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결혼, 이번 생엔 제가 할게요-160화 (160/233)

160화. 길들여진다는 것

“…이거 초대제 이야기 아니에요?”

“흠. 그럴지도 모르겠군요.”

초대제를 칭송하는 내용의 예술작품은 당연하게도 아주 많았다. 오페라로도 여러 개 만들어졌고, 미술품이나 조각, 음악으로도 아주 많은 수가 존재했다.

하지만 연극은 처음 접해보는 것 같다. 초대제면 아무래도 황족의 이야기이다 보니(그리고 황족 중에서도 가장 고귀한 황족의 이야기이다 보니), 이런 일개 극단은 시도 자체를 하지 않았다.

아니, 못 했다.

자칫 잘못 각색하거나 잘못 연기했다가 그걸 누군가 물고 늘어지기라도 하면 황족 모독죄 등으로 큰 고초를 당할 수도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째서 이런 연극을…?

황도와 먼 곳이라 상대적으로 자유롭기에 가능한 건가?

‘게다가 내용이 초대제의 개인사라니……?’

의아하기 짝이 없었으나 연극은 계속됐다.

조금 더 시간이 흐르고 죽은 여자의 친구가 맥을 찾아왔다.

그 품 안에는 작은 아기가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다.

“…이 아이는!”

“그녀와 당신의 아이예요.”

여자는 맥 몰래 그의 아이를 낳아 친구에게 맡겼던 것이다.

절망과 함께 살아가던 맥의 얼굴이 다시 환해졌다. 기쁨의 눈물이 흘렀다.

“그녀와 나의 아기…!”

맥은 희망을 되찾았고, 기운을 차리며 일어났다. 다시 사람들을 돕기 시작했다.

아이가 어느 정도 크고 자라나는 동안 아키는 아이의 좋은 친구가 되어 주었다.

“아키! 놀아줘!”

아니, 아키의 의지라기보다는 아이가 일방적으로 아키를 따랐다.

‘맥이 맥페이든…… 초대제라고 치면…….’

아키는 아무래도 황가의 수호령인 거북이 ‘아켈리온’을 뜻하는 거겠지?

초록색 일색의 형태가 적나라한 상징을 표현하면서도 그 분장이 너무 형편없어서 오히려 ‘아켈리온’일 리는 없다는 생각을 동시에 들게 했다.

하지만 이모저모 따져볼 때 역시나 초대제를 다룬 내용이 맞는 것 같았다.

오페라에서 주로 다뤄진 것처럼 초대제의 위대한 업적과 건국사에 초점을 맞춘 것이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그가 사랑했던 여자와의 이야기를 그리는 개인사라는 점이 달랐지만 말이다.

‘저런 내용은 역사책에 없으니 내용의 진실성 유무는 알 수 없지만…….’

그나마 도망갈 구석을 마련한 것인지, 등장인물의 이름이 미묘하게 조금씩 다르기는 했다.

실제 인물들을 떠올릴 수 있을 만큼 비슷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다르달까?

‘어떤 의미로는 참으로 대담한 극단이네.’

극단이 알면서도 저걸 상연하는 것인지, 극작가는 알되 배우들은 모르는 것인지. 사실 그저 사랑 이야기인 줄로만 알고 공연을 하는지도 모른다.

혹시나 콘스탄틴에게서 불쾌감이 보일까 싶어 흘끔 살폈으나, 그런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황가를 존중하지만 딱 거기까지인 사이나는 그렇다 치고, 제국의 4대 기둥인 콘스탄틴도 딱히 어떤 맹목적인 존경을 보내는 것은 아닌 모양이다.

‘뭐, 상관없나?’

연극은 사이나의 상념과 상관없이 계속 진행되었다.

아이는 천진난만했고 사랑스러웠다.

아이가 자라남에 따라 이따금 알 수 없는 기분을 느낄 때가 많아지는 아키였으나, 그게 정확히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키가 청천벽력처럼 말했다.

“난, 더 이상 이곳에 있을 수 없을 것 같다.”

“아키! 안 돼! 어째서 떠나려는 거지?”

“내게 주어진 시간을 다 써버렸어.”

“하지만 넌… 내 가족이나 다름없는데.”

맥은 슬퍼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은 어쩔 수 없는 일.

