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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결혼, 이번 생엔 제가 할게요-176화 (176/233)

176화. 각성의 순간

뒷모습만 보이는 한 여자가 보울을 잡고 토악질을 하고 있었다.

저 보울은 과일 등을 넣어놓는 장식의 용도로 쓰는 그릇인데…….

‘…술을 과하게 마셨나 보네.’

그렇다고 해도 토하려면 레이디스 룸에 갈 일이지 왜 휴게실에서…….

어지간히 급했던 모양이라고 생각하며, 다시 돌아나가려던 차였다.

『-사, 사이나?』

갑자기 돌아선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

『…엘리자베스?』

어쩐지 사이나를 보자마자 창백하게 질리는 안색이, 들켜선 안 되는 장면을 들킨 것 같은 표정이었다.

공작부인이 휴게실에서 토하더라. 그런 소문이라도 낼까 봐 그러나?

『괜찮아?』

서로의 결혼 이후 데면데면해져 몇 년간 거의 말도 하지 않았지만, 막상 이렇게 얼굴을 마주하자 예전에 친구였던 시절처럼 말이 나왔다.

『몸이 안 좋은 거면, 누굴 불러다 줄까?』

『여긴 어쩐 일이야?』

황급히 입가를 닦으며 엘리자베스가 물었다.

난처한 모습을 보여서일까. 어째 목소리가 뾰족했다.

『잠시 쉬려고 왔다가-』

『선객이 있으면 다른 휴게실을 찾아야 하는 거 모르니? 설마 그 정도 기본도 모르는 거야?』

갑작스러운 비난에 사이나는 잠시 멍해졌다가, 금세 어이가 없어졌다.

본인이 당황스럽다고 남에게 이렇게 할 건 아니지 않나?

『그건 나도 아는 바지만, 밖에 표시가 없는데 어찌 구분하겠어?』

다른 사람과 합석을 원하지 않는 경우에는 보통 바깥에 선객이 있다고 문고리를 돌려놓는 것이 암묵적 룰이지만, 이 방엔 없었다.

『보지도 않고 구분하는 능력은 없어서 말이야.』

사이나가 들어오며 돌려놓았으니, 확실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 말에 엘리자베스는 미간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급히 들어오느라 그랬나 보네. 하.』

그리곤 덧붙였다. 귀찮은 듯 팔을 휘저으며.

『알았어. 가 봐.』

『…뭐?』

『말귀 못 알아들어? 가 보라고.』

『…….』

‘괜히 알은체했나 보네.’ 어딘가 안 좋아 보여서 괜찮냐고 물은 거지, 사이나라고 굳이 친한 척 굴려고 한 것은 아니었다. 이젠 이렇게 말을 섞을 사이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공작부인이 되고 나서 엘리자베스는 작정이라도 한 듯이 제 계급을 뽐내며 사이나를 절대 아는 척하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이해 못 할 바는 아니라 그저 알았다고 하며 나가려던 참에 엘리자베스가 덧붙였다.

『한때 우리가 아는 사이였긴 하지만, 지금 넌 자작부인이고 난 공작부인인데, 그 태도는 뭐야?』

『…….』

『예를 갖추도록 해.』

사이나의 몸이 굳었다.

『…죄송합니다.』

『앞으로 조심하도록 하렴.』

엘리자베스의 말이 틀린 건 아니었지만, 일부러 더 굴욕을 주기 위한 것 같은 말투에 사이나도 꽤 언짢아졌다.

그래서인지 평소라면 하지 않을 말을 하고 말았다.

『공작부인께서도 조심하시는 게 좋을 것 같네요.』

『…뭐야?』

처음엔 술을 많이 마셔서 속을 비우고 있는 줄 알았는데 지금 보니 엘리자베스의 얼굴색이 멀쩡했다.

엘리자베스는 한 모금만 마셔도 얼굴이 발개지는 체질이라서 연회 같은 데서 술을 잘 마시지 않았다. 미모를 해치기 때문이다.

거기다 문득 보게 된 보울엔(남의 토사물을 보고 싶어서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의외로 토사물이 없었다.

그러니 이런 결론이 나왔다.

