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화. 한때, 서탑의 거주자
그는 그간 그녀가 크림성에서 해온 행동 반경을 대부분 꿰고 있었다.
그녀를 멀리하게 되며 콘스탄틴은 그녀의 하루 일과를 보고받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사이나를 감시하거나 할 목적은 아니었다.
그저, 그리움에 그녀의 행적을 되짚는 행동이라도 해야 할 필요가 있었을 뿐.
또한, 제가 직접 그녀를 챙기는 것들을 못 하게 되면서 혹시 놓치는 것이 있을까 봐 그런 이유도 있었다.
어쨌든 이러한 이유로 그에게는 자연스럽게 형성된 정보가 있었다. 그는 그녀가 주로 시간을 보내는 장소가 어디인지, 크림성에서 발걸음도 안 해 본 곳은 어디인지 등에 관해서.
그런데 지금… 둘이 함께 가는 방향을 보아 후자였다.
그가 알기로 그녀가 한 번도 걸음 하지 않았을 곳.
‘사이나, 그대는…….’
수백 년이 넘는 세월 동안 크레이머가의 존속들이 살았던 크림성의 내·외부는 상상 이상으로 넓고, 비밀의 장소도 많았다.
누군가의 설명이 없다면 용도조차 모를 곳들도 꽤 있었는데, 사이나가 올려다보고 있는 이 낡은 탑 역시 그중 하나였다.
서쪽의 오래된 탑.
가주들이 보통 ‘서탑’이라고 부르는 이곳은 보통의 경우라면 호수 위 유적지와 마찬가지로 보이지도 않아야 정상일 건축물이었다.
그런데 그녀는 이곳을 거침없이 찾아냈다.
그는 도무지 그녀에게 벌어지는 일들을, 이런 상황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이해 못 한다고 해서 막을 생각은 없으니 딱히 상관없지만…….’
그래도 질문은 튀어나왔다.
“여기가 뭐 하는 곳인지 알고 온 겁니까?”
“원래는 몰랐어요. 근데 지금은 알아요.”
대답을 들어도 이해 안 가는 건 마찬가지군.
그런 그의 속내를 간파했는지 사이나가 작게 웃으며 덧붙였다.
“제가 잠들어 있던 동안… 봤어요.”
“이 탑을요?”
“네. 이 탑에서 아주 오랜 시간을 보냈던… 한 사람을…….”
서탑에서 오랜 시간을? 과거에 있었던 한 사람일까? 각성의 여파로 유적지를 만든 고대인을 본 건가? 그가 크레이머가에 살았던 거고?
자연스럽게 그런 생각의 흐름이 지나갔다.
하지만 사이나의 표정이 단순하지 않았다.
눈물이 되어 흐르지는 않았으나, 습기가 어린 채 흔들리는 눈동자는 분명 격한 감정에 휩싸여 있었다.
그저 누군가의 삶의 편린을 보고 공감하여 슬퍼하는 것이 아니라, 그녀 본인이 느끼고 또 직접 경험한 감정 같았다.
누군가를 매우 그리워하며, 또 무언가에 매우 슬퍼하는…….
샘에서 깨어나자마자 쏟아냈던 그 오열은 사실, 저가 아니라 다른 사람을 향한 것이었나?
그건 갑자기 스쳐 지나간 예감이었다.
“혹시 깨어났을 때…….”
그러다 보니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왜 울었는지 물어도 됩니까?”
그 사람 때문인가요? 무슨 사이였는지 물어도 됩니까? 혹시… 깊은 사이… 였습니까?
입 밖으로 차마 꺼내지 못한 말들이 다시 삼켜졌으나, 사라지지는 않았다. 불안함이 되어 뇌리에 엉겨 붙었다.
“욜리를 찾으면…….”
그런 그를 보며 그녀가 말했다.
“할 말이 있어요.”
그리고 그건 그가 물었던 질문에 대한 답이 아니었다.
까마득한 슬픔을 되새기는 것 같은 표정에, 그의 심장이 조여들었으나 더 물을 수는 없었다.
“…예.”
그저 그 할 말이라는 것이 그에게 잔인한 것이 아니기를 빌어볼 뿐.
* * *
둘은 문을 열고 탑에 올랐다.
서탑의 최상층까지.
가주에게 내려오는 유산의 일종으로서 이런 곳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확인차 한 번 방문하기는 했으나 대충 아래의 몇 개 층만 둘러보고 떠났다. 층마다 대부분 비슷한 서고 형태였으므로 더 봐야 할 필요성도 못 느꼈다.
