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화. 수상한 연극
“아가씨, 제가 오늘 아가씨를 안고 뛰어도 될까요?”
왜 이리로 오는 거지, 생각하기가 무섭게 그 참가자가 사이나 앞에 멈추더니 이리 물었다.
“……에?”
“어머, 안 돼요! 이분은…….”
다리엘이 말을 하다 말고 멈칫했다.
평민인 척 있다가 갑자기 귀족임을 밝혀도 될까 확신이 서지 않아서겠지.
게다가 그냥 귀족 수준이 아니라 영지의 주인인 크레이머 공작부인이니.
“부탁드립니다.”
주점집 막내아들이라는 남자는 꽤 곱상한 얼굴이었다. 싱긋 웃으며 그녀에게 손을 내미는 모습에 주변의 시선이 모였다.
생각지도 못한 요청에 당황했으나, 당연히 안 될 말이다.
입을 열어 거절하려던 차에.
“그건 힘들 것 같군.”
그녀보다 먼저 입을 연 사람이 있었다.
“다른 여자를 알아보아라.”
입을 연 것만으로도 주변의 입을 다물게 하는 기세.
“흐억.”
다리엘이 숨넘어가는 소리를 냈다.
사이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뒤로 돌았다.
‘…콘스탄틴?’
그가 어찌 여기에 나타난 것일까.
후드 차림임에도 심상치 않은 느낌을 받았는지 주점집 막내아들은 당황한 목소리로 실례했다고 말하고는 얼른 떠나갔다.
“…내가 방해했습니까?”
콘스탄틴은 어쩐지 조금 불쾌한 얼굴이었다. 아니, 불안한 얼굴 같기도 했다.
“방해요?”
“혹시 수락을 하고 싶었던 것인지……. 하지만, 뛰는 동안 후드가 벗겨지면 난감한 상황이 벌어졌을 겁니다. 사내의 땀 냄새에 불쾌감을 느낄 수도 있고…….”
주저리주저리 변명처럼 늘어놓는 말들이 말 그대로 정말 변명 같았다.
갑자기 끼어들었다고 뭐라고 하기라도 할까 봐 저러는 걸까?
“아니에요. 어차피 거절할 거였는데요.”
“다행이, 아니, 그랬군요.”
콘스탄틴은 대답 후 잠시 제 눈가를 손바닥으로 가렸다가 떼더니 물었다.
“그대가… 이런 걸 좋아하는지 몰랐군요.”
좋아한다기보다는, 글쎄. 처음 보는 거라 확실히 신기하긴 했다. 굳이 호와 불호 중에 고르라면 불호일 이유도 없고 말이다.
“그러게요. 재밌는데요? 크레이머령의 봄 축제는 참…….”
사이나는 적당히 말을 골랐다.
“알차네요.”
잠깐 그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듯하더니, 묻는다.
“다, 봤습니까?”
“네?”
뭘 다 봤냐는 걸까. 상남자 뽑기 대회? 아니면 여러 남자들의 상반신 근육?
“아직 우승 장면을 못 봐서요.”
“……그래서 더 보고 싶습니까?”
흘깃, 참가자들 쪽을 향해 돌아갔던 사이나의 시선을 보고는 콘스탄틴이 묘하게 다급한 말투로 물었다.
“관상용이라면… 제 쪽이 더 낫지 않습니까?”
“네?”
“더 필요하면 밤에 제 걸 보시죠.”
“무,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거예요?”
사이나는 당황스러웠다.
요즘 매일 그의 몸을 보기는 했지만, 그건 번역 작업 때문이 아닌가.
그의 몸을 보다 보면 사심 어린 망상이 낄 때가 많았기에 약간 찔리기는 했지만 사이나는 열심히 부정했다.
“…이상한 소리를 하시네요.”
“…….”
사이나는 어쩐지 오기가 생겨 더 참석자들을 유심히 보는 시늉을 했다.
콘스탄틴이 나타난 시점에서 이미 신경은 온통 그를 향해 있어서, 눈에 들어오는 게 없었으나 겉으로 보기에는 열심히 경합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보였다.
“…사이나? 경합 끝났습니다만…….”
