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화. 비밀의 섬
절로 웃음이 나올 만큼 귀여우니 뭐, 상관은 없지만.
“그래. 너도 이제 사냥개 정도 크기는 되니까 속도는 상관없겠지. 가자.”
“컁!”
사이나는 욜리를 데리고 마구간으로 향했다.
“적당한 말 한 마리를 내어주시게.”
그녀의 요청에 따라 마구간지기가 순해 보이는 암말을 한 마리 꺼내와 안장을 올리고는 그녀의 체형에 맞게 이곳저곳을 조절했다.
안장 올리는 작업이 끝나자 사이나는 바로 말에 올라탔다.
“여기 가볍게 달리기 좋은 곳이 어디지?”
“북문을 지나서 조금만 더 가시면 들판이 나옵니다요.”
“고맙네.”
“그, 근데 마님! 혼자 나가시는 겁니까?”
“아.”
얼른 나가야겠다는 생각에 그냥 나왔는데, 음.
“근처만 돌고 금방 돌아올 거야. 괜찮다.”
“그래도…….”
당장 나가지 않으면 답답해 죽을 것 같은 기분이다.
어째서인지 사이나는 그 잠깐을 기다리기가 힘들었다.
게다가 욜리도 있지 않은가.
“자네가 본관에 알리게나. 루퍼트 비쉘르마 경을 찾아.”
“예, 옙!”
바로 말머리를 틀어 사이나는 북문을 통과했다.
마구간지기의 말대로 북문 바깥 너머 승마하기 딱 좋은 형태의 벌판이 펼쳐져 있었다.
거치적거리는 것이 없는 것을 본 사이나는 다리를 박차 말의 속도를 높였다.
바람을 가르며 달리는 기분은 생각 이상이었다.
나와 보니 온통 봄기운이 만연했다. 주변에는 들꽃이 만발했고 녹음이 흐드러졌다.
그 향긋한 봄의 냄새가 휘몰아치는 바람에 섞여 폐부를 채우자 답답한 속이 조금은 트이는 기분이었다.
욜리는 말의 속도에 뒤지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말 앞에서 사이나를 이끌 듯이 앞선 속도로 내내 달렸다.
사이나는 생각의 끈을 놓아버리고 자신도 모르게 욜리의 뒤를 따라 하염없이 달리게 되었다.
그래서였다. 생각 이상으로 멀리 가 버리게 된 것은.
“……와아.”
그러다 어느 순간 정신이 들었다.
눈앞에 엄청난 정경이 펼쳐졌기 때문이다.
드넓은 크기의 호수.
지리상 호수가 분명한데, 어찌나 거대한지 마치 바다 같았다.
사이나는 말에서 내려 호숫물을 손바닥에 퍼 올렸다.
입가에 올려 혀끝을 살짝 대보니 민물이었다. 확실히 호수가 맞았다.
‘겨울이 되면 이 넓은 수면이 죄다 어는 걸까?’
만약 그렇다면 꽤 장관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장엄한 대자연은 그 풍경만으로 사람을 압도하기도 한다.
그럴 때 인간이 느낄 수 있는 감정은 보통 경외감일 것이다.
사이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수면에 비친 그림자가 동공에 아로새겨질 정도로 반짝거리는 호수를 신기하게 여기며 사이나가 그 정경을 눈에 담는데, 욜리가 그녀의 드레스 자락을 물어 당겼다.
“…음? 왜?”
사이나의 주목을 끈 욜리는 갑자기 호수 쪽으로 달려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야?! 욜리!!”
녀석은 네 다리를 휘적거리며 안쪽으로 점점 들어갔다.
‘개헤엄’이라는 단어가 있을 정도면, 개과 짐승들은 본능적으로 수영을 잘한다는 뜻이겠지만 그럼에도 사이나는 불안함을 느꼈다.
“야! 욜리! 이리 와! 너 대체 어디 가는 거야!”
기슭과 점점 멀어지는 짐승의 뒤통수는 자신만만해 보였으나, 사이나는 도무지 진정할 수가 없었다.
왜 점점 더 안쪽으로 들어가는 거지?!
발만 동동 구르며 욜리의 이름을 부르던 사이나는 심장이 툭 떨어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어느 순간 욜리가 시야에서 사라진 것이다. 뒤통수조차 보이지 않았다.
“욜리이-!”