『그렇게 허리를 꽉 조인 드레스와 늦은 밤놀이는 이제 안 좋을 것 같아서요.』

『…무슨 소리야?』

『귀한 분의 씨를 잉태하신 모양인데, 매사에 조심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

사이나의 말에 엘리자베스의 표정이 과할 정도로 창백해졌다.

‘임신을 원하지 않았나?’

그런 생각이 들었을 정도로 말이다.

공작의 후계자를 가졌으면 입지가 더 탄탄해질 테니 반겨야 정상일 텐데?

뭔가 이상하기는 했지만 사이나의 알 바는 아니었다.

『그럼 전 이만 가 보겠습니다.』

석상처럼 굳은 엘리자베스를 두고 사이나 먼저 휴게실을 나왔다.

왠지 사이나의 등 뒤로 노려보는 것 같은 시선이 달라붙기에 좀 이상하다는 생각은 들었으나, 그녀가 주제넘게 한마디 한 게 퍽이나 기분이 나쁜 모양이라고 생각하며 그러려니 하고 말았다.

그것이 사이나와 엘리자베스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그리고 사이나가 마지막으로 참석한 연회이기도 했다.

이후의 기억은 제멋대로였다.

마구잡이로 뒤섞인 그림들이 지나가는 것 같았다.

테라스 아래. 공작.

쇠약해져 가던 몸, 각혈, 죽음.

울부짖는 유리, 세이지, 아버지.

혹시 몰라 연회 때마다 챙겨갔던 흰색의 손수건.

장례식. 의외로 조문을 하러 온 엘리자베스. 사이나 홀랜더라는 이름 앞에 꽃을 놓으며 고개를 숙여 무어라 읊조리는 입술.

유리. 청년 유리. 중년의 유리.

공작. 연초를 태우는 중년의 공작.

공작에게서 블랙 다이아몬드를 넘겨받는 중년의 유리.

무언가 연구에 매진하는 유리. 희끗한 머리카락.

마수, 마수들. 범람한 마수들을 살육하는 공작. 피, 피, 피.

암울한 하늘, 피에 젖은 땅.

국경을 넘어오는 남부연합국, 북부 야만족. 전쟁, 전쟁, 전쟁.

사이나의 초상화를 바라보고 있는 크레이머 공작.

호수, 호수 위 숨겨진 섬, 유적.

블랙 다이아몬드, 빛살, 빛기둥.

유리. 유리 드보프. 제비꽃색 눈동자.

욜리. 거대한 늑대.

“사이나… 제발… 돌아…….”

그녀를 부르는 그의 목소리.

‘……아!’

사이나의 눈이 번쩍, 떠졌다.

각성의 순간이었다.

* * *

‘-칼리고!’

동혈을 타고 들어간 콘스탄틴은 땅에 곤두박질치기 직전, 수호령의 힘을 일으켜 착지했다.

대체 얼마나 깊게 아래로 내려온 것인지.

유적지 아래는 호수라 이렇게 깊은 공간이 있을 거라고 상상도 못 했다.

‘대체 어디로 연결되는 거지?’

기이한 공간 왜곡인 건지, 정말 호수 아래에 이런 공간이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다만 의외로 물 냄새나 습기는 느껴지지 않았다.

게다가 묘하게 밝았다.

어딜 봐도 광원이 없는 깊은 동혈 같은 구조인데 주변을 구분할 수 있을 정도로 완전히 어둡지는 않았다.

‘…안쪽으로 갈수록 더 밝아지는 것 같군.’

그리고 안쪽으로 갈수록 더 인위적인 느낌이 나기 시작했다. 천연의 동굴이 아니라 사람이 다듬고 깎아낸 느낌으로 변하는 것이 보였다.

콘스탄틴은 칼리고의 기운을 뽑아 앞쪽으로 쏘아보았다.

사이나의 기운을 느낄 수 있는지, 그리고 그 주변에 뭔가 위험한 것이 있는지 미리 탐지하기 위해서다.

-으에에에에엑! 주인아… 당장 나가면 안 돼? 여기, 여기 너무…….

그런데 칼리고의 말투가 어쩐지 힘이 없었다. 힘을 쓰는데도 묘하게 공기 중 저항이 느껴졌다.

“뭐가 있나?”

-그냥 다 기분 나빠…. 힘도 없고 빨리 나가고 싶어…….

“앞에 뭐가 있는지나 말해.”