그리고 한참 후에, 사이나는 멀쩡히 눈을 뜨고서도 다른 시간을 살다 온 것처럼 흠칫 정신을 차렸다.
지나치게 콘스탄틴에게 신경을 쓰느라 막상 대회가 어찌 끝났는지 인지도 못 한 것이다.
그리고 그 모습은 지나치게 여운에 젖은 나머지 깊이 몰입해서 현실과 괴리된 것처럼 타인에게 비쳤다.
“…아, 끝났군요.”
“…….”
실상은 그렇지 않았지만 말이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경합이 끝났고, 사이나는 앞에서 사회자와 함께 손을 맞잡고 허공으로 치켜들며 감사 인사를 나누고 있는 한 참가자의 모습에서 그가 우승을 했음을 알 수 있었다.
초반부터 호명률이 가장 높았던 한스라는 이름의 남자였다.
그녀는 무두장이 집 아들을 우승 후보로 꼽았으니, 예측에 실패한 셈이다.
“아쉬워라.”
“…….”
역시 자신은 내기엔 그다지 재능이 없는 것 같다며 ‘도박 따윈 절대 해선 안 되겠어.’라고 사이나는 다짐했다.
그 ‘아쉽다’는 말이 콘스탄틴의 얼굴을 시시각각 굳혀가는 것을 모른 채 말이다.
그리고 정신을 차려보니 다리엘이 없었다.
“……다리엘 어디 갔어요?”
“내게 당신을 맡기고 먼저 갔습니다.”
다리엘이 언제 사라진 지도 모르다니.
‘하, 이 몹쓸 버릇을 좀 고쳐야 할 텐데.’
사이나는 뭐 하나를 신경 쓰면 주변 환경을 완전히 잊고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버리는 습관이 있었다.
아를어 연구할 때나 주로 그런 줄 알았더니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다.
그녀는 얕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군요. 그럼, 이만 갈까요?”
그녀는 콘스탄틴과 함께 상남자 뽑기 대회의 구경꾼 무리를 빠져나왔다.
둘 사이에 약간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이제 무얼 어째야 하는 걸까.
크림성으로 돌아가면 되는 걸까?
그때, 콘스탄틴이 물었다.
“연극에, 혹시 관심 있습니까?”
“연극이요?”
“봄 축제에 맞춰 순회팀이 영지 방문을 요청했었습니다. 승인을 했었고요.”
귀족들은 주로 오페라를 본다.
연극은 오페라에 비해 정제되지 못한, 더 날것으로 여겨졌다. 귀족들에게 말이다.
주로 방랑극단에 의해 상연되는 것이 연극이기에 천하다는 인식도 있었다.
사이나야 어릴 적에 유리와 함께 싸돌아다니며 많이 구경했지만. 아니, 오페라보다 연극을 본 횟수가 따져보면 더 많은 것 같다.
“때마침 저쪽에서 공연을 하는 것 같군요. 원한다면 보고 갑시다.”
바로 크림성으로 돌아갈 줄 알았더니, 이런 제의도 한다.
근래 그녀를 보면 피하기만 하던 그를 생각할 때 의외라고 여기며 사이나는 승낙했다.
“네. 좋아요.”
완성도나 무대 효과를 기준으로 하면 이런 방랑극단의 연극은 오페라를 따라가기 힘들 것이다.
하지만 현장성이 주는 즐거움은 이쪽이 확연하게 높았다. 관객과 무대 사이가 가깝다 보니 아무래도 생동감이 더 넘쳤고, 실제 평민의 일상이나 사랑 이야기가 많아서 좀 더 친근감 있게 몰입하기가 쉬웠다.
주변 호응도에 따라 배우들이 더 배역에 심취하기도 하고 과장된 리액션을 보여주기도 해서 일방향이 아니라 양방향으로 소통하는 재미가 있달까.
‘이번 연극은 무슨 내용일까?’
순수하게 궁금증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콘스탄틴이 조심스레 뚫어주는 길을 통해 인파를 헤치고 들어가자, 연극은 이미 한참 진행 중이었다.
“맥. 그 여인을 사랑하느냐?”
“그렇다.”
“사랑이라……. 인간들은 그 단어를 자주 입에 올리던데, 대체 그게 뭐지?”
