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화. 문을 두드릴 용기
“그럼 저 짐승은 왜 가능합니까?”
“그러게요…?”
그러고 보니 좀 이상하긴 하다.
“사람이 아닌 것은 그냥 드나들 수 있는 건 아니겠죠? 그럼 맹수도 출몰 가능한 거 아닙니까?”
“욜리 외에 다른 어떤 짐승의 흔적도 본 적 없어서요.”
“‘아직’ 본 적이 없는 거면 어쩝니까?”
“그랬으면 욜리가 알겠죠.”
“…예?”
“그렇지, 욜리?”
“컁!”
“거봐요.”
“…….”
어쩐지 미친 사람이나 할 법한 소리 같기는 하지만, 욜리의 비범함은 이제 루퍼트도 인정하는 바다.
마냥 헛소리로 치부하기엔 그간 욜리가 보여준 행동들이 범상치 않았다.
“여태 별일 없었잖아요.”
“그렇긴 한데……. 두 눈으로 볼 수도 없이 멀리서 대기를 하다 보면 아무래도 자꾸 불안해져서 말입니다.”
“욜리도 이젠 꽤 커져서 어지간한 경우엔 절 지켜줄 수 있어요.”
“컁!”
그렇다는 듯 욜리가 외쳤다.
“…예. 얼른 다녀오십시오. 정해진 시간 넘기지 마시고요.”
호수 바깥에서 기다리는 루퍼트를 생각해 머무를 시간을 정해두고 출입하기 시작했다.
보통 정해진 시간의 반은 유적지를 탐험했고, 나머지는 온천을 즐겼다.
탁 트인 야외에서 오롯이 혼자 노천탕에 몸을 담그고 하늘을 올려다보는 것은 묘한 중독성이 있었다.
세상에 홀로 남겨진 것 같기도 하면서,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은 기분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유는 모르지만 우울함과 음습함이 가시고 힘이 차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냥 어지간해서는 할 수 없는 일이라 기분이 남다른 것인지도 모르지만.
이날도 온천에서 몸을 담그고 있자.
“컁!”
욜리가 와서 때를 알리듯 짖었다.
녀석은 어디론가 빨빨거리고 다니다가 시간이 되면 와서 이리 짖어주고는 했다.
“…어, 갈 시간이야?”
“컁!”
“응, 알았어.”
사이나는 샘에서 나와 젖은 가운을 추슬렀다. 아까 호수를 건너느라 젖은 옷을 다시 입었다.
젖은 옷을 다시 입는 것은 기분도 별로고 입기도 쉽지 않았지만 별수 없었다. 마른 옷은 건너가서 갈아입을 예정이라 말안장에 매여 있었기 때문이다.
방수가 되는 가방에 젖으면 안 되는 것들을 잘 넣고, 젖은 것들은 또 따로 담았다.
그리고 사이나는 섬을 벗어났다.
호수를 헤엄치는 동안 기슭에서 왔다 갔다 하고 있다가 사이나를 발견하고는 반색을 하는 루퍼트가 보였다.
“곧 비가 올 것 같습니다. 서두르시죠.”
섬 안에서 올려다볼 때만 해도 맑디맑던 하늘이 어째 매우 흐렸다.
“그러네요. 알았어요.”
루퍼트는 언제나처럼 나무에 매어둔 말 두 마리 사이에 큰 천을 둘러 임시 탈의실을 만들어 둔 상태였다.
루퍼트는 사이나가 그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는 멀찍이 떨어져 뒤돌아섰다.
서둘러 젖은 옷을 벗고 마른 수건으로 닦아낸 다음 준비해 온 새 승마복을 입었다.
다시 크림성으로 돌아갈 준비가 끝났다.
“루퍼트 경! 다 됐어요.”
벗은 옷들을 잘 담아 안장에 묶으며 사이나가 외쳤다.
루퍼트가 다가와 탈의실용으로 쳐둔 커다란 천을 수거한 뒤, 나무에서 말을 풀어냈다.
“사이나 님. 머리카락이…….”
“아, 머리끈이 갑자기 끊어지는 바람에 그래요.”
보통은 머리가 젖지 않도록 미리 올림머리를 하고 다녔는데, 오늘은 호수를 건너는 동안 끈이 끊어져 머리카락이 잔뜩 젖고 말았다.
여분의 끈도 없어 대충 물기만 닦아낸 참이다.
