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화. 믿기지 않는 재회
-시, 싫어! 주인아… 당장… 당장 나가…!
이 새낀 또 왜 이러지?
그러나 왜 그러냐고 물을 틈도 없었다.
어찌할 겨를도 없이 앞쪽에서 빛살이 터져 나왔다. 마치 빛살에 물리력이 있는 것처럼 그는 뒤로 떠밀렸다.
사이나로부터 강제로 멀어지는 감각에 어떻게든 그녀를 붙잡아 보려 했으나, 손은 그저 허공을 휘저을 뿐이었다.
그는 흡사 빛에 부식이 되어 사라지는 것 같은 감각을 느끼며 멀어졌다. 강렬한 빛에 의식마저 먹히는 듯했다.
거기에 겨우 저항하며 그가 입술을 움찔거렸다.
‘사이……나….’
성대가 완성하지 못한 이름이 빛살에 사그라졌다.
* * *
“야.”
사이나는 빛살에 삼켜지며 정신을 잃었다.
그리고 깨어나 보니 온통 흰빛이 가득한 공간. 그녀는 외부와 괴리된 묘한 곳에 자신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대체 여긴 어디지? 아, 방금 누군가 날 부르지 않았나?
사이나는 멍한 시선을 들어 고개를 틀었다.
“오랜만이네.”
그리고 마침내 그녀는 믿을 수 없는 장면을 목도했다.
“……리?”
유리와 똑같이 생긴 사람이다. 아니, 유리인가?
그녀와 같은 색의 제비꽃색 눈동자, 닮은 생김새의 남자가 사이나를 향해 웃고 있다.
‘꿈인가?’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하기가 무섭게, 마치 그녀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유리가 정정했다.
“꿈은 아니니, 얼른 와서 안기지 그래?”
그리고는 팔을 활짝 펴고 웃었다. 얼른 와서 제 실존을 느껴보라는 것처럼.
“정말이야? 정말… 너야? 유리?”
“보면 모르겠어?”
“…….”
잠시 멍하게 있던 사이나는 걸음을 옮겼다.
천천히. 천천히.
그런 그녀의 모습을 유리는 일말의 재촉도 없이 한자리에 서서 기다려주었다. 미소 띤 얼굴로 그녀를 응시한 채로.
종국에 그의 바로 앞에 서게 된 사이나는 천천히 팔을 들었다.
“-헉!”
하나 그녀가 그에게 팔을 두르기도 전에 화악 먼저 휘감긴 팔이 그녀의 허리를 붙잡아 들고는 크게 휘돌았다.
유리는 목을 울리며 크게 웃었다. 사방에 웃음소리가 울려 퍼지는 느낌이 따뜻하고 즐겁게 심장을 진동시켰다.
“사야.”
양껏 웃고 난 그가 그녀를 다시 바닥에 내려주며 말했다.
“나 돌아왔어.”
델본에서 유리가 나무를 타고 밤 탈출을 하거나, 미처 그녀에게 말을 남기지 못한 상태에서 외출할 때면, 그는 항상 암호를 남겨두곤 했다.
테라스 외벽에 남겨놓던 둘만의 암호.
[곧 돌아올게.]
책상에 새겨두었던 그 도형처럼.
유리가 돌아온 것이다.
“응…. 잘 돌아왔어….”
사이나가 유리의 허리를 족쇄라도 채우듯 꽉 안으며 웅얼거렸다. 벅찬 느낌에 심장이 뻐근해서 목소리를 내는 것도 힘들게 느껴졌다.
“고마워…. 돌아와 주어서…….”
더할 나위 없는 진심이다.
유리가 자신을 위해 무엇을 감수했는지 안다.
그렇기에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된 것이 얼마나 기적인지도 알고 있다.
“용케 여기까지 왔네. 믿고 인생을 건 보람이 있다.”
그가 씨익 웃었다.
사이나는 각성을 하는 동안 본 기억의 편린들을 통해 대략적일지언정 유리가 감당해야 했을 시간을 추측할 수 있었다.
지난하고 기약 없는 고행의 시간을 홀로 걸었을 것이다.
그 고생을 해놓고 별거 아니라고 웃는 얼굴을 보니 사이나는 울컥했다. 버럭 손이 나갔다.
“-왜!”
짝- 짝-! 등짝에 내리치는 손길에 찰진 소리가 피워 올랐다.
“아! 야야!”
