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7화. 진실의 시간
긴장감 어린 근육들이 팽팽하게 곤두섰다. 사형선고처럼 내뱉어질 고백들을 앞두고 식은땀이 배어 나왔다.
단두대에 목을 집어넣고 대기하고 있는 것 같은 심경이 들었으나, 그는 마른침을 삼키며 마음을 다잡았다.
“할 말이요?”
“예….”
할 수 있다면 끝까지 숨기고 싶었다.
그는, 그녀에게 해악을 끼칠 수 있는 사람이 절대 되고 싶지 않았다. 해악은커녕 약간의 서운함도 주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현실은 어떠한가.
‘내 안위를 위해 그녀의 생명력을 갈취하고, 수명을 갉아먹고, 죽일 수 있는 존재지.’
한마디로 기생충이나 다름없었다.
‘아마도…….’
그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이 곧 변할 것이다.
꺼림칙해하는 정도면 양반일 것이다. 심할 경우 경멸과 비난, 증오를 받을지도 모른다.
그건 상상만으로도 그의 피를 식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녀가 죽는다는 것을 가정하면, 그게 더 끔찍했다.
그러니 별수 없었다.
이 망할 몸은 도무지 그녀를 밀어낼 수 없으니… 그녀가 자신을 피할 수 있게 알려 주어야만 하는 것이다.
‘결국…….’
칼리고의 비밀을 숨긴 채, 그녀를 지킬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그녀에게 약간도 닿지 않으면서 그녀와 사이좋게 지낼 수 있는 방법도 없었다.
그녀에게 미움 받지 않는 방법 역시.
그녀의 애정과 그녀의 생명.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을 수는 없다는 것을 이제는 인정해야만 하는 것이다.
“내가, 그대와 닿아서는 안 되는 그 이유를.”
“…….”
“알고 싶어 하지 않았습니까.”
진실의 시간이, 도래했다.
* * *
콘스탄틴은 가장 떠올리고 싶지 않은 시절의 기억으로 발을 밀어 넣었다.
차차 그의 입에서 새어 나오는 과거의 편린들은 당시의 고통을 불러오며 그를 고통스럽게 했으나, 그는 무심한 톤을 유지하는 데에 성공했다.
“날 낳은 선대 공작부인. 그녀는 나를 절대로 안아주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어린 나는 그 이유를 몰랐지요.”
유독 칼리고를 끔찍하게 여겼던 콘스탄틴의 아비, 선대 공작은 얼른 후계자를 낳아 수호령을 승계시켜 버리는 것이 인생의 목표이다시피 했다.
그래서 그는 가문 대대로 내려오는 금기조차 어겼다.
열다섯 이전에 승계 작업을 해서는 안 된다는 금기를 어기고 콘스탄틴이 고작 여덟 살밖에 되지 않았을 때부터 승계를 시작한 것이다.
본래라면 열다섯부터 성인이 되기 직전인 열아홉까지, 5년에 걸쳐 받는 승계 작업을 선대 공작은 여덟 살부터 시작했으나 그 과정은 5년 만에 끝나지 않았다.
콘스탄틴이 너무 어려서 그 과정을 다 체화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는… 고통에 몸부림치다 울고, 쓰러졌고, 미친놈처럼 비명을 지르며 괴로워했다.
대대로 그런 금기가 있는 이유를 선대 공작이 무시한 탓에 열다섯부터 했으면 5년 만에 끝날 일을 9년에 걸쳐 완성했다.
콘스탄틴의 입장에서는 고통만 배로 느끼고 피폐한 인간이 되고만 것이다.
‘아니, 선대 공작 입장에서는 그래도 승계 과정을 3년이나 당겨서 그만큼 빨리 자유로워졌으니 성공한 셈인가.’
콘스탄틴의 유년기가 고통과 눈물로 점철되어 사라지든지 말든지, 어차피 그의 아비라는 작자는 애당초 그에게 맹약의 승계 외에는 다른 것을 바란 적이 없으니.
그런 주제에 또 수호령을 모두 승계시키고 힘이 사라진 자신의 무력한 모습을 견디지 못하고 만용을 일삼다가 일찌감치 죽어버렸다.
