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화. 맹약자의 탄생
빛기둥이 솟았다.
맥페이든 제국의 북동 지역에서 치솟은 빛기둥은 북동 지역뿐만 아니라 온 제국에 그 존재감을 드러냈다.
달과 별만이 보여야 할 시간에 한쪽 하늘을 환히 빛낸 이상 현상에 황도민들은 한밤에 죄다 나와 소리치며 구경했다.
“아니, 이게 무슨 일이래?”
“그러게나 말이야!”
“무슨 징조 같은 건가?”
“할아버지한테 이런 현상에 대해 들어본 것 같은데… 뭐더라…….”
“듣고 보니 그렇구먼? 나도 들어본 적 있는 것 같아!”
“아, 혹시?”
“설마 그건가?”
사람들은 생전 처음 보는 기이한 현상을 보고 처음에는 의아해하다가, 결국 할아버지가 할아버지로부터, 할머니가 할머니로부터 전해 듣던 한 가지 현상을 기억해 냈다.
“맹약자다!”
“수호령의 계약자가 나타났다!”
“와아아!”
“대체 누굴까?”
“우리 제국은 끄떡없겠어!”
“하하하! 그러게나 말이야! 그렇지 않아도 남부 연합국이 요즘 계속 도발을 해온다던데 이 소식을 들으면 몸을 사리겠구먼!”
그 누구도 이 현상에 대해 바로 이것이다, 라고 확답해 주지 않았으나, 제국민들 역시 오랜 시간 동안 수호령의 나라에서 살아온 사람들.
조상들로부터 전해져 내려온 기본적인 정보들은 다 알고 있었다.
밤에도 사라지지 않는 빛기둥의 존재.
그것은 새로운 맹약자의 탄생을 의미하는 것임을.
* * *
황궁의 한 침전.
한 여자와 남자가 침대 위에서 엉켜 있었다.
“아아-, 아항!”
“그리 좋으냐?”
“네, 전하! 좋아요! 더…!”
수호령의 계승이라는 명목하에 낮부터 침실에 틀어박혀 색을 탐하던 황자는,
“황자 전하!”
바깥에서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듣고 인상을 팍 썼다.
“뭐야?”
“급한 소식이 있습니다.”
신경질적으로 몸을 빼낸 황자의 거친 몸짓에 엎드려 있던 여자가 쓰러졌다.
하지만 황자는 개의치 않고 문을 열며 소리쳤다.
“수호령을 계승하기 위해 밤낮없이 애쓰는 나를 감히 방해하다니, 네가 제정신이냐!?”
“저, 전하! 하나 급한-”
“수호령을 계승하는 것보다 급한 게 어디 있단 말이지?”
“매, 맹약자가 나타났습니다!”
“…뭐?”
“500년 만에 새 맹약자요!”
“……이 무슨.”
“빛기둥이 나타났습니다.”
그제야 황자는 몸을 틀어 테라스를 열고 허둥지둥 나갔다.
밤하늘 멀리 여명처럼 빛무리가 보였다. 저쪽에서야 빛기둥일 테지만, 워낙 거리가 있다 보니 여기선 한쪽 하늘을 희붐하게 밝히는 모양새로 보일 뿐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그 기이함은 남달라서, 누가 봐도 맹약자의 출현을 말해주고 있었다.
“…저쪽이면 어디지?”
황자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묻다가 대답이 없어 돌아보았다.
그의 보좌관은 문밖에서 고개를 돌린 채였다.
“이 새끼야! 내가 묻잖아!”
“예, 예? 하지만 침실인지라…….”
침대 위의 여자가 이불을 끌어 올려 몸을 가리며 글썽였다.
“전하, 제가 여기 있는데…….”
“대충 가리고 있으면 될 거 아냐! 지금 그게 중요해?! 내 질문에나 대답해. 저게 어느 쪽이지?”
“북동쪽입니다.”
“…북동쪽?”
황자는 북동쪽이라는 말에 미간을 일그러뜨렸다.
“왜 하필 또 북동쪽이야? 재수 없게.”
그러더니 금세 묘한 표정을 지었다.
“아냐, 곧 내 치세가 될 텐데, 새로운 맹약자라니. 하늘도 나를 보우하는 건지도 모르지.”
“…….”
“야, 이리 와봐.”
“예!”