사이나는 허둥지둥 승마 부츠만 벗고 호수로 뛰어들었다.
봄이라고는 하나 겨우내 차갑게 가라앉은 호수의 수온은 냉랭하기 그지없어, 뼛속까지 얼어붙는 기분이었다.
그나마 드레스 차림이 아니라 다행이다. 드레스였다면 치맛자락이 엉겨 수영을 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사이나는 욜리가 갔던 방향으로 열심히 팔과 발을 놀렸다.
욜리가 사라져버린 곳 즈음에 다다른 사이나는 얼른 잠수를 시도했다. 혹시 안쪽에 가라앉은 거면……
‘……!?’
호수 한복판에서 잠수를 했는데 어째서인지 수면 아래로 몸을 넣자마자 무언가에 머리를 부딪쳤다.
사이나는 깜짝 놀라 흐트러진 호흡을 가지고 수면 위로 다시 올라왔다.
“후아……!”
“컁!”
올라오니 눈앞에 바로 욜리가 보였다. 녀석은 탈탈 걸어서 다가오더니 사이나의 이마를 혀로 핥아주었다.
“……어?”
세게 부딪힌 모양인지 그 부위가 욱신거렸다.
‘아니, 잠깐…. 거, 걸어서?’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야.
그러고 보니 자신의 몸도 단단한 바닥 위에 팔을 짚고 주저앉은 것 같은 형태가 아닌가?
물은 목 언저리까지 찰랑거리고 있었지만 손 아래 닿는 표면의 느낌과 엉덩이 아래 단단한 느낌은 분명, 육지 위를 디딘 느낌과 같았다.
욜리는 사이나를 몇 번 핥고는 다시 반대 방향으로 걸어갔다.
더 멀리 걸어갈수록 수위가 낮아지더니 완전한 육지 위로 올라서서 사이나를 향해 짖었다.
“컁!”
이리 올라오라는 듯이.
“……?”
눈앞에는 드넓은 육지.
그래, 육지가 있었다.
육지라니. 대체…….
호수 위의 섬 같은 건가?
‘하지만 기슭에서 봤을 땐 아무것도 없었는데?’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아서 사이나는 다시 반대쪽으로 걸었다.
“악!”
순식간에 발아래가 꺼지며 깊은 물 속으로 풍덩 빠져들었다.
어푸! 허둥지둥 다시 몸의 균형을 잡고 수면 위로 올라왔다.
돌아서 호수 중앙 쪽을 보니 육지나 섬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대체 이 무슨 귀신 곡할 노릇이지?’
아무리 눈을 감았다 떠도 보이지 않았다.
한데 헤엄을 쳐서 안쪽으로 들어가니 거기엔 분명 섬이 있었다.
“캬앙?”
‘뭐 하니, 안 올라오고.’라는 느낌으로 욜리가 고개를 갸웃대며 사이나를 보고 있었다.
‘하아, 맹약자들의 땅에는 참 신기한 게 많구나.’
잘은 몰라도 수호령과 관련한 어떤 현상이 아닐까 싶다.
호수 중간에 어떤 막 같은 것이 있어서 바깥에서 이 섬이 보이지 않도록 막아주고 있는 것이겠지.
“근데 여길 욜리 너는 어찌 알아낸 거지?”
“캬아앙?”
또 모른 척 딴청이다.
아무래도 이 녀석이 여길 사이나에게 보여주고 싶어서 그녀를 이쪽으로 이끌어온 듯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이제야 약간 납득이 된 사이나가 물에서 나왔다. 젖은 옷자락을 타고 물이 줄줄 흘러내렸고, 발은 맨발이다.
다행히 땅이 고른 편이라 신발이 없어도 돌아다니기엔 나쁘지 않아 보였다.
‘아니, 지나치게 매끈한 것 같은데?’
관리가 덜 되기는 했어도 한때는 사람의 손이 닿아서 이렇게 편평한 것처럼.
그렇게 생각하며 안쪽으로 들어가자 더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다.
‘……건물? 아니, 신전 같은 건가?’
단순히 고립된 섬이 아니었다, 여기는.
건축물의 형태들이 여기저기에 남아 있었다. 하지만 요즘 형태의 건물은 아니다.
잘은 몰라도 꽤 오래되어 보였다.
어쩐지 유적 같은…….
‘…유적?’
‘그거 아나? 크레이머 영지에 아직 발굴 안 된 유적지가 남아 있는 거?’
