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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결혼, 이번 생엔 제가 할게요-156화 (156/233)

156화. 적극적인 밤을 부탁드리죠

“실언했군요. 복수라기보다는……, 음. 상황이 자신의 뜻대로 풀리지 않은 것에 대한 반발심을 그대로 흘려보낼 만한 사람이 아닙니다.”

아무리 황자라지만 진짜 이상한 사람 아닌가? 사이나의 의사와 상관없이 그녀를 제멋대로 헤베타를 삼으려고 한 것도 열 받는 판에, 그게 마음대로 안 되니까 악심을 품고 있다는 말이잖아?

사이나의 상식으로는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심성이었으나, 그렇다고 콘스탄틴의 분석을 무시할 수도 없었다.

그는 사이나보다 황자를 더 잘 알 만큼 교류했을 거고, 그러니 없는 말을 하는 것은 아닐 터다.

“하아…. 알았어요.”

근데 자신의 일은 그렇다 치고, 그런 사람이 황제가 되어도 괜찮은 건가?

정치에 큰 관심을 두고 살지는 않았으나, 짧은 사견만으로도 일국의 왕의 재목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게다가 맥페이든은 왕국도 아닌 제국이다. 제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어쩐지 미래가 걱정되기 시작했다.

“대신… 이라고 하기는 뭐하지만, 혹시 바라는 것이 있습니까?”

콘스탄틴이 약간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네?”

“원하는 것이 있다면 뭐든지, 말해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원하는 것이라…….

이것도 그가 자주 써먹던 보상성 발언인가?

그렇지 않아도 그에게 상당히 불만이 있던 차에 저 정중하고 여유 있어 보이는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 왜인가. 또다시 부아가 치밀었다.

“음, 글쎄요.”

사이나가 손에 들고 있던 종이와 펜을 탁자에 내려놓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아, 있네요. 부탁드릴 거.”

“뭡니까? 그게 뭐든,”

“뭐든지요?”

“예, 뭐든.”

“좋네요.”

사이나는 싱긋 웃었다.

“밤이 요즘 너무 짧은 게 좀 불만족스럽더라고요.”

“……예?”

“적극적인 자세도 좀 부족하시고.”

“…….”

“저만 좋자고 하는 게 아니잖아요, 이게?”

사이나는 당황스러워 보이는 그의 눈을 빤히 바라보며 나른하게 덧붙였다.

며칠 만에 다 옮겨 적기에는 내용이 좀 많기도 하고 말이죠.

원활한 번역을 위해, 토시 하나 빼놓지 않고 꼼꼼하게 작업할 필요가 있지 않겠어요?

“그러니 매일 밤.”

“…….”

“제가 만족할 때까지.”

언제나 오해 사게끔 말을 하던 건 콘스탄틴이었지만, 그녀라고 못 할까.

“길게- 좀 부탁드릴게요.”

사이나는 그를 올려다보며 더 나붓하게 웃었다.

“괜찮으시죠?”

그 미소에 결국 그의 평정이 깨져나가는 것이 보였다.

당황이 어리는 그의 표정을 보니 묘한 만족감이 피어올랐다.

‘대체 내가 왜 이러지?’

스스로 느끼는 감정이 이해가 되지 않으면서도, 어쩐지 멈출 수가 없달까.

더 이상 그를 괴롭게 하지 말자고 했던 다짐은 어느새 휘발되어 사라지고, 기이한 가학심만 남아 자꾸 그를 자극하고 싶어졌다.

자꾸 그녀의 앞에서 정물같이 잔잔해져 가는 콘스탄틴의 모습을 깨버리고 싶어져서인지도 모르겠다.

“오늘부터 바로랍니다?”

그러니 멈출 수도 없었다.

“자, 그럼 적극적인 탈의와 협조, 부탁드려요.”

콘스탄틴은 별다른 대꾸 없이 몸을 일으켰다.

어쩐지 좀 삐걱거리는 움직임을 보이기는 했으나, 중간에 멈추지는 않았다.

가운을 벗은 그가 뒤를 돌더니 스툴에 앉았다. 등받이가 없어서 어제도 같은 용도로 썼던 의자였다.

밤이라 그런지 묶지 않은 그의 백색 머리카락이 길게 드리워 등을 가리고 있었다.

사이나는 그의 뒤에서 콘스탄틴의 머리카락을 스윽, 쓸어 한데 모았다.

손에 감기는 머리카락의 느낌이 관리 잘한 귀족 영애의 것만큼이나 결이 좋고 부드러웠다.

