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화. 엄청난 단서
사이나는 다시 일상을 살았다.
딱히 어떤 해답을 찾아내지는 못했으나, 조급하게 군다고 답이 나오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 할 수 있는 것부터 하는 것이 최선이다.
‘여기도 이제 완연한 봄이네.’
아침에 일어나 잠시 테라스 밖을 바라보는데 그런 생각이 들었다.
델본에 비하면 봄이 늦게 찾아오는 크림성이지만, 여기도 이젠 녹음이 한창이었다.
그런 그녀의 귓가에 탕탕,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어?”
욜리인가?
사이나는 서둘러 연결문을 열었다.
역시나 욜리가 터덜터덜 걸어 사이나의 방으로 들어왔다.
“잘 다녀왔어?”
“컁.”
“공작님은 잘 주무셨고?”
욜리도 콘스탄틴을 재울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이후, 사이나는 욜리에게 그를 재워달라고 부탁했다.
물론 욜리는 질색했으나, 결국 승낙을 하기는 했다. 매일은 질색을 해서 차마 권할 수 없었고, 사나흘에 한 번씩 가는 것으로.
그게 어젯밤이었고, 아침이 되자 욜리가 돌아온 것이다.
“캭.”
그런데 어쩐지 욜리의 기분이 매우 좋지 않아 보였다.
평소에도 콘스탄틴에게 다녀오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는 않았으나, 오늘은 유독 더했다. 좋아하지 않아 보이다 못해 불쾌감이 충만한 표정이었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었어?”
“캬앙! 컁! 케욱!”
곰발로 제 얼굴을 마구 비비다가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것이 어째 생각하기도 싫다는 느낌이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는 모르지만 그냥 둘 수는 없어 사이나는 욜리를 안으며 볼을 비볐다.
“뭔지 몰라도 잘했어. 수고했어.”
그리고 그냥 칭찬했다. 조금이라도 기분이 나아지도록.
“큐….”
욜리는 무성의하게 사이나의 칭찬을 받아 끄덕이고는 침대로 올라갔다. 다시 잘 모양이다.
‘꼭 돌아와서 다시 잔단 말이지?’
이유는 모르겠으나 콘스탄틴의 방에 다녀오면 욜리는 꼭 이렇게 잠을 따로 더 자고는 했다.
‘혹시 잠은 안 자고 정말 옆에 있다가만 오는 건가?’
들여다본 적이 없으니 알 수가 없다.
“알았어. 자고 있어. 난 일 좀 하다가 올게.”
“컁.”
크하암, 하품을 한 욜리가 이내 동그랗게 몸을 말고는 잠에 빠져들었다.
사이나는 하녀를 불러 씻고 실내 드레스로 갈아입은 뒤 집무실로 향했다.
* * *
근래 번역 작업이 엄청난 진도를 보이고 있었다.
머리가 비면 자꾸 잡생각이 찾아와 몰입할 것이 필요해서 전보다 더 집중을 하기는 했지만, 그것을 감안해도 엄청난 결과물이 쏟아지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점점 더 집무실에서 침실로 복귀하는 시간이 길어지고 있었다.
“마님.”
“응.”
그래서인지 얼마 전부터 욜리 아니면 다리엘이 이렇게 그녀를 데리러 오기 시작했다.
“마님?”
“응.”
의식이 없는 반사적인 대답이라는 것을 깨달은 다리엘이 근처까지 다가와 책상을 짚으며 목소리를 높였다.
“아휴…. 마님!”
“어, 어?”
“쉬셔야죠. 언제까지 여기 있으시려고 그러세요.”
“음? 몇 신데?”
체감상으로는 기껏해야 몇 시간 있었던 거 같은데…….
“열한 시가 넘었어요.”
“뭐?”
언제 이렇게나 되었담.
“목욕물 받아놨어요. 하녀들도 대기 중이고요. 씻고 쉬세요.”
“알았어.”
사이나는 굳은 어깨를 돌리고 기지개를 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말 집중력이 대단하세요. 저는 책상 앞에 한 시간만 앉아 있어도 좀이 쑤시던데.”
“다리엘도 업무량이 상당한 걸로 알고 있는데?”