그렇다 보니 탑의 꼭대기 층까지는 처음 올라와 봤다.
‘…이런 곳이었나.’
아래쪽 층과 다르게 최상층은 생활 공간이었다. 작업을 할 수 있는 책상과 의자를 비롯해 간이침대와 보관함 등이 들어가 있었다.
‘……뭔가 이상한데.’
그는 최상층의 내부를 훑어보며 뭔가 이상함을 느끼고 있었다.
생활 공간이라는 의외성 때문에 이상한 것이 아니라 뭔가 묘한 기시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제비꽃색 눈동자의 누군가가 여기에서…….’
여기에서……? 뭐?
갑자기 떠오른 이미지에 되레 당황한 것은 콘스탄틴.
제비꽃색 누구? 여기서 뭘 어쨌다는 거지?
이곳과 제비꽃색 눈동자의 조합이 익숙하게 느껴지는 이 말도 안 되는 기시감은 대체 무엇 때문일까.
그에겐 이곳이 익숙하게 느껴질 만한 이유가 전혀 없는데 말이다.
이곳은 일종의 비밀 서고다.
역대 가주들의 비망록과 대대로 내려오는 기록물들을 보관하는 곳이다.
지금은 어떻게 구현하는지도 모르는 고대의 힘이 탑을 보호하고 있었고, 그로서는 일 년에 한 번 이곳을 찾아 표지석에 수호령의 힘을 주입하여 그 결계를 유지하는 것으로 가주의 역할을 다하고 있었다.
가문의 치부를 비롯해 민감한 정보들이 많을 수밖에 없어 가주 외에는 후계자라 할지라도 출입을 금하는 곳이었다. 그로서도 승계 과정이 모두 끝나고 나서야 존재를 알게 된 곳이다.
하지만 그는 존재를 알게 된 후에도 이곳의 내용물들을 읽어볼 생각은 하지 않았다. 관심조차 없었다.
이미 선대 공작 부부의 만행에 질린 터라 굳이 품을 들여 보지 않아도 짐작이 가능했다.
대대로 더 거지 같고 끔찍한 일들이 비일비재했을 것임을.
그는 구태여 그것들을 들추어보며 지나간 괴로움을 다시금 곱씹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 보니 이곳에 이렇게 익숙한 느낌을 받는 것 자체가 말이 되질 않는 것이다.
그런데 제비꽃색 눈동자라니…….
‘사이나와 함께 와서 그런 걸까?’
분명 처음 들어와 본 것일 텐데 어딘가 익숙해 보이는 느낌으로 사이나가 움직이는 것을 보고 있자니, 콘스탄틴도 그렇게 느끼는 것이 아닐까 싶어지는 것이다.
제 안의 설명하지 못할 기시감에 대하여 의문을 느끼며 그는 사이나를 보았다. 혹여 답을 찾을 수 있을까 하여 말이다.
그러나 사이나는 그와 별개로, 그리고 그와 비슷하게 무언가를 보고 있는 듯했다.
저 아련한 시선, 추억을 더듬는 것 같은 손길.
아마도 그녀가 떠올리고 있을 어떤 기억을 따라 손가락을 흘리며 물건들을 더듬어가는 듯 보였다.
침대를 따라, 책장을 따라, 의자를 따라.
시간이 농밀하게 쌓아둔 먼지가 하얀 손가락에 진득하게 묻어났으나 개의치 않는 듯했다.
그리고 마침내, 책상 위에서 그 손이 한참을 머물렀다.
“여기서 넌…….”
아련하게 읊조리는 목소리는 작았으나 그의 귀에는 선명하게 꽂혀 들었다.
여기서 넌? 누구를 말하는 거지?
뒷말이 더 이어지길 바라며 그가 청력을 더 곤두세웠으나, 갑자기 사이나의 말투가 바뀌었다.
“……어, 어?”
사이나가 허둥지둥한 몸짓으로 책상 위에 놓여 있던 노트 하나를 집어 들었다.
“……말도 안 돼.”
그리고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몸을 떨었다.
“…사이나?”
노트를 넘기는 다급한 손짓에 먼지가 뽀얗게 날아올랐다.
“이게… 왜…… 여기…….”
알 수 없는 의문을 표하는 그녀의 목소리가 떨렸다.