“아니, 아니다. 긴히 이야기를 좀 해야겠군.”
황자는 몸을 틀어 보좌관을 데리고 침실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응접실로 들어가 목소리를 낮추며 명령했다.
“당장 맹약자가 누군지 알아봐.”
“예.”
“그리고…….”
황자는 턱을 쓸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맹약자의 성별과 나이를 알아봐. 만약 젊은 여자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황실로 불러들여.”
“하지만 맹약자라면 최소 백작위 신분으로 대접해드려야 할 텐데요.”
“작위 때문에 그런다든지, 황실에서 확인차 초대한다고 하든지, 대충 핑계를 대면 될 것 아냐! 일일이 내가 방법을 알려줘야겠어?!”
“예! 죄송합니다.”
“만약 여자가 아니면 그자의 집안에, 특히 직계 중에 젊은 여자가 있는지 알아오도록.”
“예.”
“아니, 그 여자도 같이 황궁으로 초대해.”
“알겠습니다!”
“중요한 일이다. 차질 없이 진행해.”
“북동의 주인께 도움을 요청해야 합니까?”
“아니, 비밀로 진행해. 가능하다면 중간에서 정보를 교란하도록 해. 맹약자의 정보를 내가 제일 먼저 알 수 있게.”
“예. 알겠습니다.”
보좌관이 떠나고 황자는 조금 더 생각에 잠겼다.
“맹약자가 될 정도면, 임신도 쉽지 않을까?”
사령의 힘으로는 워프 게이트를 열 수 없다. 워프 게이트를 열 수만 있었어도 당장 북동 지역으로 직접 가서 확인했을 텐데.
“하나같이 쓸모가 없단 말이야.”
길리언은 자신이 아직도 승계를 하지 못하는 이유가, 여자 쪽의 정령력이 지나치게 낮거나 가문이 하찮아서라고 생각했다.
문득 정령력 수치가 보라색에 가까운 푸른빛이 떴던 드보프 가의 영애가 생각나 그는 이를 뿌득 갈았다.
“그간 측정한 여자들 중 최고치였는데…….”
하룻밤만 진하게 품었어도 당장에 제 애를 배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떠나질 않았다. 이유 없는 확신임에도 그는 그렇게 망상에 사로잡혔다.
그렇다 보니 제 여자를 크레이머 공작에게 뺏긴 것 같아 매우 기분이 나빴다.
“내가 황제만 되면…….”
그는 잊지 않았다.
감히 크레이머 공작이 제게 무슨 짓을 했었는지.
감히 사이나 드보프가 자신을 거부한 것도.
“제국의 황제가 될 몸인데 마음대로 여자를 골라 결혼할 수도 없다니, 황실의 권위가 더 이상 이래서는 안 되지, 안 되고 말고.”
가장 고귀한 가문의 영애와 결혼해도 모자랄 신분인데, 왜 어디 지방의 이름도 못 들어본 가문의 영애 따위를 부인으로 맞아야 한단 말인가.
그가 생각하기에 이는 정말 말도 안 되는 데다 불공평하기 짝이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이 황제가 되면 중앙귀족이나 공후작가의 영애라도 모두 정령력을 검사받고 헤베타 후보로 들일 수 있게 법을 바꾸고 말겠다고 결심했다.
“그래도 당장은 그 맹약자가 한미한 가문이었으면 좋겠군.”
그래야 입맛대로 써먹기 좋을 테니.
황자는 보좌관이 하루빨리 결과물을 들고 오길 바라며 생각에 잠겼다.
침실에 두고 온 여자는 이미 잊은 지 오래였다.
* * *
사료에서 본 것처럼.
구전으로 들었던 것처럼.
새로운 맹약자의 탄생을 알리는 빛기둥은 하루 밤낮을 꼬박 존재했다.
광대한 제국은 새로 나타난 맹약자의 정체를 누구보다도 빨리 알아내기 위해 갖은 인맥을 다 동원하는 중이었다.
500년 만에 새로 등장한 맹약자의 존재에 온 제국이 들썩이는 동안, 막상 그 빛기둥의 근처는 온통 침묵에 싸여 절망스러운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사이나!”
한 남자가 바닥에 무릎을 찧으며 쓰러져 몸을 숙였다.
“제발… 사이나…….”
