓하게. 입가를 길게 늘이며.

“사랑해요.”

지독히도 사랑스러운 표정으로 입술을 움직였다.

“사랑해요, 콘스탄틴.”

그리고 그는 그녀의 고백에,

그녀의 미소에,

나무토막처럼 굳어버렸다.

“유적지에서 정신을 잃기 전에, 불현듯 깨달았어요.”

“…….”

“난, 당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걸.”

마치 심장이, 시간이, 세계가, 멈춰버린 것만 같았다.

‘…방금…… 뭐지, 이게?’

그만큼 비현실적이었다.

‘…환청? 아니, 환상인가?’

그녀의 머리 색이 달라졌을 때부터 알아봤어야 하는 건데…….

누군가 그의 생체 시간을 정지시켜놓기라도 한 것처럼 멍한 표정으로 굳어 있는 콘스탄틴을 보며 그녀가 손을 뻗었다.

차츰 다가오는 발간 입술을 보면서도 그는 전혀 현실감이 들지 않았다.

그의 목을 나긋하게 감으며 그의 상체를 당기는 힘에도, 살포시 내려앉은 입술이 그의 것을 감싸며 빨아올릴 때도, 그것도 모자라 그 사이로 달금한 살덩이가 들어와 제 것을 느릿느릿 쓸며 자극할 때도.

그는 멍했다.

도무지, 현실처럼 느껴지질 않았다.

그의 범주에 없던 말.

살면서 기대조차 하지 않았던 그 말.

그 고백.

그것도 모자라 제 입술을 뭉근하게 문지르는 보드라운 감촉은 상상 그 이상이어서 그는 오히려 아무런 행동도 할 수 없었다.

자칫, 조금만 잘못했다가는 가차 없이 깨어질 얇은 유리막 같은 꿈처럼 느껴져서 말이다.

누군가 정지라도 시켜놓은 것 같은 그를 보며 사이나가 한숨처럼 웃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욜리.”

그러더니 익숙한 이름을 읊조렸다.

겪어본 적은 있으나 경도가 다른 기운이 휘몰아치더니 한 짐승이 나타났다.

늑대 형상을 한 짐승.

사이나는 그 짐승을 욜리라고 했다.

전에 본 욜리와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소환된 짐승은 수호령의 특징인 이마의 문양과 날개를 지니고 있었다.

전에 어딘가 발발거리던 이미지는 사라지고 수호령이 지니는 강대한 기운과 이 세계의 것과 다른 남다른 특유의 기운을 풍기고 있었다.

‘결국 녀석이었나.’

사이나 곁을 맴돌던 지나치게 영특하던 짐승은.

“내 남편이 도무지 믿질 않네. 네가 말 좀 해줘야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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