무대 위에는 남녀 두 사람과 정확히 무엇을 상징하는지 알 수 없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초록 일색의 인물이 있었다.
“사람이 사람에게 가질 수 있는 가장 지고한 감정이지.”
“감정이라고?”
“그 사람을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고, 세상 모든 것을 안겨주고 싶으며, 그 사람이 가장 행복하기를 바라는 것.”
맥이라는 이름의 남자가 무대 저쪽의 여자를 보며 대사를 쳤다.
‘맥’이라고? 그리고 초록 덩어리의 존재.
‘음, 이거 혹시……?’
아냐, 아직 잘 모르겠다. 조금 더 봐야 할 듯하다.
“저 여인은 널 바라보지도 않는데 어째서 너는 계속 사랑할 수 있지?”
“아키, 그런 건 상관없어. 내 마음은 이미 내 것이 아니니.”
“네 마음이 어째서 네 것이 아니라는 건가?”
“그녀가 가져가 버렸으니까.”
…아키라니.
‘설마 내가 생각하는 그게 맞는 건가?’
“아키! 안 돼! 그녀를 죽이지 마!”
내용은 점점 흥미진진해졌다.
“저 여인은 널 죽이려고 했어.”
“그래도 안 돼! 난… 그녀를 죽일 수 없어.”
극은 클라이맥스에 다다랐다.
맥은 온갖 고난을 넘어야 했다.
가는 곳마다 마수가 넘쳐났고, 그의 힘을 탐내는 사람들에게 속고 치여서 수도 없이 죽음의 위기를 넘겨야 했다.
세상은 어지러웠고 맥이 사랑한 여자는 그 사랑을 되돌려주지 않았다. 그의 힘을 이용하기 위해 사랑하는 척을 했을 뿐이다.
그리고 그 모든 여정을 함께하는 내내 아키는 맥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인간이 말하는 ‘사랑’이라는 것을 난 도무지 이해할 수 없구나.”
“언젠가는… 아키 너도 알게 될 거야.”
맥이 사랑한 여자는 결국 죽었다. 맥을 꾀어내어 해하려던 적에게 미끼로 쓰이다가 죽음에 이르렀다.
“사실…… 맥. 널 사랑했어.”
그리고 그 죽음 직전의 순간에서야 여자는 자신의 진심을 털어놓았다.
“알고 있었어.”
“널… 조금만 일찍 만났더라면…….”
맥은 그녀의 시신을 끌어안고 울부짖었다. 복수를 외치며 적들을 저주했다.
결국 그의 적들은 그의 손에 잔인하게 섬멸되고 만다.
드디어 평화로워진 세계.
복수를 끝냈으나 표정이 사라진 맥의 곁에서 아키가 물었다.
“그 여인은 널 사랑했다면서 왜 그런 것이지?”
“그녀는 최선을 다해 사랑했어. 그저 당시의 상황이 그걸 허락하지 않았을 뿐.”
“여자가 죽었으니 그럼 이제 사랑이 끝난 건가?”
“아니. 내 사랑은 끝나지 않아.”
맥은 말했다. 사랑은 세상에서 가장 지고하고 아름다운 감정이라고.
그러나 맥의 표정은 절망에 빠진 듯했다.
“그런데 왜 그런 표정이냐?”
“그녀가 없으니까……. 그녀가 없는 세상에 더는 존재하고 싶지 않아.”
“그럼 죽는 대신에 그만 사랑하면 되지 않느냐?”
“할 수 없어.”
“어째서지?”
“그녀를 사랑하는 마음을 멈출 수 없기 때문이지.”
“너희들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구나.”
“언젠가…… 너도 이해할 수 있는 날이 올 거야.”
맥의 고난과 복수. 맥의 사랑. 그리고 맥의 곁에서 그를 도운 초록색 생명체.
얼핏 보면 한 남자의 사랑 이야기를 다룬 내용같지만, 그렇다고 하기엔 또 그 사랑이 이루어지질 않는다.
게다가 단순한 한 남자의 것이라고 하기엔 서사가 지나치게 비범했다.
‘아니, 아무리 봐도 이 내용은…….’
사이나는 이렇게 물을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