“전 현장 일이 더 많아요. 서류 쪽은 보좌관이 따로 있어서 결재만 하는 편이고요.”
“아, 그래?”
보좌관은 좀 부럽네.
하지만 황도와 크레이머령을 오가야 하는 사이나는 그 특성상, 보좌관을 구하기도 어중간한 상황이다.
지금은 적응기니 우선 두고 보는 중이기도 했다. 나중에 어떤 패턴이 나오면 보좌관을 두든지 해야 할 것 같다.
다리엘은 하녀들에게 사이나의 목욕 시중에 관련해 이것저것 지시하더니 인사를 남기고 퇴근했다.
사이나는 몸을 맡긴 채 나른하게 있었다. 목욕탕에서 가만히 시중을 받으며 있자니 머릿속에 아까까지 하던 작업의 내용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요즘 사이나는 벨류아 고서점에서 산 책에서 아주 흥미로운 부분을 발견해 해석 중이었다.
[아를어는 문어체에만 쓰이는 문법 방식? 구조? -가 존재한다?]
‘여기까지 해석했었지.’ 꽤 말이 되는 것 같단 말이야? 거의 근접하게 해석한 것 같아.
그리고 그 뒤에 나온 단어들이 뭐였더라…….
‘내용, 남기다, 알리다, 부정형, 쉽다, 중요한. 그리고 ■■와 □□.’
내용을 남겼다. 알리기 쉽지 않은? 알리기 싫은? 중요한 ■■ 아니면 □□?
‘■■와 □□가 대체 뭘까.’
느낌상 이게 가장 큰 핵심 문자인 것 같은데, 도무지 감이 안 온다.
아를어에 특이한 문법 구조가 있다는 내용이었으니까, ■■ 문법? □□ 문자?
‘이게 맞는 해석이라고 치고…….’
사이나는 눈앞에 보이는 사물을 ■■나 □□에 마구잡이로 넣어 말을 만들어 보기 시작했다.
‘물 구조, 향유 구조, 손 문자, 발 문법, 욕실 문자, 여자 문법…….’
말이 되는 건 없었지만 어차피 모르는 일이니 중얼중얼 계속 반복했다.
그동안 사이나는 다 씻기고 잠옷까지 입혀졌다.
머리를 말리겠다고 화장대 앞에 앉혀지자 자연스럽게 전면 거울에 시선이 갔다.
‘거울.’
거울 문자. 거울… 문자?
쉽사리 알려주기 싫은 중요 내용을 ■■ 문자나 거울 문자로 많이 남겼다…?
‘음? 잠깐만, 이거…….’
거울 문자? 혹시 미러링 레터를 말하는 건가? 좌우 변환?
“허어억!”
사이나는 너무 놀라 벌떡 일어났다.
“…마, 마님?”
“머리카락이 당겨졌나요? 죄송해요!”
하녀들이 놀라 사과를 해댔지만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방금 발견한 엄청난 단서에 소름이 끼칠 정도로 전율이 흘러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확인, 확인을 해야 해!”
“네?”
“뭐, 뭐를요?”
이런 실마리를 잠을 자느라 넘겨버릴 수는 없었다. 당장 작업을 재개해야 했다.
“아니야. 갑자기 뭐가 생각나서 그래. 머리는 이 정도면 됐으니 그만 가보렴.”
“하지만 아직 머리가 덜 말랐는데요.”
“아냐. 충분하니 그만 가봐.”
사이나는 거의 축객령 수준으로 하녀들을 내보낸 뒤 가운 하나만 걸치고 바로 다시 집무실로 향했다.
허겁지겁 마지막 번역지를 살폈다.
“아를어, 특히 문어체에는… 특이한 문법 체계? 구조? 있다.”
맞아. 말이 돼.
“수수께끼? 당시 사람들이 좋아했다. 그래서 이런 구조가…….”
아를-프로메사 시절의 사람들은 수수께끼를 좋아했다고?
“서적이나 편지…. 숨겨져… 진짜 하고 싶은 말을 숨기는……?”
그러니까 거울 문자나 ■■ 문자를 이용해 정답이나 진짜 글의 의도를 이중으로 적었다는 뜻인 거지?
“와, 이게 사실이라면 여태 어느 구간들이 죽어도 해석이 안 되는 이유가 있었네.”