“-그랬어!”
현실이 아니라 그런지 느낌이 묘하게 마찰감이 설은 것이 하나도 안 아플 것 같은데, 유리는 허리까지 접어가며 엄살을 피워댔다.
“누가-!”
“으악! 아!”
“그렇게! 해 달랬어?!”
“야야! 아퍼어!”
“갑자기 깨어났는데 아무도 널 기억 못 해서 내가…….”
사이나가 그의 등을 때리던 손을 내려 그의 옷깃을 꽉, 쥐었다.
“얼마나…….”
유리가 그녀를 다시 안아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괜찮아. 다시 이렇게 만났잖아.”
어쩐지 훨씬 원숙해지고 성숙해진 느낌을 풍기는 유리였다.
그게 좋게만 느껴지기보다는 고생스러운 삶을 살았던 흔적 같아서…….
둘은 한참을 그렇게 말없이 안은 채 있었다. 서로의 존재를 실감하며 말이다.
꽤 오랜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사이나는 감정을 추슬렀다. 그리고 물었다.
“……아버지랑 오라버니 그립지 않아?”
유리는 대답을 하기보다는 슬쩍 손을 휘둘렀다. 그러자 아무것도 없던 공간이 변화했다.
아까 본 탑의 최상층과 같은 광경이 되었다.
눈을 동그랗게 뜬 사이나를 유리가 의자에 앉히고는 자신은 책상에 엉덩이를 기댔다.
“아니라고 말하면 거짓말이겠지만…… 후회는 안 해.”
“…….”
“게다가 아버지랑 형도 이 결과를 안다면 잘했다고 하실걸?”
“퍽이나 그랬겠다.”
아무렴 유리도 귀한 아들에 동생인데 그러겠는가.
“차남이라 다행이었지. 형이 고생을 많이 했어.”
유리는 약간 쓴웃음을 지었으나 이내 말을 돌렸다.
“너 발음 틀렸더라.”
“……뭐?”
그리고 뜬금없이 사이나를 지적했다.
“네가 읽었던 구문말이야. 여기.”
갑자기 책상 위에 노트가 나타났다.
사실 저 노트는 분명 그녀가 전생에 [수호령과의 대담]이라는 책을 번역했던 것인데 왜 크레이머령의 서탑에 있는 건지 모르겠다.
노트의 내부는 자신이 쓴 서체가 반, 그 뒤로는 다른 자의 거친 필체가 반이었다.
아마도 유리의 서체겠지만, 사이나가 알던 것과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어른이 되면서 더 흘려 쓰기 시작한 모양인지 이따금은 암호처럼 보이기까지 한 서체가 빼곡하게 노트의 뒤쪽을 채우고 있었다.
사이나가 완성하지 못했던 절반의 번역을 유리가 해냈다.
마지막 장에 수호령과의 계약을 완성하는 구문을 아를어로 따로 적어두기까지 한 것을 보니, 그 책이 완전 허무맹랑한 것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책상에 새겨진 암호를 보자 노트에 유리를 다시 만날 수 있는 방법이 적혀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어서 그렇게 한 건데 예감이 맞았다.
“내가 다시 말해볼 테니. 잘 들어봐.”
낭랑하게 퍼지는 아를어의 발음을 따라 주변의 색이 일순 옅어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으나 금세 복구되었다.
“어때? 발음 죽이지?”
“…….”
아를어 발음이 좋은지 안 좋은지 검증을 해주려면 고대인이 와야 하는 거 아닌가. 갑자기 왜 남의 발음에 트집이람?
‘…너 변태냐? 이게 재밌다고?’
사이나의 취향에 대체로 다 동조해줬던 유리지만, 그런 그로서도 아를어에 대해선 난색을 표하지 않았던가. 심지어 변태 취급까지 하면서…….
그런데 이젠 유리가 사이나보다 아를어에 더 능숙하다니.
참 세상일은 알 수가 없달까.
“네 글씨가 워낙 괴랄해서 그래. 똑바로 읽어낸 것만으로도 대단하다고 생각하는데?”
하지만 사이나는 심술처럼 유리 탓을 했다.
잘난 척을 하는 꼴을 보니 어쩐지 인정해주고 싶지가 않았다.
“허어, 무슨-.”
“유리, 네가 좀 악필이어야 말이지.”
“핑계를 이런 식으로 돌리는군.”
그가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유리라니. 오빠라고 불러.”