아키는 미련 없이 뒤돌아섰다.

“안 돼! 아키! 가지 마!”

엉엉대며 그를 붙잡은 것은 맥의 사랑스러운 아이.

“아이야. 난 가야만 한다.”

“왜?”

“그래야만 하기 때문이지.”

“하지만 안 가면 되잖아?”

아이가 천진난만하게 말했다.

“그럴 수는 없다.”

“그럼 갔다가 다시 오면 안 돼?”

“장담… 할 수 없다.”

“할 수 있으면 올 거야?”

“…할 수 있다면.”

“그럼 약속해!”

아이가 눈을 반짝이며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아이가 그를 붙잡자 아키는 ‘미련’이라는 단어가 무엇인지 조금은 알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것이… ‘감정’이라는 것이구나.”

아키는 아이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너희들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아키는 아이의 손가락을 감싸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키, 꼭 와야 해!”

붕붕 손을 흔드는 아이를 뒤로하며 아키가 무대에서 서서히 사라졌다.

시간이 흘러 아이는 자랐고 어른이 되었다. 아름다운 여성이 되었다.

그리고 그녀가 삶을 살아가며 위험에 빠진 순간, 누군가 나타났다.

“…누구죠?”

한 남자가 그녀를 구해주었다.

“나는 아키.”

“아키? 하지만 아키는…….”

“난 아키다. 네가 그리워했던 아키, 너와 약속했던 아키, 그리고 네가 원했던 아키지.”

여자의 눈이 커졌다. 아키는 그녀의 손을 붙잡아 일으키며 말했다.

“약속을 지키러 왔다. 사랑스러운 아이야.”

와아아-!

극이 끝났다. 관객들이 박수를 치며 환호성을 보냈다.

“아…….”

사이나도 한참을 몰입해서 보고 말았다.

초대제 이야기를 베이스로 한 건 확실한데, 진실성의 여부는 알 수 없다.

혹시라도 저 내용이 사실이라면, 각본가는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걸까.

‘이놈들은 종류는 달라도 대부분 집착 요소를 갖고 있어요. 정령계가 아닌 인간 세상에 그들을 묶어 놓은 계기 같은 겁니다.’

갑자기 애버딘 공작이 했던 그 말이 떠오른다.

아켈리온에게도 그런 요소가 있었을까? 그래서 돌아온 건가? 그렇다면 그 요소는…….

상념에 상념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무대 인사를 하는 배우들에게 반사적으로 박수를 보내다가 문득 정신을 차렸다.

사이나는 손을 멈추며 고개를 돌렸다가 깜짝 놀라고 말았다.

“…….”

콘스탄틴의 푸른 눈동자.

후드 아래 드러난 얼굴은 일순 무감해 보였으나, 눈은 달랐다.

스산할 정도로 짙게 가라앉은 눈이 그녀를 옭아맬 듯 바라보고 있었다.

‘콘스탄틴?’

연극이 아니라 내내 자신을 보고 있었던 것일까?

사이나가 동그랗게 그를 바라보자 그의 눈 밑이 움찔하더니, 콘스탄틴이 눈을 감아버렸다.

질끈 감은 두 눈과 일그러진 미간.

왠지 모르게 매우 괴로워 보이는 표정에 사이나는 심장이 철렁함을 느꼈다.

반사적으로 사이나는 그에게 손을 뻗다가 다시금 드러난 새파란 눈동자에 움직임이 멈췄다.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세상에 둘만이 남겨진 것처럼 순식간에 외부가 지워졌다. 주변에 가득한 사람들이 한순간 시야 바깥으로 밀려나며 오로지 그의 눈빛만이 인지 영역 안에 남았다.

“…….”

천천히 그의 손이 다가왔다. 그녀의 볼에 닿았다. 가죽 장갑의 서늘한 느낌이 볼을 감싸왔다.

사이나는 그 손바닥에 제 얼굴을 드밀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 드문 교태에 콘스탄틴이 홀린 듯 다가왔다. 후드로 가린 두 얼굴이 점차 가까워졌다.

사이나는 자연스럽게 눈을 감았다.

“…….”

하지만, 그뿐.

한참을 지나도 입술에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아 사이나는 다시 눈을 떴다.

그의 눈에 안타까움이 짧게 스쳐지나가는 듯했다.