-빨리 나가자, 주인아. 응?

“네가 시키는 일을 빨리할수록 빨리 나가게 될 거다.”

-하지만 기분이 나쁜걸…….

“후.”

콘스탄틴은 짜증의 한숨을 내쉬며 모레프를 소환했다.

-싫어! 싫은데에…!

그리고 모레프에 칼리고의 힘을 덧씌워 앞으로 보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났을 때 다시 모레프를 소환했다. 모레프의 시야를 공유하는 일종의 편법이지만, 지독한 멀미 같은 어지러움의 부작용이 있어 정말 필요할 때가 아니면 잘 사용하지 않는 수법이었다.

“우욱!”

모레프가 본 기억을 흡수하자마자 지독한 두통이 같이 와서 그가 벽을 짚었다.

어지러움과 함께 물의 광경이 들어왔다.

위에서 사라진 물이 여기에 고인 건가?

앞쪽에 작은 연못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물이 은은하게 빛이 나서 사위를 밝히고 있다는 것도.

다른 이미지들도 뇌리에 지나갔다. 그리고 기억에 대한 해석이 끝나자 그는 목뒤가 싸해짐을 느꼈다.

“……여자?”

앞에 어떤 한 여자가 누워 있는 것을 보았다. 그런데 사이나가 아니었다.

콘스탄틴은 거의 넋이 나간 상태로 앞으로 달렸다.

점차 넓어지기 시작한 공간은 이내 광장 같은 형태가 되었다. 매끈하게 다듬어진 내부는 원형이었고 중앙 부분이 옴폭 파여 연못이 있었다.

연못은 묘한 모양이었다. 블랙 다이아몬드와 같은 마퀴즈 커팅의 형태.

그 안에 한 여자가 누워 있었다.

물 자체가 얕거나 아님 여자가 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대체 이 여자는 누구지?

엉덩이를 넘어 무릎까지 오는 매우 긴 은색의 머리카락이 수면 위에 둥실 떠서 얼굴의 일부를 비롯한 여자의 나신을 부분부분 가리고 있었다.

“…….”

갑자기 낯선 여자의 나신을 맞닥뜨리게 된 탓에 그는 잠시 당황했으나, 금세 정신을 차렸다.

누군지는 몰라도 죽었는지 확인 후, 그게 아니라면 깨워 사이나의 행방을 아는지 물어봐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봐. 당신……, 어…?!”

콘스탄틴은 여자가 숨을 쉬는지 확인하기 위해 코밑에 손가락을 가져가다가 깜짝 놀랐다.

막상 가까이 가서 보자 여자는…

“…사, 사이나?!”

사이나, 그녀였다.

분명 그녀의 얼굴이었다.

콘스탄틴은 깜짝 놀라 물 안으로 발을 디뎠다. 허겁지겁 여자를 안아 들어 뭍으로 데려왔다.

“사이나!”

다행히 숨은 쉬고 있다만, 대체 머리카락이 왜 이렇게 된 거지?

은발이라니? 길이는 왜 갑자기 이리 길어진 거고?

분명 그녀의 얼굴이 맞는데, 마치 다른 사람 같았다.

단순히 머리 색이 달라서만은 아니었다. 풍기는 기운이, 분위기가 완전 달랐다.

“-사이나!”

그는 다급하게 외쳤다.

품에 안고 있음에도, 마치 그녀를 잃어버린 것처럼 느껴졌다.

제발 그녀가 눈을 떠 그를 알아봐 주길 바랐다. 그는 숫제 언젠가 이런 기분을 느껴본 적이 있는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들기 시작했다.

그녀는 그를 모르고 그 홀로 안달복달하는 그런 기분.

일말의 희망도 없음을 알면서도 부질없이 소망하는 그런 기분을.

그건 데뷔탕트 볼에서 사이나를 만나 그녀를 얻기 위해 애를 쓰던 그때와는 다른 감상이었다.

더 아득히 멀고, 더 아득히 길고 긴 시간을 거쳐 소망하고 목말라했던 그런 기분.

마치 품에 안고 있으면서도 더 깊지 않지 못하고, 닿아 있으면서도 맨살로는 닿지 못하는 지금처럼.

보고 있으면서도 보는 것이 아니고, 바라면서도 헛된 바람인 줄 아는 그런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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