가는 동안 바람을 타고 적당히 마르지 않을까?
“그 상태로 말을 타셨다가 감기라도 드시면 어쩌려고요.”
“그 정도로 허약하지는 않아요.”
“그런 분이 일 년이나 누워 계셨습니까?”
“…….”
감기로 누워 일 년간 혼수상태였던 몹쓸 과거가 다시 튀어나왔다.
“아무튼, 이젠 안 그래요.”
“안 됩니다. 머리 말리고 가시죠.”
“꾸물거리다 비 맞는 게 더 위험할걸요?”
사이나는 후다닥 말에 올라타 버렸다.
“하, 일리 있군요. 대신…….”
루퍼트는 이것만은 양보 못 하겠다는 듯, 제 망토를 끌러 사이나에게 둘러주었다.
“날이 흐려지며 바람이 차졌습니다. 단단히 두르십시오.”
“알았어요.”
사이나는 루퍼트의 망토를 둘둘 싸매고는 발을 찼다.
어느새 꽤나 능숙해진 승마에 그녀는 거침없이 크림성 방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열심히 속력을 냈다 한들 금세 욜리와 루퍼트에게 따라잡히고 말기는 했지만.
* * *
사이나와 일행이 복귀하는 동안 비는 내리지 않았다.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그녀는 북문을 통과했다. 그리고 말을 넣기 위해 마구간으로 향했다.
“어, 토벌단이 돌아온 모양인데요?”
루퍼트가 주변을 둘러보더니 말했다.
“네?”
“비었던 마구간들이 가득 찼네요. 안 보이던 기사들도 보이고요.”
그럼 콘스탄틴도 왔겠네?
“각하께 인사하러 가실 거지요?”
“네. 그래야겠죠?”
사이나는 마구간 앞에서 말을 세우고는 서둘러 하마(下馬)했다.
그런데 평상시와 달리 루퍼트가 둘러주었던 망토를 생각 못 했다. 망토가 루퍼트의 덩치만큼이나 엄청 커다래서 그 자락이 얽혀 꼬이고 말았다.
“으앗!”
등자에 발이 끼인 채 몸이 기우는 바람에 자칫 크게 낙마하기 직전.
“아가씨!”
반사적으로 또 아가씨를 외치며 루퍼트가 급히 몸을 날려 그녀를 받아냈다.
와, 큰일 날 뻔했다.
덜컥거리며 울린 심장박동을 느끼며 사이나가 몸의 중심을 잡았다.
“아, 고마……”
“큰일 날… 아가씨?”
“…….”
사이나는 말을 하다말고, 그리고 자신이 말을 하다 말았다는 것 자체도 인지하지 못한 채로, 시선이 붙잡혔다.
콘스탄틴이 약간 떨어진 곳에 있었다.
수호령의 힘을 꺼냈다가 다시 회수하던 참인지 검은 기운이 휘리릭 그에게로 스며들어 사라지고 있었다.
“콘스…!”
사이나는 나름 반가운 마음으로 그를 불렀으나 갑자기 그가 돌아섰다.
“……?”
그리고는 지척에 빚쟁이를 발견이라도 한 사람처럼 다급하게 걸어서 사라져버렸다.
뭐지?
‘지금… 날 외면하고 가버린 건가?’
방금 눈으로 본 것을 믿을 수 없어 사이나는 망부석처럼 굳었다.
“……사이나 님?”
“…….”
“왜, 왜 그러시는지…….”
“아… 니, 아니에요.”
루퍼트의 뒤쪽에서 벌어진 일이라 그는 보지 못했다.
그렇다고 ‘콘스탄틴이 저와 눈이 마주쳤는데 외면하고 가버렸어요.’라고 설명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놀라서 그래요.”
사이나는 머뭇대다가 덧붙였다.
“이런, 얼른 들어가시죠. 이보게! 말 좀 정리해 주시게.”
이때쯤, 약간씩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예! 기사님! 제가 하겠습니다요.”
루퍼트가 마구간 지기에게 서둘러 지시하고는 사이나가 성내로 들어가게끔 재촉했다.
“사이나 님, 감기 걸리십니다. 얼른 들어가시죠.”
“아… 네.”
싸한 기분에 어쩐지 머뭇거리며 걸음을 옮기는데 누군가가 다가왔다.
“마님.”
“……?”
아까 콘스탄틴 옆에 있던 남자다.