멀리서 보았을 때 이 빛기둥은 장엄하거나, 멋지거나, 부러움의 대상일지 모르겠다.
하지만 당장 콘스탄틴에게는 세상에 없는 방해물이었다.
샘 주변의 전방을 가득 채운 빛살은 그 존재를 밝히는 동안 그 누구도 가까이 접근할 수 없도록 했다.
멀리 외곽에서 그는 사이나의 생사나 상태를 전혀 확인하지 못한 채, 들끓는 속을 다스릴 수 없어 미치기 일보 직전이었다.
왜냐면, 확신할 수가 없으니까.
얼핏 이 빛기둥은 맹약자의 탄생을 알리는 지표 같아 보였지만, 콘스탄틴은 앞뒤 상황을 알고 있는 사람이다.
그냥 유적을 열려고 노력하던 상태에서 사이나가 샘 속으로 빨려 들어간 뒤 빛기둥이 솟구쳤는데, 이를 어찌 맹약자의 탄생이라고 보겠느냔 말이다.
유적지를 여는 것만으로 맹약자가 된 경우는 없었다. 어떤 기록이나 비망록에서도 본 적 없는 사례다.
만약 이 빛기둥이 그저 유적이 열린 것을 알리는 한 현상에 불과하다면……?
생각하고 싶지 않은 이런 가정에 미쳐버릴 것 같았다.
‘…제발, 사이나! 살아만 있어 준다면…….’
아니야. 괜찮을 거야. 괜찮을 거야. 그렇지…?
“사라지라고!”
쓸데없는 짓임을 알면서도 콘스탄틴은 칼리고의 힘을 일으켜 빛기둥 안쪽으로 파고들기 위해 별짓을 다 해보았다.
근처에도 못 가고 내동댕이쳐지기 일쑤였지만.
‘그녀만 두고 오는 게 아니었는데!’
칼리고의 상태가 어떻게 되든 온천을 나가는 게 아니었다.
아니, 이 근처를 떠나는 게 아니었다.
하지만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는 법.
“…안 돼. 이런 식으로…….”
부릅뜬 눈으로 계속 보기에는 눈을 망가뜨릴 정도로 빛살이 강했으나, 콘스탄틴은 죽어라 그것을 쏘아보았다.
지나치게 강한 빛으로 자극된 눈에 핏발이 서고 눈물이 맺혀 흘렀으나, 그럼에도 그는 눈을 감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신기루처럼 사라져버릴 것 같아, 눈을 뗄 수 없었다.
어쨌든 지금은 저 기둥만이 어떤 존재의 증거 같아서…….
파아앗-!
그런데 어느 순간, 빛기둥이 순식간에 사그라졌다.
마치 바닥이 빛살을 흡수하는 것처럼 기둥이 가라앉더니 표면으로 이내 스며들었다.
그리고 그 자리엔, 깊디깊은 아래로 연결된 동공만이 남아 그 존재를 드러내며 알렸다.
본래 있던 샘의 흔적은 조금도 남아있지 않았다. 전에 본 적이 없다면 이 자리에 온천이 있었다는 것을 전혀 알 수 없을 정도로, 일말의 물기조차 남아있지 않은 모습이었다.
“…제발!”
동공 너머는 들어오는 자의 생명을 담보로 해야 할 것처럼 어둡고 깊어 보였으나, 콘스탄틴은 바로 몸을 날렸다.
깊이 생각할 것도 없었다. 사이나가 사라진 곳이니.
마치 땅속으로 삼켜지듯, 순식간의 그의 모습이 사라졌다.
* * *
한편, 사이나는 오래된 기억을 보고 있었다.
정확히는 관람 중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맞을지도 모르겠다.
여느 때와 비슷하게, 가고 싶지 않았지만 억지로 참석했었던 한 연회장.
억지로 웃으며 이런저런 무리를 기웃거리는 것은 역시나 못 할 짓이었다.
버틸 만큼 버틴 사이나는 술잔을 챙겨 휴게실로 향했다.
이때 즈음 사이나는 술맛을 알아 꽤나 술에 의존하던 때였다. 삶에 낙이라고는 없으니, 홀짝홀짝 마시던 술이 그나마 그녀의 시간을 흘려보내고 지탱해 주던 그런 시절이었다.
일부러 가장 외진 휴게실로 찾아 들어갔으나, 선객이 있었다.
『우욱! 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