“…유모가 없었다면, 난 어떤 사람이 되었을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 환경 속에서 콘스탄틴이 그나마 인간미 비슷한 것이라도 가지고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오롯하게 유모의 덕이었다.
선대 공작은 그를 ‘자신의 굴레를 물려줄 자’ 이상으로 취급한 적이 없으며, 선대 공작부인은 그를 일종의 병균 취급이나 하며 소름 끼쳐 했으니.
물론… 그의 친어머니가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엄청나게 살갑지는 않아도 자신의 배로 낳은 자식이라 적당히 들여다보고 적당히 손길을 주기는 했었다.
그가 승계 작업을 시작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하지만 승계 작업을 시작하며 콘스탄틴의 피부에 한기가 돌기 시작하자, 문양을 새기는 고통과 칼리고의 상념이 머릿속을 파고들며 생긴 정신적 불안정함 때문에 하루가 멀다 하고 울며 징징대기 시작하자, 그녀의 태도는 금세 변했다.
특히 제 아들을 안았을 때 느껴지는 소름 끼치는 한기에 화들짝 놀라 그를 밀쳐낸 것이 기억하기로도 여러 번, 그러다 공작에게서 무슨 말인가를 들은 것인지 어느 시점부터는 그를 안아주기는커녕 괴물 보듯 취급하기 시작했다.
고작해야 열 살도 안 된 나이에 친어미에게 받기 시작한 배척은 그를 완전히 무너뜨렸다.
아마 유모가 없었더라면, 그리고 조금만 그의 몸이 덜 튼튼했더라면, 그는 지금 이 세상에 없을지도 몰랐다.
“내 유모는…….”
유모는 당시 울던 꼬마를 품에 안아 달래 주던 유일한 사람이었다.
“절대로 날 안아주지 않았던 선대 공작부인 대신 매일 나를 안아 주었던 사람입니다.”
친부모조차 조금만 가까이 다가오면 벌레처럼 내치는 것에 상처받아 울던 작은 남자아이를 품에 안아 어르며 괜찮다고 말해주던 유일한 사람이었다.
사람의 체온이 주는 안온함이 무엇인지 알려주던 단 하나의 사람이었다.
그 품은 따뜻했고, 그 아이가 유일하게 안길 수 있는 품이었으며, 세상에 둘도 없는 온기이자 애정이었다.
그렇다고 유모가 그에게서 한기를 느끼지 않았느냐 하면 또 그것은 아니었다.
“어린 나는 몰랐습니다. 부족한 부모의 사랑만큼 더 유모에게 매달렸고, 어느 순간부터 그녀는 매우 추위를 타기 시작했습니다.”
그녀는 분명 한기를 느꼈다. 그러나 내색하지 않았다.
어린 콘스탄틴이 울며 안겨 올 때마다 거리낌 없이 그 품을 내주었다.
“벽난로에 아무리 불을 피워도, 화로를 수십 개 가져다 놓아도, 탕파를 침대 가득 채워놓아도… 그녀는 추워했습니다.”
그가 그 시절 받은 온기가 그녀의 수명과 맞바꾼 것이라는 것을 미리 알았더라면, 과연 어린 날의 그는 유모의 품에 안기지 않을 수 있었을까.
장담할 수 없을 것 같다.
“그녀는… 나 때문에, 나를 사랑해 준 탓에 죽어가는 겁니다.”
기껏해야 열 살 남짓. 어렸던 그에게 유모는 그가 가진 사람의 유일한 온기이자 애정이었으므로.
“유모가 아픈 건, 내 탓입니다. 내가 아니었다면 아직도 그녀는 건강할 테니.”
천천히 그는… 그녀에게 털어놓았다.
마지막 비밀을.
죽어도 그녀에게 말하고 싶지 않았던 칼리고의 이야기를.
“그니까…, 그 모든 게 수호령 때문이라는 거죠? 칼리고?”
“내 등의 문양은… 칼리고를 제어하기 위한 것이고, 칼리고는 어둠의 속성을 힘으로 삼고 있지요. 그 탓에 녀석을 가둔 피부 위로 치명적인 한기가 흐릅니다.”
“…….”
“그리고 이 한기는… 나뿐만 아니라 타인에게도 영향을 미칩니다.”