“……돌아갈 시간입니다.”

아. 대체 무얼 기대했던 걸까.

“…….”

천천히 떨어져나가는 그의 손을 느끼며 사이나가 시선을 떨궜다.

그래서 그 떨어져 나가던 손이 장갑을 찢을 듯 팽팽하게 쥐어지는 것을, 사이나는 보지 못했다.

* * *

콘스탄틴은 어느 지역의 요청을 받고 또다시 토벌을 떠났다.

혼자 남겨진 사이나는 번역 작업에 골몰했다. 뭐든 할 것이 필요했고, 아를어는 사이나가 좋아하고 또 잘하는 것이니 집중하기에 아주 좋은 일거리였다.

“……어! 어어?!”

잠깐만! 이거 진짜인가?

아를어에 그토록 오랜 시간 매진해 왔지만 이토록 짜릿했던 순간이 있었던가?

“깊게……, 마지막……, 예비된…….”

어느 순간 뇌 속에 반짝하고 불이 켜지는 것 같더니, 블랙 다이아몬드의 구문들이 술술 해석되는 것 같은 기분이 든 것이다.

“물……, 뜨거운…… 뜨거운, 열쇠……?”

하지만 그 순간은 짧았다.

아악! 사이나가 자신의 머리채를 잡아 뜯었다.

술술 풀려나가는 듯 하던 실마리가 갑자기 뚝 끊기면서, 뜨겁게 달아오르기 시작하던 뇌까지 푸시식 식어버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뜨거운 열쇠는 아니지!”

말이 안 되지 않은가. 뜨거운 열쇠라니!

사이나는 깃펜을 책상 위로 집어던져 버렸다.

그 반동에 여기저기 잉크가 흩뿌려지며 얼룩을 만들었으나, 닦아야겠다는 생각도 들지 않을 정도였다.

“후…….”

묘하게 반복되는 구문이 많으면서도 해석이 되지 않는다. 아무래도 사이나가 알지 못하는 문법 구조가 있는 듯하다.

‘사실 그가 반드시 해독해 내라고 한 것도 아닌데…….’

사이나 혼자서 괜한 의무감에 붙잡혀 목매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이걸 해결한다고 그와의 관계가 해결되는 것도 아니고.’

그럼에도 그저 가만히 있을 수 없으니 뭔가라도 해보겠다고 헛된 것에 매달리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아휴…….”

그 증거로 잠깐만 한눈을 팔면 한숨이 새어 나왔다. 틈새로 자꾸만 상념이 파고드는 것이다.

사이나는 벌떡 일어났다.

당장 바깥 공기를 쐬지 않으면 죽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갑자기 속이 답답해졌다.

뻥 뚫린 공간과 넘치는 새 공기가 필요했다.

자연스럽게 승마가 떠올랐다.

딱히 즐기던 취미는 아니었지만, 들판을 마구 달리다 보면 속이 약간이나마 트이지 않을까.

‘생각을 비우고 미친 듯이 벌판을 달리다 보면 스트레스가 싹 사라진다니까?’

세이지 오라버니가 자주 그런 말을 했었는데, 유리나 사이나나 그 말을 별로 믿지는 않았다.

아니, 둘 다 그냥 승마에는 취미가 없어서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은 어쩐지 그 말에 신빙성이 마구 부여되었다.

잘은 몰라도 사이나는 지금 스트레스라는 것을 느끼고 있는지도 몰랐다.

확 트인 들판을 달리는 행위가 절실하게 느껴졌으니 말이다.

승마를 하겠다고 결심을 하자마자 사이나는 하녀를 불러 승마복을 준비시키고 마구간지기에게 알리도록 했다.

“컁?!”

승마복을 다 입고서 나가려는데 욜리가 자다가 벌떡 일어나더니 쪼르르 달려왔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욜리가 어쩐 일로 외출을 안 하고 방에 있었다.

“욜리?”

“캬앙?”

어디 가냐는 뜻인가.

“승마 좀 하고 올게.”

“컁! 컁컁!”

“왜, 싫다고?”

“캬앙!”

“같이 가겠다고?”

자신의 꼬리를 잡듯이 뱅뱅 돌더니 “컁!” 짖는 것이 맞다는 뜻 같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같이 가자고 하다니 이게 무슨 일이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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