설마 콘스탄틴이 말했던 곳이 여긴가?
“어어-?! 설마?!”
“컁?”
“여기 거기지? 아를-프로메사 유적지?!”
대번에 밝아지다 못해 방방 뛰기 직전이 된 그녀의 모습에 욜리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말도 안 돼! 너무 멋져!”
“케헹.”
‘또 시작이군.’ 혹은 ‘여전하군.’ 이런 느낌의 절레절레였다.
젖어서 축 처진 머리카락의 물기를 쭉 짜낸 뒤, 사이나는 열심히 주변을 쏘다니기 시작했다.
착 달라붙은 승마복에다 엉겨 붙은 머리카락의 상태는 도무지 누군가에게 보여줄 만한 것이 아니었으나, 차단막 때문인지 인기척은 전혀 없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기둥마다 아를어 천지야!”
“이 장치는 뭐지?”
“수백 년은 지났을 텐데 아직도 멀쩡하네!”
언제 우울했냐는 듯, 사이나는 발그레하게 화색을 띤 얼굴로 여기저기 둘러보느라 정신없었다.
“컁!”
하지만 욜리가 그녀의 바짓단을 잡아 물었다.
“응? 왜 그래?”
욜리가 그녀를 잡아끌었다가 놓고는 어느 방향으로 몇 걸음 걸은 뒤 사이나를 돌아보았다.
“따라오라고?”
“컁!”
“어, 그래…….”
하긴, 이곳으로 사이나를 이끈 게 욜리지. 뭔가 목적이 있었나 보다.
“근데 어디로 가는 거야?”
“컁!”
물어봤자 욜리가 ‘컁’ 외의 대답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질문이 나왔다.
컁, 캬앙? 큥, 등이 다인 답변인데도 대화가 일방통행이라고는 느껴본 적이 없어서 그런 것 같다.
단답형 외의 대답은 할 수 없는 욜리지만, 그래도 머지않아 녀석의 목적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돌로 된 벽을 따라 죽 가다가 모퉁이를 돌자 갑자기 샘이 하나 나왔기 때문이다.
욜리는 샘이 나오자마자 다짜고짜 또 그곳에 뛰어들었다.
“욜리!”
물만 보이면 뛰어드는 건 왜 그런 거야?!
물론 호수에 뛰어들 때보다는 덜 놀랐다. 샘의 크기가 한눈에 들어올 만큼 작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얕다는 보장은 없는데 왜 저렇게 막무가내로 행동하는지!
“컁! 컁컁!”
욜리가 물 밖으로 고개를 빼고 사이나를 향해 짖었다.
“뭐? 나도 들어오라고?”
“컁!”
실컷 물 건너왔는데 또 물에 빠지라고?
대체 무슨 생각인 걸까. 이럴 때면 정말 녀석이 말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싶다.
“……음?”
그러고 보니 뭔가 좀… 다른 것 같네?
수면에서 아지랑이가 보였다. 그리고 그걸 보자 갑자기 추위가 확 밀려들었다.
사실 날씨가 한여름이라고 해도 젖은 옷을 입고 한참 있으면 추워지는 게 정상이다.
하물며 지금은 봄인 데다, 봄이라고 해봐야 북쪽의 봄이라 황도 쪽에 비하면 매우 서늘한 편.
뒤늦게 찾아온 추위의 자각에 사이나가 몸을 떨었다.
“컁!”
얼른 들어오라는 말인가.
사이나는 물속으로 손을 넣어보았다.
“어, 따… 뜻하네?”
대체 뭐지? 온천?
맞다, 분명 온천이다.
그럼 여기도 화산 지대인가?
‘바깥 호수 물은 차가웠는데?’
거참 희한한 일이다.
그러고 보니 물색도 다르다.
호수 물이 파란색에 가까웠다면, 온천 샘의 물은 투명한 것이 순수 물에 가까워 보였다.
근데 투명하다고 하기엔 뭔가 또 좀 이상하다.
분명 투명해 보이는데, 막상 물 안에 손을 넣으면 손이 굉장히 흐릿하게 보였다.
멀리 욜리도 수면 위의 모습은 선명했지만, 물 아래는 대충 색만 뭉개놓은 것처럼 흐릿하게 보였다.
‘아니, 어떻게 이게 가능하지?’
신기하면서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