추위와 한기가 심해지면 건강을 해치고 결국 수명을 갉아먹게 되지요.
그가 고저 없는 톤으로 중얼거리듯 덧붙였다.
“그러니 그대는 날… 멀리해야 하는 것이 맞는 겁니다.”
콘스탄틴은 저도 모르게 까맣게 잠식되기 시작한 시야 때문에 몇 번 눈을 껌뻑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젠, 정말 다… 끝이다.
어떤 다른 기대도, 다른 목표도 없었다.
그는 그저 입 안쪽을 씹어 물며 허공으로 초점을 맞췄다.
“그걸 이제 아신 거예요?”
“…….”
“원래부터 알았다면, 어째서 저와 결혼하신 거죠?”
예상했던 질문인데도 그녀가 이렇게 묻자 그는 심장이 덜컥거렸다.
그의 귀엔 어찌 알고 있었으면서 그랬을 수가 있느냐는 비난으로 들렸으므로.
“…미안합니다. 변명 같겠지만…….”
그는 살짝 떨려오는 손을 숨기기 위해 양손을 포개어 굳게 잡았다.
“그댄,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왜요?”
“다른 사람과 달리 내게서 한기를 느끼는 것 같지도 않고.”
“그건, 맞아요.”
“그래요. 그래서 나도 외면했던 것 같습니다. 그대는 괜찮을 거라고……. 애써 그렇게 생각하며 매달렸습니다. 게다가 그대에게 수호의 기운이 있어서 더 그랬지요.”
“…수호의 기운이요?”
콘스탄틴은 그녀와의 첫 만남에서부터 느꼈던 기운들과, 맹약자끼리는 정체를 숨길 수 없다는 것을 그녀에게 설명했다.
“…정말요? 저에게?”
그런데 그녀는 자신에게 그런 기운이 있다는 것도 몰랐던 듯했다.
아주, 매우 어리둥절한 얼굴이었다.
하긴 그로서도 기운을 느꼈을 뿐, 수호령도 없는 그녀가 어떻게 수호령의 힘을 지니고 있는 것인지 알아내지 못했으니…….
하지만 사이나의 표정은 이내 꽤 심각해졌다.
무슨 생각을 하기에 저런 표정일까? 뭔가 실마리를 찾은 것일까?
“그건 그렇고…….”
그녀의 보라색 눈동자가 다시 자신에게 향했다.
“그럼 왜 다시 제게 닿으면 안 된다고 생각이 바뀌신 건데요?”
“…욜리 때문입니다.”
“욜리가 왜요?”
“욜리와 그대에게서 풍기는 수호의 기운이 같습니다.”
“…네에?”
또 한 번 놀란 얼굴.
콘스탄틴은 욜리가 유모의 병에 감응하여 잠에 들게 된 것 같다고 설명했다.
“그러니 그대도 안전하리라는 법이 없습니다.”
“…….”
그녀의 안색이 약간 창백해졌다.
드디어 깨달은 모양이다. 그간 그녀가 얼마나 위험천만한 행동을 해온 것인지 말이다.
그리고 이제는 그를 꺼리게 되겠지?
일부러 이런 상황을 만들었음에도, 절대 쉽지 않았다.
뻐근해져 오는 심장의 느낌에 콘스탄틴은 가슴을 부여잡고 싶다는 충동이 들었으나, 가까스로 참아냈다.
대신 그는 이를 악물었다. 본래 물고 있던 안쪽 살이 짓이겨지며 핏물이 번졌지만 차라리 그 통증이 나았다.
비릿한 피 맛이 그의 입장을 실시간으로 상기시켰으므로.
콘스탄틴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이나의 체향과 비슷한 향기가 밴 공작부인의 방. 그녀와 함께 잠들어 같이 아침을 맞았던 침대.
이 모든 것들이 다시는 볼 수 없고 찾아들 수 없는 장소처럼 느껴졌다.
너무 자세히 보지 않기 위해 그는 시야를 흐리며 몸을 틀었다.
비척대며 걷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스스로 내린 결정이건만,
그럼에도,
그녀의 방을 나서는 이 발걸음이,
영원히 봄이 없는 세계로 떠나는 것처럼 느껴졌다.
추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