접근 자체가 완전히 틀렸으니, 해석이 될 리가 없지 않은가.
사이나는 밖으로 나가 적당한 크기의 거울을 하나 챙겨왔다.
그리고 고서적에서 유독 해석이 되지 않던 구문을 옮겨 적은 종이를 챙겨 들고 거울에 비친 글자들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와, 와, 와아…! 이, 읽히잖아?”
아를어는 문자 하나하나가 약간 직인 같은 형태를 가진 문자였다. 그래서 글자 자체가 문양처럼 보였고, 글자 하나로 이미 많은 뜻을 내포하기도 했다.
그렇다고 그 형태가 좌우가 뒤집혀도 말이 되는 구조라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다.
“세상에. 세상에.”
감탄에 감탄을 반복하며 사이나는 미친 듯이 손을 놀렸다.
엄청난 몰입에 빠져들며 책장이 넘어갔다.
어느새 훌쩍 몇 시간이 흐르는 것도 모를 정도로 말이다.
“고대인들은 사랑했다…. 완벽한 형태…. 뒤집어도. 일그러지지 않는…….”
아, 그래서 아를어가 직인 같은 형태인 건가?
아를어 문자는 대다수가 정방형이고 장방형과 원형 등이 섞인 형태였다. 그러니 미러링 레터가 가능하고, 글자 자체를 뒤집어도 대칭을 이루는…….
‘대칭? 잠깐…. ■■가 아무래도 대칭으로 해석할 수 있을 거 같은데?’
대칭 구조? 대칭 문자?
대칭 문자와 거울 문자?
‘블랙 다이아몬드도 그러고 보니 완벽한 대칭 구조의 형태지……. 그리고 콘스탄틴의 등에도 가장 커다란 문양은 대칭의 형태를 이루…….’
“어!”
등에 가장 큰 틀! 그거 마퀴즈 형태 아닌가? 다이아몬드 형태랑 똑같아!
불현듯 찾아온 깨달음이었다.
* * *
또 나흘째 제대로 잠들지 못한 콘스탄틴의 눈 밑이 거멓게 죽어 있었다.
“큐후.”
사이나의 짐승 녀석이 한숨을 쉬는 것 같은 낯으로 찾아온 것을 보니 오늘은 잘 수 있으려나 보다.
-아니, 이 짐승 새끼, 또 왔네!
하지만 어째서인지 딱히 달갑지만은 않다.
사이나 말고도 그를 고요함의 영역에서 잠들 수 있게 하는 존재가 있음에 고마워해야 맞는 걸 텐데, 어째서인지 콘스탄틴은 이 짐승의 존재가 묘하게 거슬렸다.
하나 이런 감상은 자신만의 것은 아니었다.
콘스탄틴의 떨떠름한 표정만큼이나 저 녀석도 매우 못마땅한 표정이었으니.
-저, 저 건방진 표정을 좀 봐! 불쾌한 냄새나 잔뜩 풍기는 것이! 당장 나가라아!
욜리 녀석은 한숨을 크게 쉬는 것 같은 표정을 하더니 침대 위로 올라왔다.
탁탁, 꼬리로 침대 위를 치는 꼴이 얼른 누워 잠이나 자라는 듯하다.
“…….”
-주인아!! 이 꼴을 보면서도 참고 있냐! 다앙자앙 내쫓자아!
하지만 어쩌랴. 사이나가 신경 써서 욜리를 보내주는 것 같은데. 내 감상이 뭐가 중요하겠는가.
‘그래, 잠이나 자자.’
수면 상태가 확실히 한계에 이르기도 했고…….
이 짐승은 콘스탄틴의 한계를 어찌 그리 잘 아는지, 그가 극점에 다다른 날에야 찾아오고는 했다.
때로는 사흘만, 때로는 나흘 만에, 그때그때 다르게 말이다.
-주인아! 너는 저 짐승 새끼 별로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어째서 이러냐!
그래도 네가 밤새 떠드는 것보다는 나아. 이 새키야….
그런데.
-에헤헤. 내가 오늘은 조용히 있을게. 그러니 얼른 내쫓아버리자, 응? 주인아?
칼리고가 딜을 청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