그 느낌이 좋아서 사이나는 손가락으로 빗질을 하며 머리카락을 그러쥐었다.

그럴수록 그의 어깨가 더 뻣뻣하게 굳어가는 것이 보였다.

“…사이나. 내가, 하겠습니다.”

그는 그녀의 손이 닿지 않게 자신의 머리카락을 옮겨 쥐고는 한쪽 어깨 앞쪽으로 넘기며 다시 등을 보였다.

‘닿으면 안 되는 영역에 머리카락도 포함인 걸까?’

머리카락에는 촉각도 없는데?

그 와중에 아까 빗다가 빠졌는지 머리카락 한 가닥이 그의 등에 붙은 것이 보였다.

사이나는 천천히 손가락을 뻗어 그 한 올을 집어 들었다.

손끝이 정말 살짝 스쳤는데, 닿은 부분의 등 근육이 움찔하는 것이 보였다.

한숨처럼 그녀를 돌아보는 그에게 사이나는 손가락 사이의 머리카락을 보여주었다.

“이거 떼느라고요.”

“…….”

긴장감이 어린 그의 표정을 보고 있노라니 또다시 미소가 새어 나왔다.

사이나는 웃으며 덧붙였다.

“아무래도 사람의 몸인지라 굴곡이 있어서, 일그러진 부분은 제가 좀 만지면서 봐야 할 것 같아요.”

“…….”

“맨손으로는 안 만질게요.”

미처 장갑을 안 챙겨왔지만, 천으로 손을 감고 만지거나 하면 되니까.

“…알겠습니다.”

그는 아까보다 한결 낮아진 톤으로 알겠다고 대답했다.

* * *

이런 날들이 며칠 밤 지속되었다.

그의 평온함을 깨고자 했던 목적과 별개로 사이나는 이 작업에 열심을 기울였다.

“흠, 여기 잘 안 보여서 바지 조금만 내릴게요.”

“……예.”

하아. 짧은 한숨 소리가 들린 것 같은데, 착각일까.

하지만 등판 제일 아래쪽 문양이 바지에 가려 다 보이지 않았다.

사이나는 장갑을 낀 손으로 바지의 허리 부분을 잡고 슬쩍 아래로 내렸다.

그의 옆구리 근육이 움찔하며 수축하는 것이 육안으로도 보였지만, 별수 없었다.

손을 떼면 도로 문양을 가려버리기에 그 상태로 고정한 채로 다른 손으로는 열심히 문양을 따라 그렸다.

“…잠시만.”

처음에는 그 목소리가 안 들렸다.

“사이나, 잠시만… 쉬었다가 합시다.”

목이 멘 듯한 목소리로 그가 재차 말했다.

“거의 끝났어요. 조금만 더…….”

사이나는 열심히 옮겨 그리며 기계적으로 대답했다.

“아니요.”

하지만 그는 그 조금을 못 참겠는지 성큼 그녀에게서 떨어져 나갔다.

그녀 쪽을 보지도 않은 채로.

콘스탄틴은 허둥지둥 벌떡 일어나 가운을 걸치며 조급하게 덧붙였다.

“나머지는 내일, 내일 하도록 합시다.”

마찬가지로 그녀 쪽은 보지도 않은 채 그는 응접실 쪽으로 나가버렸다.

갑자기 급히 화장실이라도 가고 싶어진 사람처럼 후다닥 사라지는 모습에 그의 허리춤을 잡고 있던 손이 잠시 허공에 붕 떴다.

‘너무 붙잡고 있었나…….’

붕 떠 있던 손을 추스른 사이나가 작업물과 필기도구를 챙겼다.

‘내일부터는 시간을 좀 줄일까?’

지금껏 옮겨 적은 것만으로도 사실 한참 연구할 분량은 된다.

나머지는 해괴한 형태로 얼기설기 얽혀 새겨져 있어서 옮겨 적기조차 힘든 것들이 대다수였다.

하지만…….

사실 연구의 목적도 목적이지만, 이렇게라도 접점의 시간을 두지 않으면 콘스탄틴이 또다시 거리감을 두고 떨어져 나가, 그렇게 사이가 굳어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후.”

사실 사이나로서도 이 시간이 쉽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그의 잘 짜인 근육의 형태를 보고 있으면 곤란할 때가 많았다.

어느새 문양은 잊히고 그의 품에 안겼을 때의 느낌이랄지, 그가 격렬하게 움직일 때 그 근육들이 어떻게 꿈틀거렸던가, 하는 강렬한 영상들이 머릿속을 파고들어 와 그녀를 잠식하고는 했던 것이다.