휘청거리는 움직임에 노트가 툭 떨어졌다. 콘스탄틴이 반사적으로 그녀의 허리를 붙잡았다.
이 노트가 대체 뭐기에 이런 반응이란 말인가.
“앉는 게 좋겠습니다.”
언제부터 이곳에 존재했는지 알 수 없는 의자라 안정성이 의심되기는 했으나 등받이를 잡아 단단함을 가늠해보자 아직 괜찮은 듯했다.
그녀가 앉아도 먼지가 피어오를 뿐, 삐걱거리는 소리가 나거나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아까부터 그녀의 주변에 너무 먼지가 자욱하여 거슬리기에, 그는 수호령의 힘으로 풍압을 일으켜 먼지를 몰아냈다.
그래봤자 밀폐된 공간이라 내부에서 휘도는 먼지의 양이 줄어드는 것은 아닐 테지만, 그녀의 근처라도 깨끗해지는 것에 만족했다.
한데 사이나가 다시 벌떡 일어났다.
갑자기 무얼 또 추가로 발견했는지 책상 위를 손으로 벅벅 문대기 시작했다.
“…사이나? 손 다칩니다.”
“하…….”
짙은 먼지로 가려져 있을 땐 보이지 않았던 흔적.
책상 위엔 낙서가 있었다.
조악한 몇 개의 도형 같은 것들의 나열.
펜으로 쓴 것이 아니라 칼 같은 것으로 새긴 듯 보였다.
“곧…….”
그런데 그 낙서를 사이나가 손으로 하나씩 매만지며 웅얼거렸다.
“돌아… 올게…….”
마치, 낙서가 아니라 글자를 읽는 것처럼.
투두툭.
“사, 사이나?”
그리고는 사이나가 바로 눈물을 떨구기 시작했다. 갑자기 당혹스러워진 그가 어설프게 그녀를 달랬다.
“우, 울지 말아요. 왜…….”
“흐… 으…….”
사이나가 북받쳤는지 갑자기 그에게 달려들었다.
“……사야?!”
가느다란 몸이 그의 품에 폭 안겨 든다.
바들거리는 손이 그의 옷깃을 필사적으로 붙잡더니, 이내 통곡했다.
“흐어어어어엉!”
저번처럼 오열에 가까운 울음에 그는 차마 그녀를 밀어낼 수 없었다.
그 울음소리에 그의 심장 역시 함께 찢기는 듯했다.
그는 맨살이 닿지 않는 범위를 골라 조심하며 통곡하는 몸을 품에 안았다.
“울지 말아요…….”
그대가 울면, 난…….
“무엇 때문인지, 말을 해봐요. 내가… 내가 해결하겠습니다.”
“으흐흐흑…….”
“울지 말고… 제발…….”
우는 그녀를 더는 울지 못하도록 삼켜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현실은, 그녀에게 불온하게 닿을까 걱정이나 해야 하는 그런 상황.
이렇게 사이나가 우는데 위로보다도 접촉의 범위나 걱정해야 하는 현실이 너무 비참했으나, 그럼에도 슬플 때 제게 이렇게 안겨드는 모습이 기꺼워 기쁘기도 했다.
그러다가도 대체 누굴 위해 이리 우는지 알 수 없어 목이 메어 왔다.
얼마나 너절한 감정인가.
갈팡질팡하는 감정의 폭풍우 속에서 마음과 달리 그는 그저 그녀가 울다가 혼절이라도 할까 두려워 옷 위로 허리를 붙잡고 있는 게 다였다.
“…사야?”
그런데 한참을 울던 그녀가 갑자기 울음을 그쳤다.
그러더니 그에게서 빠져나가 아까 떨궜던 노트를 다시 잡아서 책상 위에 펼치고는 미친 듯이 페이지를 넘기기 시작했다.
“여기, 아냐……. 이것도… 아니고…….”
그렇게 한참을 넘기던 그녀가 어딘가에서 멈추더니 뭐라고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대충 들어도 제국어는 아니었다. 아를어인 듯했다.
대체 무얼 읽는 거지?
“…사이나? 이게 무슨…….”
의문을 가지기가 무섭게 주변의 공기 자체가 일순 묵직해졌다.
콘스탄틴은 반사적으로 힘을 일으켰다. 그렇지 않으면 공기의 무게 자체에 휩쓸릴 것 같은 그런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끄아아악!
그리고 힘을 끌어오자마자 칼리고가 비명을 질러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