“이것도 여전하네, 정말. 30분 가지고.”
고작 30분 일찍 태어난 걸로 어찌나 오빠 행세를 하려 드는지.
“야, 30분이 뭐야. 정령계에서 내가 몇 년을 기다렸는지 알아?”
…뭐? 그냥 바로 시간이 연결된 게 아닌 건가? 정령계에서 따로 시간을 보냈다고?
“그게 무슨 말이야?”
“하…. 말하면 입 아프지.”
“뭐야. 설마 엄청 고생이라도 한 거야?”
사이나는 혹시 그가 감당하기 힘든 대가라도 치러야 했던 것은 아닐까 싶어 추궁했다.
“그냥… 뭐, 오래 있었어.”
“얼마나 오래?”
“나름 보안 사항도 있어서 말 못 해. 이쪽이랑 시간의 흐름이 좀 달라서 그런 거니까…….”
말을 못 하는 걸까, 안 하는 걸까.
사이나는 거짓말의 기색이 약간이라도 있을까 싶어 집요하게 유리를 응시했다.
“네가 걱정할 만한 일은 없었어.”
그러자 유리가 재차 강조했다.
유리가 보낸 세월 때문인가. 집요한 관찰이 무색했다. 예전엔 쉽사리 읽을 수 있던 진심이 모호하게 읽혔다.
그가 작정하고 숨기려 하면 사이나로서는 이제 그 진위 여부를 가려낼 수 없을 것 같았다.
“진짜라니까? 속고만 살았나.”
“알았어.”
살짝 한숨이 새어 나왔으나 더 깊게 캐묻기도 그랬다.
듣는다고 그 시간을 지워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리고 그거 안 따져도 충분해. 야, 내가 전생만 따져도 너보다 몇십 년을 더 살았어!”
“…….”
그리 말하니까 할 말이 없네.
하지만 유리는 유리인걸.
사이나는 오빠라고 불러주지 않겠다는 듯이 입술을 꾹 다물었다.
어쩐지 훌쩍 커버린 것 같은 모습에 더 불러주기 싫기도 했다.
그러다가 불현듯 떠올랐다.
“콘스탄틴!”
유리를 만난 감격에 생각도 못 하고 있었다.
“그가 걱정할 텐데!”
“…….”
“여기 어디야? 나 내보내 줘. 아, 그리고 그는 괜찮은 거야?”
사이나의 질문에 유리는 표정을 구겼다.
“그냥 잠깐 의식을 잃고 있을 뿐 멀쩡해.”
“다행이다.”
“쓸데없이 걱정이 많네.”
“쓸데없다니……. 내 남편인데 걱정하는 게 당연하지.”
“그러니까! 왜 남편이냐고!”
이건 뭔 반응이야?
“내가! 그렇게 말렸는데! 그때 말만 통했어도!”
유리는 후회가 막심하다는 듯 굴었다.
그러고 보니 그와 결혼하겠다고 했을 때 욜리가 화를 내다 못해 우울해했었지.
“왜 그런 건데?”
“하, 좋은 놈이 아니니까!”
좋은 놈이 아니라고? 콘스탄틴이? 대체 어느 면에서?
“…너 그의 도움을 받지 않았어?”
짧은 기억들이 보여준 장면만 봐도 그렇고, 마지막에 유리는 거의 서탑에서 살다시피 하지 않았는가.
콘스탄틴의 지원과 허락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그거야- 그 자식도 책임이 있으니까!”
“책임? 무슨?”
“그건 나중에 얘기하자. 갓 재회한 마당에 나눌 화제로는 적합하지 않은 것 같아.”
실컷 궁금하게 해놓고는 나중에 하자니.
상당히 불만족스러운 처사였으나, 당장 콘스탄틴을 챙겨야 한다는 자각이 더 급했기에 사이나는 더 추궁하지 않기로 했다.
“그건 그렇고 나 꼭 알고 싶은 거 있는데…….”
아마 유리라면 대답해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혹시 그것도 그 작자에게 관련된 질문이야?”
“…….”
그런데 어째 반응이…….
욜리일 때도 콘스탄틴이 엮이면 컁컁대며 불쾌해하더니, 유리일 때도 똑같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이건 꼭 알고 싶다. 알아야만 했다.
사이나는 단호한 얼굴로 한 가지를 물었다.
“솔직하게 말해줘.”
“하…. 그건…….”
유리의 입술이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