그때마다 다시 마음을 다잡느라 얼마나 힘들었던지.

‘아휴.’

또 불온한 이미지들이 머릿속을 잠식하려고 해서 사이나는 고개를 저었다.

‘……인사나 하고 가서 자자.’

하나 응접실로 나가자 그가 보이지 않았다.

설마 밖으로 나간 건가?

‘갑자기 급하게 처리할 일이라도 생각난 걸까?’

근데 콘스탄틴의 평소 성향상 가운차림으로 업무를 보러 갔을 것 같지는 않다.

고개를 갸우뚱하며 돌아가려던 차.

“하아.”

어쩐지 숨넘어가는 소리 같은 게 들렸다. 그리고 촤아악, 하는 물소리도 같이.

흠칫, 하여 주변을 둘러보자 문 하나가 눈에 뜨였다. 또다시 욕실이었다.

급한 품새로 나가더니 갑자기 씻는다고? 문을 완전히 닫지도 못할 정도로 급하게?

이는 아마도, 정말 씻는 것이 목적이라기보다는…….

“…….”

사이나는 감히 그 틈새를 들여다볼 생각도 못 했지만, 찬물에 몸을 강제로 가라앉히고 있을 그의 모습이 자연적으로 그려졌다.

덕분에 머릿속은 며칠 전의 기억을 자동으로 불러왔고, 사이나의 얼굴은 발갛게 달아오를 수밖에 없었다.

대범한 척, 필사적으로 그를 자극한 결과가 이거다.

‘역시… 난 누구와도 닿아서는 안 됩니다.’

그녀에게는 아닌 척했지만, 결국 그는 그런 척만 한 것뿐 여유로워진 것이 아니었다.

여전히 욕구 충만한 남자였고, 알 수 없는 비밀 때문에 사이나에게 손을 대지 못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이 분명하게 드러났다.

‘난…….’

무얼 어쩌고 싶은 걸까.

양 갈래로 흩어지는 생각에 속이 시끄러웠다.

머릿속의 결심과 마음이 원하는 것이 자꾸 어긋나다 보니, 일관되게 행동하기가 너무 어려웠다.

사이나는 주춤거리는 다리를 추슬러 자신의 방으로 도망쳤다.

* * *

봄 축제의 첫째 날이 되었다.

콘스탄틴에게 미리 들은 대로, 이날은 영지민들에게 사이나가 영지의 안주인으로 첫선을 보이는 날이었다.

사이나는 다리엘의 도움을 받아 적당한 드레스로 치장한 뒤, 밖으로 나섰다.

그리고 지붕이 없는 마차에 콘스탄틴과 나란히 앉아 크림성을 빠져나왔다.

“와아아아!”

“환영합니다! 마님!”

거주 구역으로 들어서자마자 엄청난 꽃비가 뿌려지며 환영의 목소리가 고해졌다.

얼떨떨하기까지 한 환대에 사이나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 줄 모르겠어서 그를 보았다.

전날 밤의 사건으로 사이나는 살짝 어색함을 느끼고 있었는데, 그는 금세 또 어른의 얼굴이 되어 여유로운 태도를 내보이고 있었다.

‘이렇게 나와서 표정 관리도 없이 영주민들에게 인상 쓰고 있으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기는 하겠지만.’

사이나도 짧게 심호흡을 하며 주변을 향해 웃으려 애썼다.

문득 홀랜더령의 주민들이 생각났다.

생활고에 찌들은 데다 조금만 빌미가 보여도 맞아 죽는 것이 일상이었던 그곳의 주민들은, 그녀는 물론 귀족처럼 보이는 사람의 머리 꽁지만 보여도 도망 다니기에 바빴다.

절망과 체념이 일상인 듯 우울한 얼굴이 대다수였는데, 이렇게 밝은 표정의 영주민들을 보니 뭔가 남다른 기분이 든다.

특히 크레이머령은 1년 내내 전시 체제에 가까운 곳 아닌가. 그런데도 주민들의 얼굴이나 거리의 모습에 불안감이라고는 보이지 않고 그저 활기차 보였다.

“공작님께선 아주 좋은 영주시군요.”

“예?”

“저들의 얼굴만 보아도 알 것 같아요.”

“…….”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안전하게, 행복하게 지켜주고 있는 사람이다.

새삼 그의 어깨에 얼마나 큰 의무가 지어져 있는지 깨닫게 된다.

‘이 의무를 더는 이어갈 사람이 없게 되면…… 여기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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