콘스탄틴의 외면에 충격을 받아 생각도 못 했는데 이제 보니 크레이머 기사단의 단장이었다.
“아, 웨슬리 단장님이시죠?”
“예, 인사드립니다.”
저번에 간단하게 소개받은 적이 있어 이름은 알고 있었다.
그저 눈이 마주쳤기에 인사를 하는 줄 알고 이만 가려 했으나 그가 머뭇거리며 말을 이었다.
“외람되오나…… 혹시 각하를 좀 들여다봐 주실 수 있으신지요.”
“…네? 무슨…….”
“각하께서 부상을 좀 당하셨습니다.”
“부상이요? 또요?”
토벌 나가도 자신은 다치지 않는다고, 그런 걱정은 할 필요도 없다고 하지 않았나?
근데 사이나가 본 것만 해도 벌써 몇 번째 부상인지…….
“본래 잘 안 다치시는데, 요즘 이상하게 군집형이 아닌 상급 마수가 동시 출몰하는 경우가 잦아지면서 대처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기사단장은 사이나의 의문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상황을 설명했다. 그의 얼굴에 걱정이 가득했다.
마수의 양이 많아진 것도 이상하고, 뭔가 이상한 현상이 많은가 보네. 대체 왜 그럴까?
“그런데 각하께서는 의원을 잘 안 부르셔서요…….”
설마 평소에 의원도 안 부르고 살았나? 등 때문에?
‘보통은 주치의가 가문 내에 한명쯤 상주하는 게 맞는 거 아니냐고?’
드보프 가문에도 있는 주치의가 크레이머가에 없을 리는 없으니 말이다.
하지만 콘스탄틴은 타인에게 몸을 보이는 것을 꺼렸다. 거기에 의원도 포함인가 보다.
보나마나 그 녹푸른색 물약이나 바르고 혼자 끙끙 앓다가 말겠지.
이리되고 보니 크레이머가에 그렇게 뛰어난 성능의 약이 있는 게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 모르겠다.
‘아니야. 좋은 약은 어떤 이유로든 있는 게 좋은 거지. 문제는 약이 아니라….’
“알았어요. 괜찮으신지 가서 보고 돕도록 할게요.”
“감사드립니다.”
감사라니, 어쩌면 당연히 해야 할 일이다.
방금 엄청난 외면을 당한 터라 용기가 아주 바닥이기는 하지만…….
사이나는 점차 빗살이 굵어지기 시작하는 흐린 하늘을 올려다본 뒤, 내성으로 들어갔다.
말을 타고 달려오는 동안 그녀의 머리카락은 꽤 마르기는 했지만 아직도 전체적으로 축축해 보였다.
“사이나 님. 먼저 따뜻한 물로 꼭 씻으셔야 합니다.”
“알았어요, 경. 경도 쉬어요.”
루퍼트를 뒤로하고 사이나는 얼른 침실이 있는 층을 향해 계단을 올랐다.
하지만 루퍼트에게 한 대답과 달리 사이나가 가장 먼저 들른 곳은 자신의 방이나 욕실이 아니었다.
방금 전 콘스탄틴의 외면에 충격을 받았던 것도 ‘그의 부상’이라는 명제 앞에서 뒤로 밀렸다.
그래도 쉽지는 않아서 크게 숨을 들이쉰 뒤에, 사이나는 그의 공간에 들어갔다.
먼저 침실을 확인했으나, 비어 있었다.
‘아직 방에 안 왔나?’
부상 입은 상태로 설마 집무실에라도 먼저 들른 건 아니겠지?
사이나는 침대 옆 협탁 서랍을 열어 보았다.
항상 있던 그 자리에 물약병이 있었다.
사이나는 그 물약병을 꺼내어 손에 들고 방을 나와 공작 개인 응접실로 다시 나왔다.
그러고 보니 욕실 문앞 바닥에 떨구어진 것들이 있었다. 이제야 그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검과 검대, 망토 등이 마구잡이로 벗어 던진 것처럼 대충 바닥에 널브러진 상태였다.
꽉 닫힌 문 너머에 그가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혼자… 씻을 수 있는 상태긴 한 걸까?’
욕실에 있다는 것을 알고 나니 들여다볼 용기가 조금 사그라졌다.
하지만 부상을 입었다고 하니까…….
‘확인은… 해보자.’
사이나는 문가에서 한참을 더 서성이다가 노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